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의 진화 - 이기적 개인의 팃포탯 전략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이경식 옮김 / 시스테마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서부전선의 참호전

참호전이 처음 발생한 것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전쟁의 역사에서 참호전이 가장 주목을 받았던 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였던 것 같다. 참호전은 전쟁을 최악의 지지부진한 상황으로 몰고 갔고, 참호 속의 군인들 역시 큰 고통을 받았다. 참호는 방어를 위해서 땅을 파서 구축해 놓은 진지이다. 방어에는 굉장히 수월하지만 당시에는 마땅히 공격할만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양군이 모두 참호를 파고 버티기 시작하면 전쟁은 끝도 없이 늘어지게 마련이었다. 군인들은 비가 오면 빠질 곳이 없는 물이 허리까지 차오른 참호 속에서 버텨야 했다. 겨울에는 얼음과 눈에 노출되어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최악의 고통, 끝없을 것 같은 대치,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극한의 전쟁상황에서도 협력이 발생했다.


후방에 있는 지휘관은 계속해서 진격을 요구하고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참호 밖을 나서는 순간, 적으로부터 총알이 쏟아진다. 참호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포를 이용해서 공격을 해야 한다. 양쪽이 모두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대치의 양상은 예상과는 달랐다. 적군이 심각하게 피해를 당할 곳에는 포를 쏘지 않는다. 게다가 항상 같은 곳을 향해 포를 쏜다. 포를 쏘는 시각이 일정해서 상대방이 포를 쏘면 시걔를 맞춰도 될 정도로 일정하게 공격을 한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포를 쏘면 약간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기까지 한다. 간혹 상대방이 피해를 주면 몇 배로 되갚는다. 서로 약속을 한 적은 서로 상대방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참호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의 모습. 참호는 방어를 위해서 땅을 파고 만들어 놓은 진지이다. 참호를 파 놓으면 수비는 용이하지만 당시의 무기체계로서는 공격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치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적인 개인의 선택, 죄수의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는 게임 이론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유명한 딜레마이다. 죄수의 딜레마에 따르면 이기적인 게임참가자는 항상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유리하다. 둘다 협력을 했을 경우에 양쪽에 더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고전경제학에서 규정했듯이 인간의 이기심은 그런 결과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협력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배신이 최선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사회에서는 협력이 이루어진다. 이 책은 이기적인 개인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어떻게 협력이 발생하는지 규명하고 있다.

 

죄수의 딜레마.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배신하는 것이 나에게는 유리하다. 따라서 양쪽이 모두 상대를 배신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결과는 양쪽이 모두 상대에게 협력하는 것보다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는데, 그것을 알고 있어도 협력을 선택할 수는 없다. 상대방의 배신에 의한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최적의 전략을 찾기 위한 대회

죄수의 딜레마는 일회성 게임에서 일어나는 딜레마를 다루고 있은데, 저자인 로버트 액설로드는 연속된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최선의 전략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저명한 심리학자, 경제학자, 수학자, 정치학자들을 초대하여 게임의 룰을 설명하고 참가를 요청했다. 게임참가자의 전략은 프로그래밍의 형태로 제출하며, 리그전의 방식으로 모든 참가자와 1대1로 겨룬다.


점수 획득규칙
1. 내가 협력하고 상대방도 협력하면 3점을 얻는다. 상호협력에 대한 보상 R : Reward for mutual cooperation
2. 내가 배반하고 상대방이 협력하면 5점을 얻는다. 배반의 유혹 T: Temptation to defeat
3. 내가 협력하고 상대방이 배반하면 점수를 얻지 못한다. 머저리의 빈손 S : Sucker's payoff
4. 내가 배반하고 상대방도 배반하면 1점을 얻는다. 상호배반에 대한 처벌 P : Punishment for mutual defection
이 게임을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이다.


1차 대회에는 14명이 참가했고, 각 참가자들마다 200회의 게임을 반복했다. 1차 대회의 결과를 알린 후 펼쳐진 2차 대회에는 63명이 참가했다. 각 참가자는 상대방의 협력과 배반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면 최선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 연구를 해서 최선의 전략을 제출했다.

 


로버트 액설로드 Robert Axelrod (1943 ~ ) 미시간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게임이론, 인공지능, 진화생물학, 수학적 모델링, 복잡성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


용서하지 않는 신사 : 팃포탯 전략 Tit for Tat

1차 대회의 승자는 팃포탯이었다. 팃포탯은 정말 간단한 전략이다. 첫번째 게임에서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협력한다. 다음 게임부터는 상대방이 협력하면 협력하고, 상대방이 배반하면 배반한다. 끝. 1차 대회가 끝나고 그 결과가 알려지자 많은 전문가들이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액설로드 교수가 모집한 2차 대회에는 4배가 넘는 63명이 참가했다. 모든 참가자에게 1차 대회의 모든 진행상황과 결과를 통보했고, 2차 대회 참가자들은 1차대회를 면밀히 검토해서 자신의 전략을 짜냈다. 그 결과, 우승자는 또다시 팃포탯이었다. 팃포탯은 너무나 간단한 전략이기 때문에 분석하기 쉬웠고, 약점을 찾기도 쉬웠다. 하지만 또다시 승리했다.


