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사토 겐타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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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모기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동물은 무엇일까? 소제목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지만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은 모기이다. 전쟁이나 살인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숫자가 더 많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른 인간에 의해 죽은 인간은 1년에 약 475,000명인데 반해 모기에 의해 죽는 인간은 약 725,000명이다. 뱀은 약 50,000명, 개가 약 25,000명이니 다른 살인동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간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동물이 죽이는 인간보다 모기가 죽이는 인간의 수가 더 크다. 별다른 천적이 없어 보이는 인간에게 모기는 거의 유일한 천적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기가 사람을 잡아먹거나 상처를 입혀서 죽이는 것은 아니다. 모기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와중에 인간에게 치명적인 질병인 말라리아, 뎅기열, 황열병, 일본뇌염 등 수십가지 질병을 옮긴다. 게다가 어느 정도 관리가 가능한 다른 동물들에 비해 모기는 완전히 차단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에는 많은 질병에 대한 치료약이나 예방약이 개발되어 있어서 그나마 걱정이 덜하지만, 모기가 원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약도 없었던 시대에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르고 호되게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모기에 의한 질병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열 가지 약에 대해 안내한다.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동물은 모기. 모기가 옮길 수 있는 치명적인 전염병은 22종류라고 한다.

 


인류를 구한 약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만약에 이 약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비타민 C. 비타민의 존재를 몰랐던 때, 사람들은 장기간에 걸친 항해에서 괴혈병에 시달렸다. 항해사고나 정박지에서 원주민과 충돌해서 사망하는 선원들보다 괴혈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병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괴혈병은 대항해 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결국 라임같은 비타민 C가 풍부한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를 통해 문제는 해결되었다. 간단한 약(정확히 약은 아니지만)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문병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말라리아도 마찬가지이다. 2차대전 중에 극성을 부렸던 말라리아는 일부 전장에서는 전투에 의한 사망자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각 군의 지휘관은 전투에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말라리아에 의해 죽는 병사가 없도록 관리를 잘해야 했다. 심지어 교황이 선종했을 때 다음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서도 말라리아는 큰 문제가 되었는데, 모든 추기경이 한 곳에 갇혀서 다음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성베드로 성당에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교황으로 선출된지 8일만에 말라리아로 사망한 교황도 있었다고 한다. 청의 강희제도 치료제인 퀴닌을 섭취하지 못했으면 말라리아에 걸려서 죽을 뻔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정말 약이 세계사를 바꾸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10가지 약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개발된 이후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약들이다. 역사상 많은 인물들이 약이 없는 질병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고, 어떤 인물들은 개발된지 얼마되지 않은 약을 복용하여 살 수 있었다. 외과적인 치료에 없어서는 안되는 마취약이나 상처에 감염된 세균에 의한 합병증을 크게 줄여주는 소독약은 외상환자의 치료에 큰 기여를 했다. 책에서 언급된 모든 약이 중요해 보이지만 내 생각에 다른 어떤 약보다도 중요한 약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탄생해서 인류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한 항생제인 페니실린이다.

 


대항해시대에 모험가들이 가장 무서워 했던 것은 해적이나 풍랑이 아닌 괴혈병이었다. 괴혈병은 신선한 채소나 과일을 먹어 비타민 C를 섭취하면 예방할 수 있다.


약의 역사도 이렇게 흥미진진하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에서 다루고 있는 약은 지금와서 보면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익숙하다. 하지만 그 약들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질병에 대해서 인간들이 너무나도 무력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의사, 화학자들이 고군분투를 한 끝에 지금은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병도 있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병도 있다. 마치 인류라는 영토를 침범하려는 병의 침략에 대항해 싸우는 의사라는 장수와 그 밑에서 함께 저항하는 이름없는 병사들의 끝없는 전쟁같다.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잘못된 대응으로 이유도 모르면서 끝없이 죽어나가고 겨우겨우 실마리를 찾아 물리치는 과정을 마치 전쟁사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했는데 약의 역사 역시 다를 것이 없다.


