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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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독서편력의 시작, SF소설

기억을 되돌아보면 나의 독서편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동화전집으로부터 시작됐다. 찾아보고 싶어도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책들을 어릴 때 수십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이후 백과사전, 교과서, 위인전기 같은 책들을 미친듯이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이 책들은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내가 골라서 읽은 책들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사오신 책, 그냥 집에 있던 책을 그냥 읽은 것이다. 내가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 도서관에 갔을 때였다. 먼지 풀풀 날리던 도서관에는 당시에 아무도 읽지 않아 대출기록이 전혀 없었던 SF소설, 추리소설들이 가득했다. SF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이때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같은 작가들과 친해졌다. SF소설은 어린 나에게 상상을 돋워주고, 독서에 취미를 붙여준 장르이다. 

장르소설은 그 목표가 명확하다. 추리소설은 알 수 없는 범인을 찾아가면서 마지막 범인을 찾아냈을 때 그 통쾌함이 극대화된다. 무협소설은 대의에 따라 영웅이 되어가는 대협의 풍모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판타지 소설은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지는 환상의 세계를 상상하는 재미가 우선이다. SF소설은 과학적 상상력을 현실과 잘 조합해서 마치 있을 것 같은 세계를 창조해서 지적 쾌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장편 《신의 궤도》를 읽은 후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일부러 찾아서 읽었다. 《신의 궤도》에서 멋진 설정에 비해 스토리텔링이나 장르적 쾌감이 아쉬워서 그걸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안녕, 인공존재》는 배명훈이 그동안 발표했던 중단편을 모아놓은 책으로 동명의 단편을 포함해 소설 여덟 편이 실려 있다.

1978 ~ . 한국의 SF소설 작가. 2011년에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자가상 수상

설정과 아이디어는 좋았다

여덟 편의 소설이 모두 소재가 다르다. 다르면서도 굉장히 소설간의 간극이 크고 다양하다. <크레인 크레인>은 실체화된 종교를 다루고 <누군가를 만났어>는 고고학과 심령현상을 다룬다. 심지어 <안녕, 인공존재>에서는 철학까지 다룬다. 그외에도 마법, 우주론, 거대로봇 등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설정들도 좋다. 굉장히 다양한 지식을 지닌 작가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설정은 《신의 궤도》에서도 감탄을 한 바 있는데 《안녕, 인공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한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은 굉장히 부러운 점이고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안녕, 인공존재>에서는 그저 존재만 할 뿐 어떤 효용도 없는 물체를 소재로 하고 있다.

장르적 재미는? 회수되지 않는 떡밥들

그런데 아이디어와 설정만 가지고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잘 살려야 좋은 소설이 될텐데 《안녕, 인공존재》는 아이디어와 설정을 보여주는 중반까지만 재미있다. 그 이후로는 어설프다는 느낌이 결말도 모두 어정쩡하다. 계속해서 하나의 아이디어에 집중하다가 명확한 결말을 지어주지 않고 소설들이 끝나거나 데우스엑스마키나가 등장한다.

그냥 끝난다. 뭔가 의미를 찾아 보려고 해도 찾기 힘들다. <안녕, 인공존재>는 철학적인 사변만 난무한다. <매뉴얼>은 그냥 궁금증만 잔뜩 풀어 놓고 망한다. <누군가를 만났어>는 도대체 뭐지? 던져놓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문학적인 효과를 노렸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SF소설로 놓고 보면 실망스럽다. 멋진 소재를 만들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진행하던 소설들은 어느 순간 힘이 쭉 빠져 버린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풀어 놓은 것들을 회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SF소설이라면 가질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문학상을 받을 정도이니 전문가들이 보기에 좋은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SF소설 팬의 한사람으로서 《안녕, 인공존재》은 읽고 나서 다른 SF 팬에게 읽어보라고 선뜻 추천할만한 책은 아니다.

★★☆

별로 재미없는 책이다. 뭔가 그럴싸하게 전개해 나가다 아무 것도 아닌 결말을 맺는다. 설득력있는 원인도 없고 개연성있는 결말도 없다. 대체로 뒷심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너무 아쉽다. 이 정도 상상력이면 훨씬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등산을 열심히 하다가 정상을 찍지 못하고 하산하는 느낌이다.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쉽다.

위에서 쓴 것처럼 선뜻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배명훈의 소설을 또 찾아서 읽어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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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님 책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책을 읽는데 말입니다, 이게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는 겁니다. 억지로 보라고 하면 더 이상 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면 책장을 덮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굳이 마지막까지 그 고통을 참아내야 합니까?"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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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똑같구나..