팃포탯은 신사적이다. 상대방이 이전 게임에서 협력을 하면 반드시 다음 게임에서 협력으로 보답을 한다. 반면에 용서를 모른다. 상대방이 이전 게임에서 배반을 하면 반드시 다음 게임에서 배반을 해서 복수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1:1로 싸울 때는 절대로 상대방보다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다. 가장 좋은 결과는 상대방과 같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전략이 난무할 때는 게임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유력한 전략이다. 저자는 두 번의 대회의 결과를 받아 들고 협력이 발생하는 원리를 설명해 나간다.

 

팃포탯은 연속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협력하면 다음 게임에서 나도 협력을 하고, 상대방이 나를 배반하면 다음 게임에서 나도 배반을 하는 단순한 전략이다.


팃포탯 VS 올디 all D
로버트 액설로드는 2회의 대회 결과를 손에 쥐고 여러가지 전략을 시뮬레이션해서 논리를 발전시켜 나간다. 점수가 높은 전략은 다른 전략이 따라 해서 점점 그 비중이 높아진다. 점수가 낮은 전략은 탈락해서 게임에서 탈락한다. 결국 게임은 유력한 단일전략이 지배하게 되고 다른 전략이 침범하지 못해서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때 가장 안정적인 전략이 팃포탯과 무조건 배신을 하는 올디 전략이다. 책에서 저자는 팃포탯 전략이 올디 전략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기적인 개인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회에서 결국 협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것을 사회에 맞도록 풀어 설명하면, 이기적인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만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보다 이익이 줄어 들게 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협력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전략을 바꾸는 것이다. 단, 다른 사람이 나를 배반할 때는 가차없이 그에 상응하는 복수를 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는 얼간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사회학으로.. 생물학까지..

게임 이론은 경제학에서 발생한 이론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유명한 존 내쉬가 내쉬균형을 통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한 이론이다. 로버트 액설로드는 죄수의 딜레마에서 가장 유력한 전략이 팃포탯이라는 것을 밝힌 후에 이기적인 개인이 판치는 사회에서 어떻게 협력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밝혀 낸다. 그 후 이 이론을 토대로 사회학 뿐만 아니라 자의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생물의 진화 과정까지 설명을 한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게임에 참가한 개인으로서 게임에 참가하는 전략이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집단을 리드하는 리더가 게임의 룰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까지 설명하고 있다.

 

게임을 통해 인간의 전략을 설명하던 로버트 액설로드는 박테리아까지 그 영역을 넓혀서 협력이 발생하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책을 읽은 후에 우리 사회는 게임의 법칙이 제대로 통하는 사회인지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팃포탯 전략은 협력에 대해서는 협력으로 보답하고, 배반에 대해서는 배반으로 응징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사적 복수가 허용되지 않는다. 사적 복수가 허용되는 순간 끝없는 복수만이 반복되는 올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배반을 내가 복수할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가 대신 복수를 해 줘야 한다. 공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은 국가밖에 없다. 과연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을 배반한 사람에게 복수를 제대로 해 주고 있나? 현대 사회에서 배반은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하고, 복수 및 응징은 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것을 말한다.


힘이 약한 개인은 법을 어기면 당연하게 처벌을 받는다. 소시민은 법을 굉장히 무서워하고 경찰서에 들어가는 것도 편치 않다. 하지만 재벌이나 권력자같은 기득권자들은 숱한 사람을 배반하고 살아도 응징을 제대로 받지 않는다. 배반에 대한 응징을 제대로 받지 않고 있다. 팃포탯 전략은 우리에게 배반을 한 대상에게는 즉시 단호하게 응징을 가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야만 호혜주의에 의한 안정된 사회가 지속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정말 그런 사회일까? 난 그다지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과연 우리 사회는 게임의 룰이 지켜지고 있는 사회일까?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니다. 부록 빼고 서문 빼고 나면 약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아니다. (생물학을 다룬 5장은 바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약간 어려울 것 같은 편견을 깨고 책을 읽으면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사회, 경제 관련 책들과 함께 읽으면 사회를 이해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강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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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
가지야마 도시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 책의 내용에 관한 언급이 있지만, 미리 읽어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내가 사도 씨와 특히 친해진 것은 <간음 성서> 때문입니다.
네? 모릅니까?
일명 <사악 성서>라고도 불립니다.
1631년 런던에서 출판된 성서죠.
.
.
.
<구약 성서>의 <출애굽기> 20장 14절에,
-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성서에는 실수로,
-너희는 간음하라.
라고 인쇄된 겁니다.
부정의 'not'이 탈락되어 버린 거예요. 그걸 모르고 배포했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죠.
실수를 깨달은 영국 성서 협회에서 황급히 회수에 나섰지만 다 회수하지 못했다더군요.
<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 P. 247

작가인 가지야마 도리유키 梶山季之. 1930~1975. 서울 출생.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간다. 기업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이 높았고, 다작을 한 작가로 유명하다.


