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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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아내, 사라진 여인

스콧 헨더슨은 아내인 마르셀라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비록 캐롤 리치먼이라는 아름다운 여성과 사랑에 빠져서 이혼을 하자고 제안을 하긴 했지만 불편하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에게 데이트를 제안했고, 마르셀라도 수락을 했다. 하지만 막상 함께 나갈 시간이 되니 아내는 헨더슨에게 비아냥대며 나가지 않겠다고 한다. 마음이 상한 헨더슨은 밖으로 나가 아내 대신 리치먼을 만나려고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고, 혼자서 바에 앉아 있었다.


바에서 눈에 잘 띄는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인을 발견한 헨더슨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아내와 함께 보내기 위해 예약했던 코스를 함께 보내기로 한다. 헨더슨은 그녀에게 말을 걸고, 둘은 상대방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주고받지 않은 채 저녁을 함께 보낸다. 술 한 잔 마시고, 저녁도 함께 먹고, 연극도 보고.. 헨더슨은 여인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집에는 건장한 남자 세 명이 헨더슨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형사였고, 아내가 넥타이에 교살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럴 수가..


헨더슨은 피살자의 남편으로 제일 먼저 용의자로 지목된다. 하지만 헨더슨은 사건 추정시각에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인과 함께 있었으니 알리바이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그녀와 함께 있던 카페, 식당, 극장, 심지어 택시운전사까지 찾아 확인을 했지만 모두들 헨더슨이 혼자였다고 증언한다. 심지어 세 시간 이상 함께 있었던 헨더슨도 그녀의 모습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알리바이를 대지 못한 헨더슨은 사형을 언도받고 사형집행일은 하루하루 다가온다.


버지스는 헨더슨을 체포한 형사인데 아무래도 헨더슨이 범인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면회자리에서 헨더슨에게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있으면 이 사건을 파헤쳐 보도록 제안한다. 헨더슨은 학창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존 롬바드에게 연락을 하고 롬바드는 5년 계약으로 남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더슨을 위해서 돌아와 헨더슨을 만난다. 여인은 환상이었을까? 왜 사람들은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인을 보지 못했다고 할까? 롬바드는 헨더슨을 사형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이제 사형집행일까지는 18일 남았다.


윌리엄 아이리시 William Irish 1903 ~ 1968. 코넬 울리치  Cornell Woolrich의 필명. 미국의 소설가.


유명한 책이었어?

작가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낯설기만 하다. 추리소설이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유명한 책인 것 같다. 특히, 세계 3대(개인적으로는 누가 무슨 이유로 정했는지도 모르는 3대, 4대 같은 건 신뢰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추리소설이라는 말이 온라인상에서 떠돌아 다닌다. 홈즈도 아니고 에큘 포와로도 아니고 엘러리 퀸도 아닌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고 작품이었다고? 살짝 나의 무지를 책망한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추리소설(X), 서스펜스 추적극

내용이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헨더슨이 아내인 마르셀라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벗기 위한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단 한 명의 여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형집행일은 점점 다가오고 헨더슨은 구속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결국 남미에서 일하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인 롬바드와 애인인 리치먼, 좀 의심스러운 형사 버지스가 그 여인을 찾아 나서는데.. 증인이 될 것같은 사람은 사고로 죽어나가고, 여인은 어디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독자로서 나는 수많은 가능성을 따져 본다. 그리고 범인이 누군인지 추정해 본다. 그런데..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인을 찾는 주요 역할을 하는 롬바드는 증인들을 찾고 헨더슨을 봤다는 증언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딱히 추리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탐문하고 설득하고 협박도 하면서 사람을 찾기만 한다. 그러니까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추적극의 짜릿함은 느낄지언정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는 추리극의 지적 쾌감을 느낄 수는 없다.


소설은 194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 반전은 놀랍지만..

읽는 동안 내가 생각한 유력한 용의자는 애인인 캐롤 리치먼이었다. 살해할 동기도 충분하고 사건 시각 전후로 연락이 되지 않은 것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고 실제 범인은 롬바드였다. ...뭐라고? 그런데 예상을 벗어난 범인은 내 뒷통수를 치는게 아니라 한숨을 쉬게 했다. 개연성을 엿바꿔 먹었기 때문이다.


1. 버지스 형사가 헨더슨에게 자기 대신 여인을 찾을 친한 친구에게 부탁하라고 조언하자 헨더슨은 바로 롬바드를 떠올린다. 범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만약 헨더슨이 롬바드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소설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나.

2. 마지막에 버지스는 롬바드가 범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롬바드가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것을 두고 보기만 한다. 헨더슨 한 명 살리려고 다른 무고한 생명이 죽어나가는 걸 막지 않는다고? 형사가?