아버지는 기도란 대화라고 했다. 나는 대화를 원했다. 기도원에 올라가 아버지가 들었다는 작고 세밀한 음성으로 나에게 말해달라 고 요구했다. 왜 아버지가 그곳에 가야 했는지, 왜 아버지를 지켜주 지 않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으니 납득시켜달라고 했다. 그럴듯 한 이유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기도실에서밤하늘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 귀엔 아무 말도들리지 않았다. 지친 나는 푸념을 하기도 하고 사정을 하기도 했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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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를 때리는 것만큼 비열한 짓은 없다. 군대의 온갖 불합리는 힘을 가질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힘이 주어지는 데서 나온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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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분의 1의 함정 -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게임이론의 모든 것
하임 샤피라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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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이해하는 도구, 게임이론

게임이론이라는 용어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제로섬 게임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서 어떤 뜻인지 찾아보다가 관심을 두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죄수의 딜레마를 처음 안 후, 흥미롭게 생각해서 찾아봤을 수도 있다.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게임이론은 행동경제학과 함께 내가 제일 흥미를 두고 있는 경제학, 또는 사회학 분야의 이론이다.


게임이론은 간단히 '상호적 의사결정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가깝게는 가족, 친구 관계로부터 시작해 모든 인간관계에서 결정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정을 내리고 나면 만족할 수도 있고 후회할 수 있는데 모든 사람은 당연히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 이 결정을 나혼자 한다면 의사결정과 결과는 굉장히 단순한 관계를 맺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을 나혼자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상대방 한 명, 또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결정을 한다면 경우의 수도 많아지고 결과에 대한 예측도 어려워 진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머리를 엄청나게 굴려야 할 수도 있다.


게임이론은 예측하기 힘든 의사결정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화한 모델을 만들어 확인하고 그 결과를 경제학, 사회학을 의사결정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많은 학문에 기초 이론을 제공한다. 단순화한 모델은 그동안 많이 개발되었으며, 흔히 거론되는 게임모델 중에는 죄수의 게임, 최후통첩게임 등이 있다. 《n분의1의 함정》은 게임이론, 또는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시행되었던 게임들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책이다.


하임 샤피라 Haim Shapira 1962 ~ . 이스라엘의 수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피아니스트. 쓴 책들을 보니 굉장히 다재다능한 사람인 것 같다.


게임론의 모든 것?(X), 게임의 모든 것과 +α

게임이론 전반을 다룬 책을 읽으면 가장 기본적인 게임부터 시작해서 점점 어려운 게임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아무래도 개론서의 첫부분은 자명하고 뒷부분은 너무 어려워서 책을 읽어도 크게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반면에 《n분의1의 함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로운 게임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따로 보고 생각했던 많은 게임들을 총정리해서 읽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게임 이론의 모든 것'보다는 '게임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읽는 편이 낫다.


더욱이 이 책은 무척 쉽다. 각종 유명한 게임의 예를 들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간단한 에세이를 읽듯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이론 교양서에서 쉽다는 말은 항상 양면성을 지니게 마련인데 《n분의1의 함정》 역시 마찬가지다. 읽기 편하긴 하지만 깊숙히 들어가지는 않는다. 가장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도 그렇고 발전 형태인 반복적인 죄수의 딜레마 역시 조금 다루다 말았다. 가장 관심이 많으면서 이 책을 산 이유이기도 한 '최후 통첩 게임'도 가장 기본적인 형태만 다루고 확장된 형태는 나오지 않아서 아쉬움은 있다.


게임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모든 구성원이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결과는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는 대표적인 게임 형태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이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실제로는 게임이론이라고 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실험 혹은 패러독스들이 많이 담긴 건 이 책의 번잡스러운 장점이라고 할 만하다. 패러독스 관련 책에서나 볼 법한 '뉴컴의 파라독스', '기호 이론'으로 유명한 '톰슨 가젤의 높이뛰기' 그외에 경매, 통계, 치킨게임 등 책의 제목과는 좀 거리가 있어보이는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책의 원제가 '검투사, 해적 그리고 신뢰게임'인 것을 보면 원래 책을 쓴 것은 게임이론에만 국한되어 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좋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만을 초래할만큼 번잡한 책이다. 나는 좋은 의미에서 각종 학문에서 시행한 실험, 게임, 관찰 들을 꽤 많이 모아 놓은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자 윌리엄 뉴컴이 처음 제안한 뉴컴의 파라독스. 전망이론과도 연관이 있다.


★★★★☆

번역도 잘되어 있고 이해하기도 쉽다. 읽다보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써먹을만한 인사이트도 많이 제공한다. 이런 분야에 대해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게임과 패러독스를 익히고 다른 책을 읽으면서 확장하기에 좋다. 게임이론, 행동경제학 등에 관심이 있어서 꾸준히 책을 읽어온 사람에게 《n분의1의 함정》은 조금 부족할 수는 있다. 그래도 총망라해서 읽어 보는 의미는 있을 것 같다.


제목의 《n분의1의 함정》은 모임에서 식비를 똑같이 나누어 낼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의미한다. 책의 첫번째 장에서 설명하는데 모임에서 식비를 n분의1로 할 때 남들보다 더 먹으려고 마구 시켜대던 미련스런 나의 모습(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이 떠올라 뜨끔했다.


대체로 추천하지만 게임이론이나 행동경제학 분야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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