고서 판매상 세도리 남작의 일대기

작가인 '나'는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친구들과 긴자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십수년만에 '세도리 남작'이라는 노신사를 만난다. 세도리 남작은 오래된 책을 수집, 거래하는 사람으로 그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 그날 기분이 좋았던 세도리 남작은 나를 집으로 초대하여 술잔을 함께 기울이며 자신이 고서 수집가로 살아 오게 된 계기를 얘기해 준다.


세도리 남작의 본명은 가사이 기쿠야로서 어릴 때 산 <세계 미술 전집>에 푹 빠져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책을 그저 단순한 취미에로 여기던 가사이는, 어느날 헌책 노점상에게 손을 덜덜 떨면서 책을 사서 도망치듯이 사라진 가산도(이름, 미나미 준노스케)라는 노인을 좇아가 친해지게 되고, 고서 수집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가산도 노인에게서 고서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던 중, 가사이는 100권짜리 <요곡백번>이라는 희귀고 서적 가운데 78권을 우연히 발견하여 구매하고, 나머지 22권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까지 찾지 못했던 12권을 발견는데, 책의 주인은 책을 넘겨주는 댓가로 뜻밖의 조건을 제시한다. 결국 책주인이면서 남편이 얼마전에 죽은 미망인과 하룻밤을 지내는 댓가로 책을 받고, 결국 100권을 채워 완성한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일본의 고서적들


가장 정적이고 고상해 보이는 취미

고서를 수집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각 에피소드의 제목은 마작의 패에서 이름을 따 왔고, 책을 수집하면서 생긴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에피소드의 제목과 내용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마작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읽는데 지장은 없다. 책, 그 중에서도 고서라고 하니 고상한 취미에 관한 얘기라고 오해할 만도 하다. 나로서도 고서에 대한 인문학적인 지식에 관한 책인 줄 알고 샀는데, 소설인데다가 고상한 내용도 아니다. 책 덕후로 시작해서 고서를 사고 파는 장사'꾼'들에 관한 얘기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내용 때문에 읽기 시작할 때는 당황했다. 그런데 재미있다.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얘기가 진행된다. 희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 온갖 정보망을 이용하고, 한 권의 책을 두고 경쟁하는 경쟁자들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한 질의 책에서 빠진 책 한 권을 찾기 위해서 수십년을 참고 기다린다. 고대하던 책을 찾았을 때의 희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책을 놓쳤을 때의 아쉬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책으로 읽는 'TV쇼 진품명품'이다. 내가 가진 책 중에 저만큼 값어치가 있는 책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물론 없다.

 

우키요에 浮世絵, 17세기~20세기까지 에도 시대에서 유행한 그림 양식. 니시키에 錦絵는 우키요에 중에서 목판화로 찍은 것을 말한다.


고서의 숲을 탐험하는 탐험가의 추리소설

사실상 추리소설이나 마찬가지이다. 추리소설은 사건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풀어 나가는 탐정과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소설은 책을 중심에 놓고 실마리를 찾고, 역사를 훑어 보고 집요하게 책을 찾는 탐정이자 탐험가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게 긴장감을 잔뜩 느끼며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역사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느낌도 든다. 이게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진행방식이라고 생각해 보니 일본 만화에서 주로 쓰는 방식처럼 보인다. 일본의 만화들을 보면 꼭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한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야기기 많다. 그런 방식의 만화의 원형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이 1974년에 출간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게 보인다.

 

장정은 책, 주로 표지를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작가에 관하여

소설의 배경이 1940년에서 1970년대까지이다. 그리고 작가인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1930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시대에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작가. 꺼림칙하다. 게다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고서를 구하기 위해서 팀을 짜서 한국으로 여행을 하고 기생관광을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쯤되면 한국을 식민지로 삼던 시절을 그리워 하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좀 불안해서 찾아 보다가 이런 기사를 보고 의식이 비뚤어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안심했다.


얼마 전 필자는 수필가 정명숙 선생으로부터 일본의 베스트 셀러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1962년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기 위해 “사상계” 장준하 사장에게 보내온 서신을 보여주기에 읽어 본적이 있다.

 

“장준하 선생! 제가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자료입니다.

