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비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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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초상화

여자친구와 함께 대학로에 갔다. 실수로 연극표를 놓고 와서 연극을 보지 못하고 여자친구에게 타박을 받다가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노인에게 여자친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던 노인은 그림솜씨도 평범하지 않다. 한 장의 예술작품과 같은 초상화를 그리는 노인.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뭔가 이상하다. 분명희 여자친구인 진희를 그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묘하게 어긋난다. 이질감을 느끼는 와중에 그림 완성. 머쓱해 하면서 그림을 받아 들었다.


1년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대학로를 찾으니 그 노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1년 전 그렸던 그림을 노인에게 보여 주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림이 변했다고 한다. 그렇다. 도화지 속에는 진희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자리잡고 있다. 도대체 왜 그림의 여자가 변하고 있는 걸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을 끌고 술집으로 가서 얘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기세좋게 위스키까지 주문하고 썰을 풀기 시작하는 노인.


'그러니까 미루는 말이지..'


최제훈 1973 ~ .


최제훈의 단편소설집

처음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은 후 나는 최제훈의 팬이 되었다. 한국소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최제훈같은 스타일로 글을 직조하는 소설가를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즉시 서점에 있는 그의 책을 몽땅 샀고 그동안 《퀴르발 남작의 성》뿐만 아니라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나비잠》을 아껴 가면서 차례대로 읽었다. 《위험한 비유》는 최제훈의 소설 중에서 네 번째로 읽는 소설이다. 처음 읽은 《퀴르발 남작의 성》과 같이 단편집이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어떤 퍼즐같은 소설로 나의 잠든 감각을 깨워줄까?


누군가 SNS에 올려 놓은 책 표지를 보더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연상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색감이나 분위기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8가지 이야기

최제훈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중구난방'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단편집 한 권으로 엮여있더라도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각 소설들이 제각기 논다. 심지어 장편소설도 서사를 제멋대로 쪼개서 새로 조립하기 때문에 줄거리가 제멋대로 쳐박혀 있다. 이게 굉장히 번잡스러워 보이면서도 굉장히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위험한 비유》는 같은 장편인 《퀴르발 남작의 성》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 단편 사이에 연관성이 없고 각 소설이 조금씩 기괴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한 얘기들로 가득차 있다. <철수와 영희의 바다>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두 연인의 평범하지 않은 결말, <2054년, 교통사고>는 미래의 교통사고에 대한 뜻밖의 결론, <마네킹>은 피그말리온 신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기괴한 이야기,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인물에 사로잡힌 한 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미루의 초상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흥미를 자극한다.


작중 단편인 <마네킹>에서 과연 마네킹은 스스로 움직인 것일까? 추정은 하도록 놔두지만 명확한 대답은 해주지 않는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

그런데.. 《위험한 비유》는 재미있고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멋진 소설집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아.. 이게 끝인가?', '더 끌어당겨 주지 않나?'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좀더 읽으면 뭔가 나올 거야.', '최제훈이 여기서 끝낼 리가 없어.', '마지막 단편은 충격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계속했지만 그 기대는 결국 충족되지는 않았다. 최제훈에게 기대하는 '어떤 것'이 모자른 느낌이다. 어쩌면 내가 최제훈이라는 자극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동안 최제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신선함이 《위험한 비유》에서는 좀 떨어졌다. 그리고 《위험한 비유》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소설들보다 일찍 쓴 소설들을 나중에 모아 발표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했다.


<미루의 초상화>는 광기 넘치는 한 화가의 이야기이다.


상상발랄한 소설들

앞에서 《위험한 비유》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위험한 비유》가 싫은 건 아니다. 여전히 최제훈의 상상력은 한도가 없고 특유의 이야기를 비틀어 버리는 실력 역시 뛰어나다. 각 편마다 흡입력도 뛰어나고(<위험한 비유>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재미도 있다. 하지만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은 아니다. 그래서 《위험한 비유》은 순한 맛 《퀴르발 남작의 성》이다. 명확한 결말을 내려주지 않고 작품마다 한가지씩 의문점을 남겨두는 것 역시 최제훈 소설의 특징.


★★★★

최제훈 소설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소설인데, 예전 소설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2%가 부족하다. 그런데 이 아쉬움이 작품에 대한 것보다는 기대감이 큰 탓에 생긴 것이니 《위험한 비유》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 느낌대로 평가하는 것이 맞으니 별 한 개 정도 뺐다. 처음 최제훈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읽기에 무난한 것 같으니 이 책으로 시작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좀 쉬었다가 이제 아껴뒀던 《천사의 사슬》을 읽어야겠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분명히 호불호는 갈릴 것이다. 나는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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