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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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선을 벗어나 러시아로 떠난 여자

따냐(안나)는 조선 역관 집안에서 자란 여자다. 역시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교육 덕분에 따냐는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익혔고 특히 러시아어에 능하다. 집안에 닥친 불행을 피해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로 넘어간 따냐는 '얼음여우 사기단'에 픽업되어 유럽 귀족들에게 숲을 파는 사기에 가담한다. 그 와중에 경쟁사기단인 '흑곰단'의 조선인 '이반'을 만나고 자기가 속한 얼음여우 사기단을 속이고 숲 판 돈으로 한 몫 챙긴다. 따냐와 이반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5명으로 이루어진 갈범무리 사기단을 결성해서 큼직한 사기를 치고 다닌다.


처음 읽은 김탁환의 소설이다. 제목만 보고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는데 표지를 살펴 보니 '노서아 가비'는 러시아 커피였다. '아라사 가베'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무기삼아 구한말을 누빈다

배경은 조선이 저물어 가는 시기. 러시아에서 사기를 치는 일당이던 갈범무리 사기단은 민영환을 대표로 니꼴라이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단의 통역관으로 참석하면서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조선을 지키려는 민영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따냐의 마음이 움직인다. 따냐는 물론이고 이번 역시 조선인이기는 하지만 조선 이름을 잃은 민초들이다. 따냐의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처형단한 역관이고, 이반은 노비로 조선에서 도망친 부모 밑에서 자랐다. 도대체 이들의 마음 속에 조선에 대한 무슨 정이 남아 있을까?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정말 그랬던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민영환, 윤치호 이후 이완용도 나오고 고종도 등장한다. 아마도 당시에 러시아어에 능통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냐와 이반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누비고 다닌다. 이반은 고종의 통역관이 되고 따냐는 고종황제에게 커피를 끓여서 대령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의 흐름에 두 명의 가상인물을 슬쩍 끼워 놓았다. 두 사람에게 대단한 역사인식 따위는 별로 없다. 이반은 권력을 향해 움직이고 따냐는 이반을 향해 움직인다. 소설 내내 왠지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와는 다른 맛을 품은 커피향이 진동하는 것 같다. 러시아 커피는 더 쓰고 거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김탁환 1968 ~ . 소설가. 주로 역사에 관한 소설을 많이 쓴다.


하지만..

이 책은 커피향 가득한 정서를 전달한다. 아마도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데서 착안한 소품이고 제목일 것 같다. 커피향 가득한 소설.. 좋다. 하지만 이 책이 재미있었는지 물어 본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따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구한말의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흘러가지만 엄청나게 흥미가 돋지는 않는다. 독자가 책 속에 푹 빠지기에는 인물들에게 크게 동화가 되지도 않고 연민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빨리 쉽게 읽을 수는 있는 굉장히 재미가 있지는 않다.


나는 그 이유로 이 책이 너무 짧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250 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지만 작은 판형, 자간 간격, 중간에 들어 있는 그림을 감안해 보면 꽉 찬 책 기준으로 70이나 80 페이지 정도밖에 안된다. 한 인물의 삶과 구한말의 복잡한 정세를 다루기엔 너무 짧다. 그러니 모든 사건이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인물들도 두 주인공 빼고는 그냥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정도다. 어느 인물 하나 정붙일 사람이 없다. 당연히 인물 묘사도 생생하지 않고 굉장히 평면적이다. 따냐와 이반도 마찬가지. 오래 등장한다고 정드는게 아니다.