 

1) 창씨개명정책 때문에 자살한 설진영 가족이나 그 지인들. 2) 3.1운동시 일본유학생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한 사람(최팔룡같은 사람). 3) 3.1운동 때 제암리 사건으로 학살된 걸 목격한 자나 그 연구자. 4) 강제동원으로 징병훈련소에 간사람, 돌아 온 사람, 도망자등. 5) 해방 후 한국에 귀화한 일본인 부인들과의 만남이나 좌담 희망. 6) 김광식과 같은 한국작가와의 만남. 7)전쟁중 일본인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현재도 활약하고 있는 30대의 저널리스트.

 

이런 자료들을 제가 원합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했던 시대에 저지른 죄상을 파헤쳐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는 일본과 한국이 새로운 우정으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지은 죄를 충분히 사죄하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성의 자료로서 이상의 사람들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작품 발표는 르포르타쥬, 소설 두 개의 형식으로 문예춘추에 게재할 예정입니다(하략).”


- 출처 : 경남일보, 김중위(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2015. 11.9.


다작을 했던 작가이면서 주제와 소재도 다양하다. 굉장히 뛰어난 글쟁이였던 것 같다. 이름은 처음 들어 봤지만 이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책을 쓸 정도면 다른 책도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 <이조잔영>(신상옥 감독), <족보>(임권택)이라는 작품들은 한국에서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토슈사이 샤라쿠 東洲斎写楽의 작품. 샤라쿠는 에도시대인 1794년에 갑자기 나타나 1795년까지 단 10개월만에 130여점의 작품을 남기고 없어져 버린 의문의 화가이다.


그래서 간음성서는 무슨 내용이야?

책의 세일즈 포인트를 간음성서에 두고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이면서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정 裝訂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콩의 거부인 서창덕이라는 사람이 간음성서를 장정하기 위해서 일본 최고의 장정가인 사도라는 사람을 홍콩으로 초빙한다. 서창덕의 요청은 살아있는 어린 여성의 살가죽으로 책을 장정해 달라는 것이다. 책이 간음성서인만큼 그에 걸맞는 장정을 하려고 한 것이다. 사도는 그 요청을 받아 들여 처음으로 사람가죽으로 책을 장정한다. 이후 사람가죽으로 장정을 하는 희열을 알게 된 사도는….


소설 속에 수많은 일본의 고서에 관한 정보들이 나온다. 이 소설을 읽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책에 대한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름이라도 들어 봤으면 훨씬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우키요에, 니시키에, 구미에 같은 그림에 관한 얘기들도 나오고 유명한 화가인 샤라쿠에 대해서도 나온다. 물론 잘 몰라서 아쉽다. 비슷한 얘기가 조선시대의 고서로 배경을 바뀌어 있었다면 훨씬 재미있게 읽었을 수 있을 것 같다.

 

간음성서. 출애굽기 20장 14절에 'Thou shalt commit adultery.(현대어. You shall commit adultery. 너희는 간음할지니라.)라고 씌여 있다. shalt와 commit 사이에 not이 빠져 있다.


고서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없이 봐야 한다는 약점만 잘 넘어가면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작가의 원래 직업이 기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르포르타주를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런 소설이 1970년대에 나왔다는 점이 흥미로워서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어떤 소설이 있었는지, 뭘 읽어 봤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으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본격 고서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의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 추천.


※ 세도리 競取り

1. 원 뜻 : 고서점에서 책을 싸게 사서 다른 곳에 비싼 가격에 팔아 이익을 남기는 사람이나 그 행위
2. 책 속에서 : 새로 개점한 가게에 가서 알짜배기 고서만 골라 사는 것. 예를 들면, 헌책의 시가를 모르는 미망인이 남편의 장서를 밑천으로 고서점을 시작할 때 재빨리 그 서점에 가서 알짜배기 책만 골라내는 식으로 거래한다.
3. 세도리 남작 : 이 책의 주인공. 세도리의 명수. 당연히 다른 경쟁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4. 세도리 칵테일 : 세도리 남작이 즐겨 마시는 칵테일. 보드카, 진, 소주 등 투명한 색의 술을 물과 섞어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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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 이 포스팅은 소설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들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최초의 남녀에게 죽을 때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어. 하나는 나무처럼 죽어서 씨앗을 남기는, 자신은 죽지만 뒤에 자손을 남기는 방법. 또 하나는 달처럼 죽었다가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방법. 그런 전설이 있어. -P.181


장면1, 현재 : 만남


호텔에서 한 남자가 30대의 여자와 그 아이를 만나고 있다. 아이는 일곱살 정도인데 말투가 건방지다. 미스미라는 남자도 함께 만나기로 했는데, 오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며 얘기를 나누는 중.
- 등장인물
한 남자 : 오사나이 쓰요시, 아이 엄마 : 미도리자카 유이, 아이 : 네번째 루리, 오지않은 남자 : 미스미 아키히코


 