그중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세균 및 바이러스를 이겨내기 위한 연구가 가장 극적이다. 세균도 그렇지만 바이러스는 더더구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미경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원인을 특정할 수 없어서 정확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찌어찌 과학이 발전하면서 소독약, 살바르산, 설파제, 페니실린으로 이어지는 약에 의해서 한 순간 정복이 되는 것 같았지만 약에 대해서 내성이 생긴 바이러스가 다시 나타나면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또다른 항생제를 개발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쫒고 쫒기는 이 전쟁은 아마도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인류보다 생명력이 훨씬 강한 바이러스가 결국에는 최후의 승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바이러스는 우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끈질긴 녀석들..)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수많은 질병이 있다. 오히려 정복된(것처럼 보이는) 질병이 몇 가지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개발이 되었으면 하는 질병은 치매 치료제이다. 몸은 정상인 상태이면서 정신만을 갉아 먹는 치매는 걸리는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 같다. 게다가 고령사회로 접어 들고 이제는 초고령 사회로 달려가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치매에 대한 치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굉장히 큰 사회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가끔씩 치매 정복의 실마리가 발견되었다고 뉴스에 뜨는 것 같은데 어서 빨리 해결되어서 고통받는 환자와 가족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알렉산더 플레밍 경 Sir Alexander Fleming (1881 ~ 1955) 스코틀랜드의 세균학자. 세계 최초로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하여 항생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


약의 개발사를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 중간중간에 들어가 있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역사나 약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어렵지 않게 쓴 책이다. 분량도 많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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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매트 리스 지음, 김소정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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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죽었다

1829년 10월 9일. 모차르트의 여섯째 아들인 볼프강은 병석에 누운 고모를 찾았다. 모차라트의 아들의 고모이니, 어릴 때는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재능을 보였고, 모차르트, 아버지와 함게 연주 여행을 다녔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애칭 나넬, 소설 속에서는 나넬이라고 되어 있지만 난네를이 더 맞는 발음이다)이다. 나넬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다른 유산은 아들인 레오폴트(모차르트 남매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에게 남기지만 볼프강에게 가죽으로 장정한 노트 한 권을 남긴다.


책의 내용은 1791년 12월의 기록이다. 나넬은 아버지 레오폴트가 모든 유산을 받은 후 수년간 소원한 사이였던 동생 모차르트의 소식을 듣는다. 동생이 죽었다. 35세라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놀라게 했던 천재 음악가인 동생 모차르트가 죽었다. 이미 장례식은 엄수되었고, 나넬은 모차르트가 살던 빈으로 찾아간다.

 

Matt Ross 1967 ~ . 영국의 소설가


미스터리 투성이(인 듯 보이는) 모차르트의 죽음을 소재로 한 팩션

모차르트의 죽음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그 이유는 어떤 음모나 미스터리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의학 수준이 낮아서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려진 사망원인은 발열과 좁쌀같은 발진이라고 되어 있는데, 발병한지 겨우 15일만에 급작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작곡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나이에 단명하고 말았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죽은 직후에도 음모에 의한 죽음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이 소문의 피해를 직격으로 얻어맞은 가장 억울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자 빈의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이다. 천재의 죽음에 납득하지 못한 민중들이 엉뚱한 누명을 살리에리에게 뒤집어 씌웠고, 지금 그의 음악은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악명만은 여전히 떨치고 있다. 심지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살리에리의 독살설이 대중에게 퍼지도록 희곡을 쓴 피터 셰퍼가 제일 나쁘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역시 모차르트가 석연치 않게 죽은 것을 소재로 하지만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그의 죽음을 바라본다. 살리에리는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모차르트 추모 자선 공연에서 지휘를 하는 모습으로만 등장할 뿐 주요 인물이 아니다. 나넬은 모차르트의 죽음에 미심쩍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빈으로 여행을 하는데 때마침 열리는 자선음악회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내정되어 있던 호프데멜 대신에 연주를 맡게 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나넬은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 뿐만 아니라 배우인 기제케, 황제인 레오플트 2세, 프러시아의 대사인 아코비 남작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모차르트가 죽기 전에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든지, 모차르트 주위의 사람들이 프리메이슨의 영향하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결정적으로 황실도서관장인 슈비텐 남작으로부터 모차르트의 죽음이 알려진 바와는 달리 독살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모차르트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모차르트 일가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 그리고 프리메이슨

이 책에서 말하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는 《마술피리》이다. 극한의 기교를 지닌 소프라노 콜로라투라만이 소화해 낼 수 있다는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 속에 끓어오르고>(흔히 말하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 정확하게는 밤의 여왕의 두 번째 아리아이다)가 있는 그 오페라이다. 모차르트가 말년에 프리메이슨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마술피리》에 프리메이슨과 관련한 여러가지 상징을 표현했다는 것도 여러 논문을 통해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는 《마술피리》와 프리메이슨의 관계에서 소재를 잡아내서 모차르트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만들어 낸다.