고종. 1852 ~ 1919.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커피를 굉장히 좋아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관파천에서 환궁까지의 긴박함

필치가 담담한 편이라서 크게 긴박감이 느껴지는 소설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반(김종식)이 고종을 암살하기 위해서 따냐가 갈아 놓은 커피에 아편을 몰래 넣는 장면은 가상의 인물이 적극적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대담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걸 막은 따냐의 활약 역시 눈에 띈다. 더불어 마지막 따냐와 이반의 대화는 인상깊다. 어떻게든 이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으려는 따냐. 따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이반. 따냐는 이반을 사랑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반이 따냐를 사랑했는지는 궁금하다. 그리고 이반이 했던 모든 말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도 궁금하다. 이 모든 궁금증은 이반이 거열형에 처해져서 진실은 이제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흥미진진하게 사건들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정확하게는 사건은 흥미진진할 수 있을 뻔했는데 긴박감이 흐르지는 않는다. 담담하게 글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구한말의 실체적인 모습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특히 역사책에서 '아관파천'이라는 사자성어 비슷한 사건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느껴볼 수 있는 점도 좋다. 마지막에 따냐는 빼째르부르크를 거쳐 미국으로 넘어가 카페를 열고 '노서아가비'를 판다. 그리고 그곳의 문인들과 교류를 갖는다. 참 안전하고 마음이 놓이는 결말이긴 한데, 이후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탄되고 국권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면서 따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지 않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읽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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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갈릴레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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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다작 베스트셀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하는 작가라서 한 해에도 수많은 책이 나온다. 도대체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소설을 끊임없이 써낼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게다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미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고 골수 팬들도 많은 것 같으니 그럴만도 하다. 책을 내는 족족 드라마화, 영화화되고 있으니 게이고의 인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괜찮은 작품도 많아서 대부분 읽어 보고 싶지만 그만큼 실망하는 작품도 많아서 무작정 사서 읽기도 부담스럽다. 사실 너무 많아서 나오는대로 살 수도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목록을 보면 일련의 시리즈물이 있는데 보통 한 명의 작가가 시리즈 하나를 쓰는 경우는 있어도 게이고처럼 여러 개의 시리즈를 동시다발적으로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 처음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었을 때, 이 책이 시리즈의 일인니 모르고 집어 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책 속에 갈릴레오라는 물리학 조교수의 이름이 등장하자마자 이 책이 '갈릴레오' 시리즈 중에 한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게이고의 소설을 거의 읽어 보지 않았던 나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고 《탐정 갈릴레오》는 갈릴레오가 등장하는 첫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東野圭吾 (1958 ~ ) 일본의 소설가. 가장 인기있는 소설가 중 한 명.


물리학 조교와 형사의 멋진 콤비 플레이

갈릴레오는 책 속에 등장하는 데도 대학 물리학과 조교수 '유가와 마나부'의 별명이다. 처음부터 갈릴레오라고 불린 것은 아니다. 마나부의 친구이면서 경찰청 수사1과 형사인 '구사나기 슌페이'가 마나부의 도움으로 난관에 처한 사건을 해결하자 슌페이의 동료들이 마나부에게 붙인 별명이(라는 것이 거의 끝에 드러난)다.


《탐정 갈릴레오》은 모두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주인공이 물리학과 조교수다 보니 모든 사건들이 과학과 연관이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마나부는 과학지식을 이용하여 트릭이나 이상 현상들을 설명한다. 마나부는 슌페이에게 이것 해 달라 저것 확인해 달라 요청하고 슌페이는 영문도 모르면서 투덜대며 마나부의 요청에 따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깔끔한 사건 해결. 다섯 편이 모두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마치 홈즈와 왓슨, 김전일과 미유키를 보는 것 같다. 그 와중에 독자는 잘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멋지게 해결되는 것을 보고 감탄한다.


게이고의 소설은 대부분 드라마화, 영화화된다. 사진은 동명의 드라마 중 일부.


하지만..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에 비해서 몰입도도 좋고 트릭도 무리없어 보여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해결과정이 너무도 과학적이라서 일반 독자들이 머리를 굴리면서 읽을 수 있는지는 궁금하다. 나처럼 추리력이 약한 사람은 상관없지만 책을 꼼꼼히 읽으면서 추리해 가면서 읽는 사람도 있을텐데, 그런 사람들도 과학 트릭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 흥미를 느낄까? 너무 전문적인 지식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다. 즐겁게 읽고 결말도 흥미롭지만 생각하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그저 따라가면서 읽는 미스테리 소설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용의자 X의 헌신》에서는 갈릴레오가 과학자로서 추리하기보다는 탐정으로서 추리를 한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걸작 중 하나로 유명하다. 과학적 소재가 떨어졌을 수도 있고, 너무나도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트릭의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인 유가와 마나부는 테도대학 물리학과 조교수로 과학적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

재미있다. 몰입감도 좋다. 하지만 이미 읽은 그의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비밀》,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악의》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다른 단편집들보다는 낫다.물리학자로서 사건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마나부의 모습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거꾸로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도 게이고의 다른 단편들보다는 훨씬 낫다.