사토 쇼고 佐藤正午 (1955~ ) <달의 영휴>로 제157회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장면2, 15년 전 : 어느날 갑자기 낯설어진 아이


갑자기 딸 루리가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다. 며칠을 고생하다가 겨우 나았다. 아이가 나은 후 며칠 동안은 집안이 평온했다. 그런데 아내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한다. 아이가 어른스러워 졌다고 한다. 아이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이름을 알고 있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알 리 없는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린다. 급기야는 갑자기 집에서 사라졌다. 가 본 적이 있을 리가 없는 곳에서 발견됐다. 아빠는 루리와 돌아 오는 길에 대화를 나누고 함께 약속을 한다. 루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마음껏 돌아 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 루리는 아빠와 약속한 후에 다시 평범한 아이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날, 아내와 루리는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 등장인물
아빠 : 오사나이 쓰요시, 엄마 : 후지미야 고즈에, 딸 : 두번째 루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두 개의 음식. 왼쪽이 오사나이와 루리가 티격태격하는 소재가 되었더 도라야키. 도라에몽이 좋아하는 그 빵이다. 오른쪽이 미스미가 루리에게 줬던 이치고니, 하치노헤 시의 향토음식으로 성게와 전복이 들어간 맑은 장국이다.


뻔하고 흔해 보이는 환생 러브스토리


이제는 너무나 흔해 보이는 환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맨 처음 타임머신과 타임리프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을 때, 굉장히 신선했지만 이제는 너무나 흔한 장치가 되어 버렸다. 환생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누가 환생과 러브스토리를 연결지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의 강을 건너 다시 찾아온 영원한 사랑, 처음에는 굉장히 신선했겠지. 이제는 아니다. 단물이 빠질대로 빠졌다. <달의 영휴>는 그 진부한 소재를 다시 끌어들어 들였다. 개연성이 있으면 재미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욕얻어먹기 딱 좋다. 미리 얘기를 하자면 재미있다.

 

우리는 이미 엄청난 환생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환생을 소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도깨비.


장면 3, 35년전 : 첫사랑에 빠진 남학생


미스미는 연애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스무 살 대학생이다. 비오는 7월,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 출근을 하는데, 가게 앞에 27살의 여자가 서 있다. 몇마디 말을 나누고, 수건이 없던 미스미는 티셔츠를 줘서 그 여자가 비를 닦을 수 있게 해 준다. 몇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녀가 간 후 계속해서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원래 사랑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다. 다음에 다시 그녀가 왔을 때, 둘은 미스미의 방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다.


그후로 한 달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출근 길마다 그녀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겨우겨우 만났을 때, 그녀는 평범한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역시 결혼을 한 여자였다. 할 말이 많았다. 그녀도 그랬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이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 한참 뜨거운 사랑을 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혼잡한 전철 플랫폼에서 밀려 선로로 떨여졌다. 당연히 전철이 들어오고 있었다.
- 등장인물
남 : 미스미 아키히코, 여 : 첫 번째 루리
내용은 여기까지..

 

제목에서 영휴(盈虧)는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작품속에서는 루리의 환생을 말한다.


갈수록 베일이 벗겨지고, 무늬는 촘촘해진다


처음에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인물들이 중요한 인물이 되어서 뒤에 등장한다. 그리고 아무 상관이 없었던 인물들이 사실을 이리저리 엮여 있다. 아무 상관이 없었던 사건들 역시 엮여 있다. 소설의 후반을 읽다 보면, '어? 이 사람이 이 사람이었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앞 부분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이야기를 굉장히 촘촘하게 잘 짜 놓았다. 사고로 세번을 죽은 루리는 세 번의 환생을 한다. 환생을 거듭하는 루리를 중심으로 축으로 해서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 얽힌 무늬를 풀어서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운 소설이다.


그리움에 관한 판타지


미스미와 루리를 중심으로 하는 러브 판타지이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주제는 사실 굉장히 닭살 돋는다. 하지만 서정적이고 뛰어난 필력으로 닭살돋는 설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새로운 인물이 나올 때마다 앞에서 만들어 놨던 복선을 회수하는 솜씨도 뛰어나다. 루리는 미스미가 그리워 환생을 하고, 만나기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다시 환생을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 달이 이지러졌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듯이 루리는 계속해서 환생을 한다. 루리라는 이름에 대한 집착도 강하여 태어나기 전에 엄마의 꿈속에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고 한자까지 알려 준다. 한 남자를 향한 루리의 그리움이 이 소설의 전체를 꿰뚫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든 루리와 미스미를 만나게 해 주고 싶어진다.

 

루리는 모두 네 번의 삶을 산다. 그리고 환생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어떤 인물일지 추측을 하면서 읽으면 그것도 흥미로울 듯.