나넬은 모차르트의 죽음을 파헤치던 중에 모차르트가 독일에 새로운 프리메이슨 지부를 만들면서 여성이 참가하는 지부를 만들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리메이슨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회원을 받지 않고 있다. 즉,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어기는 지부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모차르트가 독살을 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장면,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리아 중에 하나인 <Der Ho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 속에 끓어오르고)로 유명하다. 사진 속의 여왕은 디아나 담라우이다.


밋밋한 미스터리

《마술피리》는 모차르트 죽음의 미스터리를 나넬이 파헤쳐 나가는 형식이지만 너무 밋밋하다. 먼저 소재 자체가 특별할 것이 없는게 모차르트의 독살설이라든지 《마술피리》에 프리메이슨의 상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소재를 잘 엮어서(예를 들면 댄 브라운처럼) 미스터리를 촘촘히 잘 깔았으면 좋았을텐데,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그리 대단하지 않다. 결국 미스터리의 핵심은 '모차르트를 독살한 범인이 누구인가'인데 책을 읽으면서 그다지 궁금증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어 나가는 방식에도 문제가 많은데 단지 '모차르트의 누나'라는 신분 외에는 권력도 지성도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 나넬이 추궁만 하면 모두들 중요한 비밀을 술술 불어 버린다. 나넬은 딱히 대단한 추리를 추리를 하지 않고서도 사건의 진실에 다가선다.나넬이 미스터리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개연성있는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감하기 어렵다.


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은 대단한 귀족도 아니었던 나넬이 추궁을 하자 백작이나 남작같은 귀족 뿐만 아니라 황제와 왕자까지 위축되고 우물쭈물대는 모습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보여준다. 특히 페이크 흑막인 페어겐 백작의 죄상을 황제 앞에서 밝힌 후, 황제가 여성이 가입할 수 있는 프리메이슨 지부의 창단을 거절하자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틀리셨습니다."라고 얘기하는 모습은 너무 심했다. 절대권력인 왕에게 기껏해야 하급귀족부인인 나넬이 그렇게 얘기를 하고서도 무사하다고? 작가는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는 당당한 여성상을 그리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설득력이 너무 떨어진다.

 

프리메이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 직각자와 컴퍼스. 분별과 심판을 통해 피조물의 삶을 설명해 준다. 로지 마스터의 상징으로 회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윤리적 규약을 의미하며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을 모아 조화롭게 만드는 도구의 상징이다.


★★☆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는 미스터리를 구성할 소재는 다 준비해 놓았다. 천재의 급작스런 죽음, 죽음의 미스터리, 사건을 좇는 누나, 죽음의 위협, 프리메이슨과 장미십자회같은 비밀결사단체, 범인을 잡아내는 극적인 장치, 마지막에 독자의 뒷통수를 강하게 치는 반전까지. 하지만 이런 좋은 소재들에도 불구하고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은 아니다.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으니 마지막에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과정에서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차르트 당시의 상황을 조합해서 팩션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빈의 풍경을 상상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좀더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이 구성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많이 아쉽다.


책을 읽으면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음반을 다시 듣고 싶어져서 여러번 들었다. 담라우의 힘넘치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다시 찾아 보기도 했다. 그건 좋았다. 하지만 이건 소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는 모차르트에 대한 몇가지 음모론을 알 수 있는 소설, 딱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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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 살인 - 벼랑 끝에 몰린 가족의 고백
마에다 미키 외 지음, 남궁가윤 옮김 / 시그마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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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사회가 늙어가고 있다

전체 인구 중에 만 65세 이상의 인구가 7%가 넘으면 고령화 사회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만 65세 이상의 인구가 14%를 넘어서면 고령사회라고 한다. 바로 작년인 2017년 우리나라는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우리나라의 고령인구비율은 14.3%이고 빠르게 초고령사회로 달려 가고 있다. 초고령 사회의 기준은 20%이다. 2017년의 합계 출산율(한 여성이 15~49세의 가임기간 동안 출산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산아 수)은 1.052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KOSIS 국가통계포털 자료 참조) 출산을 꺼려할 뿐만 아니라 비혼가구마저 늘고 있다. 사회가 혁명적인 변화를 겪지 않는 한 이제 달려가기 시작한 기차를 멈출 방법은 없어 보인다.


사회가 늙어가면서 많은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사회가 활력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하고, 고령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간의 복지비용을 둘러싼 대결 양상도 펼쳐지고 있고, 일자리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이 병에 걸렸을 때, 간병을 하는 가족들의 고통 역시 아직은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 않지만, 누구나 주변에 간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을 지인이 있거나 본인이 간병을 하고 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모두들 알고 있는 문제다. 장수는 복일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고 가난하면서 오래 사는 것은 너무나도 큰 고통이다. 문제는 당사자 한 명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큰 고통을 주며, 결국에는 가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거다. 《간병살인》은 오랜 간병으로 인해 파괴된 가정을 취재한 기록이다.