《탐정 갈릴레오》을 시작으로 해서 갈릴레오 시리즈가 시작되었으니, 갈릴레오 시리즈를 읽는 독자들은 캐릭터 이해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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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상식과 교양으로 읽는 유럽의 역사
만프레트 마이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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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후 복잡해 지는 유럽


역사는 어릴 때부터 흥미있게 봐왔다. 주로 관심을 가진 건 중국역사, 로마역사, 고대사 그리고 한국사 정도였다. 깊이 파고 들었다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으니, 대강 흐름만 아는 정도이다. 좀더 세부적으로 알고 싶다고 항상 생각하지만 너무 볼 것이 많다. 읽을 때는 재미있어도 머리에 남지도 않는다. 대충 로마의 역사를 보고 나면 이제 슬슬 유럽의 역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중국이나 로마처럼 그냥 한 개 국가와 부수적인 다른 나라들의 관계만 알고 있으면 되는 역사에 반해 유럽으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 진다. 보통 그 기점을 프랑크 왕국과 샤를 대제로 잡는데 그 이후는 단편적인 지식만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상식과 교양으로 읽는 유럽의 역사》를 집어든 이유는 별 거 없다. 로마 이후 유럽의 역사에 대해 흐름을 파악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만프레트 마이 Manfred Mai. 1949 ~ . 독일의 교사. 청소년 작가.


짧게 연대별, 사건 위주로 훑어보는 유럽 역사


《상식과 교양으로 읽는 유럽의 역사》은 그리스 시대로부터 유럽연합이 형성되는 최근까지 유럽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다룬다. 처음 다섯 개의 장에서 유럽의 지역적 정의, 그리스 역사, 로마역사, 그리스도교의 탄생, 프랑크 왕국의 탄생을 설명한다. 각기 하나의 장인데 5~6 페이지이다. 그리스도 6 페이지, 로마도 6 페이지. 짧다. 짧아도 너무 짧다. 처음 나의 의도가 아무리 훑어보기였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다. 더군다나 각 시대를 연결하면서 설명한 것도 아니라서 시간을 차례대로 서술해 나간 것을 제외하면 앞뒤 연관성이 별로 없다. 흐름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청소년을 위해' 쉽게 설명했다고 하는 암호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도 이 책과 비슷한 이유로 암호에 대한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 읽었는데 다른 암호 관련 책에 비해 오히려 더 어려웠다. 짧은 책이라고 해서 쉬운게 아니다. 오히려 두꺼운 책이 읽는데 힘들기는 해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면 더 쉬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 실제 역사 관련 내용은 240 페이지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유럽 3,000년 역사를 1 페이지당 10년씩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도되면 거의 주요사건의 명칭만 알려주고 넘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머릿속에 남는 것은 전혀 없다.



카롤루스 대제. Karolus Magnus. 742 ~ 814.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2대 왕.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라고 하며 샤를마뉴로 많이 알려져 있다. 로마 이후 유럽역사 초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


심하게 요약한 책은 읽는게 아니다


책을 고를 때 범하는 흔한 실수를 또 저질렀다. 이 책이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역사를 잘아는 사람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테고, 전혀 모르는 사람은 읽어도 구체적이지 않은 단어의 나열을 읽을 뿐이다. 결국 추천하기 애매한 책이다. 마지막에 나온 국가별 색인도 딱히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얇은 책이 민망해서 추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책에 대해서 많이 얘기할 것도 없다.