아쉬운 후반부 일부


최근의 일본소설의 경향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는데, 후반 일부가 굉장히 사변적이다. 소설 내내 머릿속에 흘러가는 생각을 너무 자세하게 묘사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 경향이 심각해 져서 너무 많은 생각을 독자에게 쏟아내고 있어서 심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철학자의 머릿속을 뒤져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미스미와 미도리자카 유이가 대화를 할 때,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에 대해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아이디어를 얻은 책인 듯하다. 책의 뒤에 '참고 문헌'으로 밝혀 놓았다. 그런데.. 참고문헌을 밝혀 놓은 소설책을 이전에 읽었던 적이 있던가? 너무 뜬금없었다. 그리고 작자는 참고한 책에 대한 빚을 갚듯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전체적인 내용을 소설 속의 대화에 풀어 놓았다. 이 부분만큼은 마치 <달의 영휴>라는 작품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PPL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쌩뚱맞고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다. 어차피 소설 전체에 내용이 녹아 들어가 있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책의 내용을 소개했을까?


뻔한 내용이지만 뒤로 갈수록 루리를 중심으로 얽힌 사람들의 관계도가 궁금증을 더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 가면서 읽으면 뒷부분을 읽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생각도 못한 반전이 있다. 이 부분은 감각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복선을 느끼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알아채지는 못했다), 반전을 보고 나니 안심이 됐다. 하지만 소설에서 알려주지 않은 앞날은 여전히 걱정이다.


두가지 즐거움이 있다. 주인공 루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그리움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으면 첫 번째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짜맞춰 가면서 두 번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다 읽은 후에 처음부터 복선을 찾아가며 다시 한 번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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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양자 공부 - 완전히 새로운 현대 물리학 입문
김상욱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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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원자는 어디 있나요?
A : 모릅니다. 질문이 틀렸어요.
Q : 양자 역학은 뭐하는 학문인가요?
A : 원자를 설명하죠.
Q : 그럼 원자는 어디 있나요?
A : 모른다니까요!
Q : 원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원자를 설명한다고요?
A : 질문이 틀렸다니까요!
<김상욱의 양자 공부> P. 263


양자론, 현대 물리학의 끝판왕


처음 상대성이론을 들여다 볼 때,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관성계에서는 물체는 동일한 물리법칙을 따르고, 빛의 속도는 일정하니까 시간과 공간이 늘었다 줄었다 한다(특수 상대성 이론). 중력하고 가속도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거라서 중력이 큰 물체 주변은 시간과 공간이 변형된다(일반 상대성 이론). 실제 생활에서 볼 수 없는 현상들이니 이해하기 힘들었고, 어떻게 겨우겨우 현상만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양자론을 들여다 본다. 전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야.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해. 왼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어. 슈뢰딩거가 아무 죄도 없는 불쌍한 고양이를 죽였어. 슈뢰딩거 나쁜 놈! 얼마나 빠른지 보려고 했더니 어디있는지를 모르겠어. 눈을 부릅뜨고 어디있는지 봤더니 속도가 안나와. 관측이 되는 순간 우주가 두 개로 갈라져. 상대성이론은 갖다 대지도 못한다. 첩첩산중이다.


상대성이론은 너무나 빠른 세계를 설명하고 큰 중량을 설명하려다 보니 일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양자론은 너무 작은 세계를 설명하려다 보니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로서는 상대성이론보다 양자론이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렵다. <김상욱의 양자 공부>는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나는 문과생이다.

 

이 남자가 어느 쪽 문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 왼쪽? 오른쪽? 안 보면 몰래 아무 쪽으로나 들어간다. 보면 딱 걸린다. 관측을 하기 전에는 확률적으로 존재하지만 관측이 되는 순간, 어느쪽 문인지 확정이 된다. 이게 양자붕괴이다. 그런데 책 마지막에 나오는 지연된 선택(delayed choice) 이론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딱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책속 삽화. 삽화도 마음에 든다.


서론 따위 필요없지. 훅 들어 온다.


양자론을 보려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하게 될까? 보통은 원자론부터 시작할 것 같다. 아니면 빛의 이중성, 흑체복사부터 시작해서 에너지의 불연속성부터 설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김상욱 교수님은 산뜻하게 뛰어넘어가 버리신다. 책의 1장은 거시세계에서 양자론이 적용될 때 어떤 모습일지를 비유로 설명해 준다. 이제 슬슬 서론을 꺼내야 할 시점인 2장에서 바로 이중슬릿 실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양자의 중첩'에 대해 설명을 한다. 최소한 뉴턴부터는 시작해야 하는 거 아냐? 원자모형 정도는 한 번 설명해 주고 가는 거 아니었어? 그런 거 없다. 양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가차없이 치고 들어 온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빛의 이중성이든 흑체복사든 뭐든 서론을 길게 한다고 해서 양자가 이해되는 건 아니다. 그 단계 들어가면 어차피 헷갈린다. 구태여 '양자공부'라고 떡하니 제목을 붙여 놓은 책을 읽을 사람은 양자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본론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도 좋다. 가장 기본이 되는 양자의 성질을 제시해 놓고 양자론이 걸어 온 역사를 짚어 나가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이해해 놓고 지나가면 훨씬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양자론(양자역학)은 가장 작은 세계를 다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일상적인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양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인간의 언어가 양자를 설명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건 너무 철학적이잖아!