3. 롬바드가 아무리 입막음을 한다고 모든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입을 꽉 닫고 있는다고?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게다가 헨더슨은 롬바드가 임막음을 한 사람들만 기억하고 형사들은 그 사람들만 탐문수사를 한다. 눈에 확 띄는 오렌지 모자를 쓴 여인을 본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한다니.. 참 편리하게 전개되는 스토리다.

4. 헨더슨씨는 치매에 걸리신 것도 아니신데 세 시간 이상 함께 있었던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못하는 건 왜? 그저 미스터리한 여자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설정을 갖다 붙여 놓았다.

이외에도 개연성없는 설정은 수없이 많다. '환상의 여인'이 헨더슨과 만난지 사흘만에 병원에 입원해서 행적을 못 찾은 건 그냥 넘어가자. 이것도 무리수가 되는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말이지..


형사는 등장하지만 추리는 없고, 추적자가 등장하지만 실패만 한다.


★★★

처음부터 4/5는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그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밝혀낼 것인지 굉장히 궁금하고 추적해 가는 모습도 서스펜스 소설로 따지면 여기까지는 정말 괜찮다. 하지만 범인이 밝혀지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순간 그동안 읽은 것들이 몽땅 의미없이 뒤집힌다. 엄청난 떡밥을 잔뜩 던져놓고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소설이다. 책 전체를 통틀어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고 뒤집어 버림으로써 큰 실망을 안겨주고 끝이 난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 좀 그렇고, 결말은 너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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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산소를 더욱더 조금 공급하게 됩니다."
산소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게 두뇌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골격이었다. 산소가 정상치의 70퍼센트면 난쟁이가 되고 70퍼센트 이하면 눈이 없는 괴물이 된다. - P34

버나드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거룩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기 자신이 고립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과 다름없이 고립되었다. 충족되지 않은 공허감과 시들어버린 만족감 때문에 더욱 비참하게 고립되었다. 다른 사람들은그 위대한 분에게로 융합이 되었으나 버나드만은 속죄를 받지 못하고 고립된 것이다. 그는 자기 일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독했으며 큰 절망을 느꼈다. 그는 아주 비참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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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봐. 미어터지는 싸구려 공동주택, 출퇴근 시간의 간선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토요일 오후의 대형 마트, 공장, 원자력 발전소, 이런 게 지옥이 아니고 뭐겠니?"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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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비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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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초상화

여자친구와 함께 대학로에 갔다. 실수로 연극표를 놓고 와서 연극을 보지 못하고 여자친구에게 타박을 받다가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노인에게 여자친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던 노인은 그림솜씨도 평범하지 않다. 한 장의 예술작품과 같은 초상화를 그리는 노인.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뭔가 이상하다. 분명희 여자친구인 진희를 그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묘하게 어긋난다. 이질감을 느끼는 와중에 그림 완성. 머쓱해 하면서 그림을 받아 들었다.


1년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대학로를 찾으니 그 노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1년 전 그렸던 그림을 노인에게 보여 주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림이 변했다고 한다. 그렇다. 도화지 속에는 진희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자리잡고 있다. 도대체 왜 그림의 여자가 변하고 있는 걸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을 끌고 술집으로 가서 얘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기세좋게 위스키까지 주문하고 썰을 풀기 시작하는 노인.


'그러니까 미루는 말이지..'


최제훈 1973 ~ .


최제훈의 단편소설집

처음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은 후 나는 최제훈의 팬이 되었다. 한국소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최제훈같은 스타일로 글을 직조하는 소설가를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즉시 서점에 있는 그의 책을 몽땅 샀고 그동안 《퀴르발 남작의 성》뿐만 아니라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나비잠》을 아껴 가면서 차례대로 읽었다. 《위험한 비유》는 최제훈의 소설 중에서 네 번째로 읽는 소설이다. 처음 읽은 《퀴르발 남작의 성》과 같이 단편집이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어떤 퍼즐같은 소설로 나의 잠든 감각을 깨워줄까?


누군가 SNS에 올려 놓은 책 표지를 보더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연상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색감이나 분위기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8가지 이야기

최제훈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중구난방'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단편집 한 권으로 엮여있더라도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각 소설들이 제각기 논다. 심지어 장편소설도 서사를 제멋대로 쪼개서 새로 조립하기 때문에 줄거리가 제멋대로 쳐박혀 있다. 이게 굉장히 번잡스러워 보이면서도 굉장히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위험한 비유》는 같은 장편인 《퀴르발 남작의 성》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 단편 사이에 연관성이 없고 각 소설이 조금씩 기괴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한 얘기들로 가득차 있다. <철수와 영희의 바다>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두 연인의 평범하지 않은 결말, <2054년, 교통사고>는 미래의 교통사고에 대한 뜻밖의 결론, <마네킹>은 피그말리온 신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기괴한 이야기,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인물에 사로잡힌 한 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미루의 초상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흥미를 자극한다.