★★


다 읽고 나서 저자 소개를 보니 책을 100권 이상 쓴 사람이다. 그럴법한 사람이 쓴 그럴 법한 책이다. 청소년이든 일반인이든 이 책을 읽으면 역사에 대한 흥미가 오히려 떨어질 것 같다. 딱히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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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궤도 1 - 빨간 비행기 신의 궤도 1
배명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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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명을 쓰고 15만년 후로..


김은경은 인공위성을 1,700개나 소유한 재벌 회장의 딸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정상적이지는 않다. 은경의 엄마가 회장의 현지처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엄마를 닮아 예쁜 외모를 자랑하는 은경. 하지마 은경의 엄마는 어느날 들이닥친 회장의 본처에게 수모를 당하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 이에 절망한 엄마는 3주 후에 자살하고 은경은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엄마는 진심으로 회장을 사랑했던 것 같다. 회장 역시 은경 모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이후 은경이 비행관련 공부를 해나가는 동안 눈치채지 못하도록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은경은 아버지의 도움을 알게된 후에는 아버지와 연관되는 것을 거부한다.


은경이 다니던 비행학교에는 바클라바라는 터키 출신 소년이 있다. 바클라바는 김회장의 회사에서 실행한 실험 실수로 부모를 잃고 복수를 다짐한다. 은경이 김회장의 딸이라는 것도 알고 접근을 한다. 딱히 은경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건 아니라서 둘은 티격태격하다가 가까워진다.


라경은 은경의 이복언니, 김회장 본처의 딸이다. 당연히 은경을 좋아할 리가 없다. 라경은 음모를 꾸며서 바클라바가 테러를 하도록 조장하고, 바클라바는 테러를 감행하다 죽게 된다. 라경의 음모에 의해서 은경은 공범으로 몰리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김회장은 은경을 살리기 위해서 몰래 빼내 동면하게 한 후 때마침 만들고 있었던 새로운 인간의 주거지, 정확히는 재벌들이 은퇴한 이후 살아가려고 만들고 있던 새로운 행성인 나니예로 가는 우주선에 탑승시킨다. 잠깐 자고 일어난 은경.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은경은 냉동되어 잠든 사이에 15만 년이 흘렀고 자신이 나니예라는 다른 행성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신의 궤도》는 근미래의 지구로부터 15만 년이 지난 후 나니예 행성이 멸망의 위기를 맞아 활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978 ~ . 한국의 SF소설 작가. 2011년에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자가상 수상


일꾼들만 있는 곳에 도착한 유일한 고객


배명훈이라는 작가의 SF 소설이다. 대체로 소설은 아무 정보없이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서점에서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고 소설이 SF인지도 몰랐다. 최근에 SF소설을 많이 읽고 있는데, 그 기운을 책에서 느꼈을지도.. 최근에 읽은 《삼체》는 마지막에 무려 수백억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버리면서 소설이 끝난다. 반면에 《신의 궤도》는 수백억년은 아니지만 무려 15만년 이후를 초반에 뛰어넘어 버리고 시작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소설같은 시간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나니예 행성은 지구의 부자 20만 명이 은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휴양지라는 설정이다. 나니예를 적절한 휴양지로 만들기 위해서 일꾼들이 먼저 출발하고 그 후 고객들인 부자들이 떠났는데 출발한지 6만년 후, 사고로 인해 동면이 풀려 버린다. 아직 9만년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는데, 다시 동면을 할 수는 없고, 식량도 3개월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두 사망하고 만다. 우주선이 나니예에 도착했을 때, 미리 도착해서 나니예를 만들어 놓은 일꾼들은 백골로 변한 고객들밖에 볼 수 없었고, 나니예는 일꾼들만이 사는 행성이 된다. 하지만 단 한 명, 사형을 피해 창조주인 김회장이 먼저 보낸 김은경만이 고객 중에 유일하게 나니예 건설 270년 후 동면에서 깨어났다. 나니예 행성의 유일한 고객이다.


무려 15만 광년 멀리 있는 나니예 행성. 하지만 그 곳에 가려고 했던 20만 명의 고객은 불행하게도 중간에 깨어나고 만다.