일상적인 언어로 쉽게 풀어 나가는 안내서


저자인 김상욱 교수는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포항공대, 카이스트,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다 현재는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전에 저자의 책을 본 적도 없고, 다른 매체로 강의를 들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좀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책이 굉장히 친절하다.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책보다 양자론을 친근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글을 썼다. 일상적인 언어로 쉽게 풀어나가려고 하면서 예시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그동안 읽었던 다른 책들에 비해서 확실히 부담이 덜하다. 처음 몇 장을 읽는 동안은 이 정도면 충분히 해 볼만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양자론이 이제야 임자를 만났다.

 

 

 

양자론은 머리는 아프지만 한참 들여다 보고 있으면 물질의 근원을 맛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기분만 좋다.

 

쉽다고 쉬운게 아니지. 양자론이니까..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4장, 5장을 지나간면서 의기소침해진다. 드디어 양자론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도 어떻게 따라가다가 길을 잃기 시작한다. 결 어긋남, 중첩, 얽힘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했다고 억지로 우기고 넘어가 본다. 그래도 많이 들어 본 용어니까. 카오스하고 프랙탈이 양자론과 연관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만델브로트 집합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뒤로 갈수록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이 나온다. 이전에 이해한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들도 다시 보니 모르겠다.


어떻게든 친절하게 끌고 나가지만 만만하지 않다. 그게 양자론이니까. 전세계 물리학의 천재들이 모두 모아도 제대로 양자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김상욱 교수는 친절하고 재미있게 책을 썼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책 중에 가장 쉽게 썼다. 하지만 어렵다. 그게 양자론이고, 난 천재가 아니다.

 

솔베이 회의는 벨기에의 사업가 에른스트 솔베이가 개회한 세계 물리학, 화학 학회이다. 3년마다 열리며, 현재도 계속해서 개최되고 있다. 위의 사진은 1927년에 개최된 제5차 솔베이 회의에 참석한 물리학자들의 사진인데, 저 안에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17명이 나온다. 맨 앞줄 가운데 자리는 당시 물리학계의 수퍼스타였던 아인슈타인이 차지했고,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닐스 보어는 두번째 줄 오른쪽 끝에 앉아 있다. 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는 양자론에 대해서 치열한 토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자역학을 사랑하는 물리학 교수의 프로포즈


책을 읽는 내내 양자론에 대한 저자의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쉽게 설명해서 한 명이라도 더 양자론의 함정에 빠뜨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굳이 알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알게 되면 이것만큼 좋은 게 없을 거라고 강변하는 것 같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양자론이 뭔지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물리학자의 이런 프로포즈라면 한 번쯤은 받아 들여도 좋을 것 같다.

 

2015년에 양자얽힘이 실재한다는 실험결과를 네이쳐 지에 발표한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의 바스 헨슨(엔지니어)과 로널드 헨슨(교수). 검증을 통과해서 공식적으로 인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양자얽힘은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양자얽힘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에서 밝힌대로 나는 문과생이기 때문에 이과생들이 양자론을 실제로 공부하는지 어떤지 잘 모른다. 나보다 더 잘아는 사람들일테니 추천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처음 양자론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교양 수준에서 양자론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기분좋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양자론에 대해서 띄엄띄엄 알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양자론에서 다루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일단 기본 개념과 흐름을 알아 두고, 이후에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보충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양자론에 관심이 없다면 상관없지만 교양 삼아서 한 권 읽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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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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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잠에서 깼다. 누군가 엄마를 죽였다.
잠에서 깼다. 싱그러운 아침햇살과 함께 잠이 깼으면 좋겠는데, 피비린내가 온 방안에 진동을 한다. 약을 끊으면 아드레날린이 치솟아 오르고 활력이 끓어 오른다. 너무 많은 활력으로 기억을 잊기까지 한다. 약을 계속 먹으면 무기력증에 휩싸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무기력함이 싫어서 며칠동안 약을 끊었다. 마침 어제는 기억이 끊어져 버린 채 잠이 들었다. 피냄새가 심상치 않다. 아랫층으로 내려가 보니 엄마는 날카로운 칼에 목이 베여 살해당했다. 시신은 널부러져 있다. 내 몸을 보니 피투성이다. 도대체 누가 밤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어떤 놈이 우리 엄마를 저렇게 잔혹하게 죽여 버린 거야?