작중 단편인 <마네킹>에서 과연 마네킹은 스스로 움직인 것일까? 추정은 하도록 놔두지만 명확한 대답은 해주지 않는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

그런데.. 《위험한 비유》는 재미있고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멋진 소설집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아.. 이게 끝인가?', '더 끌어당겨 주지 않나?'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좀더 읽으면 뭔가 나올 거야.', '최제훈이 여기서 끝낼 리가 없어.', '마지막 단편은 충격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계속했지만 그 기대는 결국 충족되지는 않았다. 최제훈에게 기대하는 '어떤 것'이 모자른 느낌이다. 어쩌면 내가 최제훈이라는 자극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동안 최제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신선함이 《위험한 비유》에서는 좀 떨어졌다. 그리고 《위험한 비유》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소설들보다 일찍 쓴 소설들을 나중에 모아 발표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했다.


<미루의 초상화>는 광기 넘치는 한 화가의 이야기이다.


상상발랄한 소설들

앞에서 《위험한 비유》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위험한 비유》가 싫은 건 아니다. 여전히 최제훈의 상상력은 한도가 없고 특유의 이야기를 비틀어 버리는 실력 역시 뛰어나다. 각 편마다 흡입력도 뛰어나고(<위험한 비유>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재미도 있다. 하지만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은 아니다. 그래서 《위험한 비유》은 순한 맛 《퀴르발 남작의 성》이다. 명확한 결말을 내려주지 않고 작품마다 한가지씩 의문점을 남겨두는 것 역시 최제훈 소설의 특징.


★★★★

최제훈 소설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소설인데, 예전 소설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2%가 부족하다. 그런데 이 아쉬움이 작품에 대한 것보다는 기대감이 큰 탓에 생긴 것이니 《위험한 비유》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 느낌대로 평가하는 것이 맞으니 별 한 개 정도 뺐다. 처음 최제훈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읽기에 무난한 것 같으니 이 책으로 시작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좀 쉬었다가 이제 아껴뒀던 《천사의 사슬》을 읽어야겠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분명히 호불호는 갈릴 것이다. 나는 강추한다.

위험한비유, 최제훈, 소설, 한국소설, 단편소설,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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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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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속에서 만난 고등학생

고사카 쇼고는 잡지사 기자이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날, 치바현을 운전하며 지나던 중 자전거가 펑크나서 옴짝달싹 못하는 이나무리 신지를 만나 차에 태워준다. 도쿄를 향해 가던 중 덜컹거리는 차. 사람을 친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살피니 폭우 때문인지 도로의 맨홀이 열려 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려 하는데, 맨홀 옆에서 아이들이 쓸 법한 노랑 우산을 발견한다. 근처에 사는 다이스케라는 일곱 살 소년의 우산인데 실종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폭우에 휩쓸려 맨홀로 빨려들어간 것 같다.


그저 단순한 사고사라고 생각하는 고사카. 그런데 신지는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장면들을 설명한다. 아이가 부르던 강아지의 이름을 알고 있다든지, 빨간색 포르쉐를 몰던 두 남자가 맨홀 뚜껑을 열어 놓았다든지. 신지가 설명하는 것을 듣던 고사카는 처음에는 신지가 맨홀을 열어 놓은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지는 자신이 물건을 만지면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을 볼 수 있고,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라고 설명한다. 반신반의하는 고사카. 하지만 오랫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내밀한 과거사까지 줄줄 읊어대는 신지를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사고가 있은지 6개월 후, 신지의 외사촌 형이라고 하는 오다 나오야가 잡지사로 찾아 온다. 나오야가 말하기를 고사카에 대해서 신지가 했던 말은 모두 추리에 의해서 초능력이 있도록 믿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신지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지를 만나니 신지는 나오야 역시 자신과 같은 초능력자이며 자기보다 능력이 더 강력하고 심지어는 텔레포테이션까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지와 나오야는 초능력자일까? 아니면 신지는 그저 치기어린 사기꾼일까? 그즈음 고사카가 근무하는 잡지사로 배달된 아무것도 씌여있지 않은 여섯 통의 편지와 한(恨)이라고 씌여있는 일곱 번째 편지는 어떤 의도로 누가 보낸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과 사건 속에서 고사카는 진실을 쫒기 시작한다.