흥미로운 기본 설정


무려 15만년을 단위로 움직이는 소설이다. 생존가능한 다른 행성을 찾아 우주를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현실적이기는 한데 숫자가 너무 커서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15만년 이후를 보장하는 계약이라니.. 그래도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다루는 허무맹랑한 소설일 것 같지만 꽤 설득력이 있다. 특히, 15만 년 이후의 약속을 담보하기 위해서 안전보장 기금인 라경기금이라는 무력수단이 설정된 건 멋진 아이디어.


북반구를 지배하는 공식기구인 행정관리소 세력, 유목생활을 하면서 남반구를 지배하는 지난 세력, 천문교 세력으로 크게 3개의 세력이 있다. 천문교 세력은 또 관측신학자와 이론신학자로 나뉘고 남반구에는 지난세력에 저항하는 혁명 세력도 있다. 이 세력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비행기를 생명이 있는 양처럼 다루는 설정도 재미있고, 궤도를 돌고 있는 신의 존재를 밝히려는 천문교 관찰주의자파의 노력과 신은 관념으로만 존재한다고 믿어 실체를 부정하는 이론주의자파의 대립과 갈등을 다루는 것도 좋다. 



정치, 사회, 경제, 종교를 모두 아우르려는 욕심


미래를 다루는 SF소설은 여러가지 면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할 수는 없다. 대체로 작가가 관심이 많은 한 분야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어떤 소설은 인간과 로봇의 갈등을 다루기도 하고 인간과 외계 행성인의 갈등을 다루기도 한다. 지구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대체로 한가지 부분에 집중을 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가볍게 처리해 나간다.


《신의 궤도》의 작가인 배명훈은 굉장히 똑똑하고 많은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 듯 하다. 두 권짜리 소설에 굉장히 많은 설정을 집어 넣었다. 정치적인 갈등과 종교인 사이의 갈등,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고, 경제 문제까지 다루었다.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설정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지만 얘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는 설정에 비해서는 아쉽다. 그래서 부분부분 설정 부분을 읽을 때는 굉장히 흥미로운데 책을 모두 읽고 나서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작가가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쓴 소설이다. 그런데 너무 총동원되어 있다. 멋진 상상력을 잔뜩 모아 놨지만 번잡하다. 잘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다. 여러가지 떡밥을 풀어 놓기는 했는데 깔끔하게 회수도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작품을 통틀어 나니예에 가장 큰 위험이 되는 경라기금은 어떤 경로로 조성되었는지 밝혀 놓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설정이 좋기 때문에 소설의 설정이 나오는 1권, 2권의 첫 부분은 굉장히 흥미롭고 소설 전체에 대해 기대감이 생긴다. 하지만 설정 부분을 벗어나면 몰입감이 떨어진다.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서 필력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책이 너무 짧다. 두 권짜리 책이고 600여 페이지이긴 한데 수많은 설정을 만들어 놓은 걸 생각하면 세부적인 과거와 현재의 얘기를 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다. 한 권 정도 분량을 더 늘려서 과거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고 현재와 연결시켰으면 좋았을 것 같다.



★★★☆


SF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상을 받은 건 굉장히 어필할 만한 경력이다. 그만큼 문학성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기회가 되면 배명훈의 다른 책도 읽어 볼 예정이다. 《신의 궤도》는 설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장르적으로 더 재미있을 수 있는 설정이 충분히 빛을 보지 못한 느낌이다. 나중에 천천히 보면서 놓친 것이 있지나 않은지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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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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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죽음 이후를 책임지는 탐정


구동치는 딜리터(deleter)이다. 탐정이기도 하다. 딜리터는 의뢰인이 꼭 없애고 싶은 물건을 죽기 전에 미리 부탁해 놓으면 의뢰인이 죽은 후 그것들을 모두 찾아서 없애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의뢰인이 없애고 싶은 것도 가지가지. 사진이 될 수도 있고, 컴퓨터 하드디스크일 수도 있다. 문서가 가장 많고 일기장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자료들을 없애려면 때로는 무단침입도 해야 하고 물건을 훔치기도 해야 한다. 물론 불법이다. 마치 심부름센터 직원들이 돈되는 일이라면 불법적인 일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구동치에게 의뢰한 사람 중에 배동훈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그가 없애달라고 의뢰한 것은 네 가지. 그 중에 세 개는 찾아서 없앴는데 태블릿 PC 하나를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태블릿 PC를 찾는 와중에 구동치는 큼지막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김중혁. 1971 ~ . 한국의 소설가.