 

작가 정유정.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피칠갑을 한 소설
긴장감 넘치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정유정의 소설이다. <7년의 밤>은 끝도 없는 긴장감 때문에 치를 떨면서 책을 읽었다. 출간한 순서대로 <28>을 먼저 읽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종의 기원>을 집어 들어 읽었다. 정유정은 예상을 빗겨가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긴장을 하게 만든다. <7년의 밤>과 다른 점은 작품 내내 피가 철철 흘러 넘친다. 노골적으로 배경을 붉게 물들여 놓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소설의 화자인 유진은 급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에 당황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모든 상황이 가리키는 범인이 바로 유진, 자신이라는 점이다.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 와 보면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릴 처지에 처해 있다. 다른 사람이 엄마의 죽음을 알아채기 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서 억울하게 뒤집어 쓸 수 있는 누명을 벗어내야 한다. 함께 사는 친구이자 형제이며 엄마가 양자로 맞아들인 해진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야 한다. 눈치없이 자꾸 엄마가 어디에 갔는지 물어 보는 이모의 의심도 두렵다. 일단 거실에 흩뿌려진 피를 깨끗이 닦아 내고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도대체 누구지?

 


밀어 붙일 때까지 밀어 붙인다
정유정의 특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소설 중반까지는 마치 범인을 알아내는 미스터리물처럼 전개가 된다. 유진은 누명을 쓰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 상황을 모르는 이모와 해진이 자신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선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최대한 감춘다. 이 과정에서 굉장한 긴장감이 가슴을 졸인다. 해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가 죽은 거실에서 티비를 본다. 이모는 자꾸만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전화는 왜 꺼져 있는지 꼬치꼬치 묻는다. 유진에게 감정이 이입되어서 내 속도 같이 타들어 간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지, 범인은 누구인지, 범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유진과 함께 고민을 한다.


유진의 기억은 점점 되살아나고, 범인이 바로 유진 자신임이 드러나는 순간, 순식간에 유진과 심리적인 거리감을 갖게 된다. 이제 해진과 이모가 위험해 처해 있다. 유진은 계속해서 자신이 살인을 하게 된 이유를 상기하고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 결국 자신을 의심하는 것같은 이모를 살해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읽는 사람의 사정같은 건 봐주질 않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피해야 하는 긴장감, 계속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유진에 대한 거부감같은 감정이 뒤얽혀서 읽는 동안 마음이 빳빳해지는 걸 느낀다. 점점 소설 속의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
유진의 시점에서 소설이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째서 유진이 그 상태가 되었는지, 유진을 불행하게 만든 (것 같았던) 엄마와 이모에 대한 원망도 함께 느껴진다.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고 범죄자를 끝까지 괴롭힌다. 유진은 불안감과 죄책감에 의해서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 진다. 여기까지 보면 이전에 읽었던 <7년의 밤>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7년의 밤>에서는 주인공인 현수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감정이입을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비록 범죄자이긴 했지만 저 상황에 내가 처해 있었다면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굉장히 컸다.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 오는 영재를 증오하는 마음도 생겼다. <7년의 밤>에서는 현수와 영재가 악을 나눠서 가지고 있었다. <종의 기원>에서는 두 사람 몫의 악을 유진 혼자 다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오로지 유진만이 절대 악이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처음에 잠깐 들었다가 실상이 드러나면서 사그라 들어 버렸다.
이후 작가는 가차없다. 선이고 악이고 도덕적인 관점은 이 소설에서는 아무 쓸모없다. 순수하게 악인의 관점에서 소설을 진행해 나간다. 읽는 사람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래서 불편하다.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 나갔더니 결말도 씁쓸하다. 시원하게 끝이 나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결말은 아니다. 악인의 입장에서 소설이 끝나 버렸다.

 

<7년의 밤>, <종의 기원> 두 소설에서 안개가 작품의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숨을 크게 한 번 들이 쉬고 책을 덮다
긴장감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것 같은 소설을 또 한 권 읽었다. 유진의 심리를 이렇게까지 자세히 묘사를 해 놓은 것을 보면 마치 정유정이 살인을 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상황과 심리묘사를 통해서 읽는 사람을 긴장시키는데는 최고의 소설가인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좀 사람을 그만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소설을 읽는 재미나 몰입감은 <7년의 밤>이 더 좋았지만 결말은 억지로 주인공 편이 승리를 거머쥐었던 <7년의 밤>보다 나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또 시간을 두고 <28>을 읽을 차례다. 마찬가지일까?


몰입감도 대단하고, 심리묘사도 뛰어나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를 힘들다. 누구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단, 잔인한 장면을 싫어하거나 평소에 공포영화나 스릴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읽기 힘들 수 있다. 편안한 에세이나 동화같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마음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읽을 때 되도록 감정이입을 하지 말고 거리를 두고 읽기를 권한다.


당연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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