미야베 미유키 宮部みゆき 1960 ~ . 일본의 소설가


처음 읽은 미야베 미유키 소설

일본 소설은 드문드문 읽는 편이었는데 최근에 꽤 많이 읽고 있다. 좀 읽는다 해도 다양하게 읽지는 않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꽤 많이 읽으면서 다른 작가의 책은 한두 권 정도 읽는 정도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서점의 서가를 훑어 볼 때 이름이 눈에 익어 있었고, 《모방범》이나 《솔로몬의 위증》같은 책을 썼다는 점 정도만 알고 있었다. 눈에 자주 띄었지만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 너무 두꺼웠기 때문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보통 끝까지 읽어야 하는데 3권짜리 소설은 너무 부담스럽다. 언제 한 번 읽어보기는 할 생각이었는데 책장에 《용은 잠들다》가 꽂혀 있다. 도대체 언제 사놓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왕 눈에 띄었고, 썩 두껍지도 않으면서 한 권짜리 소설로 큰 부담이 없어서 읽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일본 추리 + SF 소설

《용은 잠들다》는 열린 맨홀에 한 아이가 빠져 죽는 사건이 발단이 되어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얽히는 추리소설이다. 처음에는 맨홀을 열어놓아서 아이를 죽게 만든 범인들을 초능력을 이용해 잡는데 초점이 맞춰지는 듯 하더니, 초능력을 가진 또다른 청년이 나타나면서 인물들의 관계와 정체가 오리무중에 빠진다. 거기에 의도를 알 수 없는 편지가 고사카에게 배달되면서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소설 초반에는 신지와 나오야가 정말 초능력자인지 아니면 나오야의 말대로 신지가 고사카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 와중에 맨홀 뚜껑을 연 범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고사카가 받은 아무것도 씌여지지 않은 편지와 한(恨)이 씌인 일곱 번째 편지, 노(怒)가 씌인 여덟 번째 편지로 궁금증이 옮아간다. 그러더니 전혀 뜬금없이 3년 전 헤어져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던 고사카의 옛 애인 사에코가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전형적인 추리물인 것 같지만 그 사이에 두 명의 초능력자가 끼여 들면서 얘기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는데, 좀 더 강력한 초능력자인 오다 나오야가 악한 마음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심하고 책을 읽어나갈 수가 없다.


사이코메트리는 사물의 기억을 읽어내는 초능력을 말한다.


적절한 사건배치와 밀도있는 플롯

사실상 주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지와 사에코 사건이 추리가 필요한 사건인데 추리과정이 어렵지는 않다. 정황상 범인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시시하지는 않다. 다양한 사건이 펼쳐져 있고, 주요 등장인물의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인물들도 개성이 잘 살아 있다. 흔히 초능력자와 기자의 조합을 생각하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초능력자와 그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하는 환상의 파트너를 예상하기 쉬울텐데, 신지는 열일곱 살 나이에 걸맞게 혈기는 왕성하지만 미성숙해서 오히려 사건해결을 망치기 일쑤이고 고사카는 멋진 해결사가 되기보다는 그저 도움이 필요하고 영문도 모른채 사건에 끌려다니기만 한다. 결과적으로 멋진 초능력자와 해결사의 면모를 보이는 것은 나오야이다.


여러 사건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어서 지루해질 때쯤 새로운 사건을 던져 놓고 그 사건들을 이리저리 엮어 놓았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아무래도 그동안 많이 읽었으면서 미야베 미유키와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을 기본으로 소설을 쓰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게이고의 소설이 성근 망으로 큰 물고기만 낚는다고 한다면, 미야베 미유키의 《용은 잠들다》는 저인망식으로 훑어가는 느낌이다. 게이고가 하나의 사건을 던져 놓고 계속해서 그 사건만 쳐다보고 일직선으로 달린다면, 미야베 미유키는 이곳저곳 함정을 파놓아서 피하면서 삐뚤빼뚤 목표를 향해 나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미야베 미유키 쪽이 이야기에 밀도가 좀더 있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

비록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요소를 잘 배치해 놓았다. 초능력자라고 해서 모든 사건을 말끔히 해결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치명적인 약점을 설정해 놓아서 자칫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 있는 여지를 없앤 것도 좋은 장치다. 무엇보다 흡입력이 뛰어나 끝까지 읽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어 금세 읽을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평작보다는 낫고 명작보다는 좀 떨어진다. 앞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좀더 찾아서 읽어 보려고 한다.


재미있다. 추천.

용은잠들다, 미야베미유키, 宮部みゆき, 알에이치코리아, 권일영옮김, 소설, 일본소설, 추리소설, SF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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