잘 모르는 유명작가


처음 읽는 김중혁의 소설이다. 김중혁은 가끔 들었던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서 이름을 들어 귀에 익숙하다. 소설가라는 것만 알고 있고 그가 쓴 소설을 읽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프로필을 살펴 보니 굵직한 문학상을 여러차례 수상한 실력있고 유명한 작가다. 내가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서 너무 관심이 없다는 걸 잠깐 반성하고.. 그러니까 김중혁은 내가 잘 모르는 유명한 작가이다. 이 책을 집어든 것도 작가의 이름 때문이다. 그나마 귀에 익숙한 이름을 가진 소설가의 책도 손에 잡기도 이렇게 힘든데 다른 작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소설에 좀더 관심을 갖자고 다짐 한 번 한다.


큼큼한 냄새가 흐르는 군상극


처음엔 추리소설인가 했다. 형사도 나오고 추리하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딱히 추리가 주가 되지는 않는다. 본격적인 수사물도 아니다. 사립탐정이 등장하는데 우리나라는 사립탐정이 합법적인 직업도 아니다. 정확히 정체를 밝히기 쉽지 않은 그저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서로의 뒷통수를 치는 군상극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그 중에 주인공인 구동치만이 가장 신뢰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척 한다. 하지만 구동치가 없앨 것을 요청받은 물품을 없애지 않고 사무실에 보관하는 것만 하더라도 의뢰인의 당부를 어긴 것이니 그다지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마지막에도 이영민과 천일수 사장의 뒷통수를 제대로 후려쳐 버린다.


여러 인간 군상들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다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면 소설 자체가 상쾌함과는 거리가 있고 좀 씁쓸하다. 씁쓸한 분위기를 더 가중시키는 건 작품 전체에 흐르는 냄새. 구동치의 사무실이 있는 악어빌딩에서는 특유의 큼큼한 냄새가 있다. 그리고 구동치는 자신이 가는 모든 장소를 냄새로 판단한다. 별로 좋은 냄새가 나는 곳이 없으니 찝찝한 느낌이 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책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재미있는데 좀 허전하다


전체적으로 이미지도 선명하고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전개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선배 형사인 김인천과 구동치의 관계가 그렇다. 김인천의 죽음이 구동치가 하던 일까지 그만 둘 정도로 충격을 준 사건이라는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처음 김인천이 나올 때는 그저 구동치가 예전에 형사 생활할 때 동료로서 딜리터 일을 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악어와 악어새 사이 정도로 느껴졌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설득력 있는 정황이 부족했던 것 같다. 소설 초반에 무엇보다 냉정하고 원칙주의자였던 구동치가 소설 후반에서는 감정적으로 변하는 모습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등장인물에 있어서도 소설 초반부터 나와서 작품전체에 영향을 끼칠 것 같았던 작가와 정소윤이 어느 순간 공기가 되어 버린 것도 아쉽다. 작가야 그렇다 치더라도 정소윤은 활용할 여지가 많아 보였는데 구동치와 정소윤의 갈등이 마지막에 아무 것도 아닌 양 해결되어 버렸다. 마치 소설쓰는 동안 잊고 있다가 마지막에 생각나서 미안한 마음에 등장시켜서 결말지은 것 같은 느낌이다.



★★★☆


작가는 별것 아닌 것 같던 사망사건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그에 연관된 인물들이 우왕자왕하고 나름대로 살 길을 찾는 소설을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파만파까지는 아니고 일파십파 정도에서 파도가 멈춘 것 같아서 아쉽다.


재미있게 읽었으니 비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추천할 만하지는 않다. 이 책이 김중혁 작가의 대표작은 아닌 것 같고.. 다른 소설을 찾아서 읽어 본 후에 김중혁이라는 작가의 소설이 나한테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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