 

고령사회에서 치매는 가장 비극적인 질병 중에 하나이다. 특히 치매는 회복의 희망이 전혀없이 나빠지는 것만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점 때문에 절망스럽다.


'살인자'를 취재한 마이니치 신문사의 《간병살인》 취재반

《간병살인》은 마이니치신문의 기자 세 명이 취재한 기사를 새롭게 엮어서 써낸 책이다. 시민의 애환을 그린 다른 기사 시리즈인 <애환기>를 취재하던 중에 간병을 둘러싼 비극이 4건이 되는 것에 주목하여 새롭게 팀을 짜서 취재했다고 한다. 기자들이 취재를 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특히 비극의 현장에서 취재를 하는 기자들의 어려움은 더욱 클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간병을 하다 한계에 도달하여 환자를 살인한 사람은 분명히 범죄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취재과정이 순탄하지 않다. 죄책감과 상실감 때문에 잊고 싶은 기억을 끄집어내기 싫은 취재대상으로부터 그들의 진심을 끌어내는 과정이 절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기다림과 설득을 통해 취재를 해낸 기자들의 취재과정에 박수를 보낸다. 마에다 미키오 前田幹夫, 시부에 치하루 渋江千春, 무코하타 다이지 向畑泰司, 세 명 기자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한 번 언급은 하고 가자.


글의 서두에서 고령화 사회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간병'이 꼭 노인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선천성 환자도 있고, 젊은 나이에 사고로 거동을 할 수 없는 장기환자도 있다. 그래도 역시 간병이 가장 필요할 '확률'이 높은 사람들은 고령으로 인해 신체 또는 정신에 문제가 생긴 노령층이다. 특히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치매환자가 늘어난 것이 최근에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치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활동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나 정신의 이상 때문에 간병을 하기가 굉장히 힘들고, 잠깐 동안의 방심으로 인해 화재 등의 큰 사로고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재의 대상 중에 상당 부분은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취재한 총 44건의 사례 중에서도 20건이 치매를 앓는 환자의 사례이다. 그 외에 조현병, 우울증, 사고나 병에 의한 마비환자들도 취재했다.

 

스스로 거동을 할 수 없어서 간병이 필요한 환자는 본인이 불행한 것 뿐만 아니라 가정까지 파괴할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간병의 늪에 빠진 가족들의 절망

《간병살인》 취재반은 꽤 다양한 사례를 취재했다. 그런데 모든 사례들에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간병살인》에 등장하는 '살인자'들은 자신의 가족인 환자를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하다. 기본적으로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적게는 십수년, 많게는 30~40년 동안 간병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슬프긴 하지만 기꺼이 가족의 간병을 시작하고 책임감있게 간병을 해 나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물론이거니와 잠잘 시간마저 부족해 져서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그 결과 심각한 우울증 증세로 이어진다. 게다가 장기간의 간병으로 인해 수입은 없어지고, 돈마저 다 떨어지고 나면 경제적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상태로 몇 년간 더 지속하다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환자를 살해하거나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집에 간병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가족 중에 누군가 병석에 눕고 거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간병을 시작한다. 하지만 하루이틀 지나고 일년이년이 지나가면 간병은 이제 환자 한 명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웃음을 앗아가 버리고 집안에서는 없앨 수 없는 환자의 냄새로 가득찬다. 직접 간병을 하지 않는 가족은 집에 들어 오는 것을 꺼려해서 바깥으로 나돌게 되고, 결국 가족도 해체되기 시작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가 죽기를 바랄 수도 없다. 이 절망감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을 정도로 커서 환자의 가족들을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되고, 섣부른 동정마저도 가족들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환자 가족에게 있어서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은 너무나도 잘 들어 맞는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서 사랑하는 가족을 살해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도 '간병살해'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용적으로 판결하여 집행유예나 단기 징역혁을 선고한다고 한다.

 

거동을 할 수 없는 환자에게는 온전히 한사람 몫을 넘어서는 간병이 필요하다. 결국 환자 한 명으롱 인해 가족 한 명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간병비용은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가족의 경제상황은 파탄날 수 밖에 없다.

 

사회를 향한 기자의 질문

이 책은 '일본'의 기자들이 취재한 사례들을 편집하여 펴낸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병에 대한 지원이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일본인의 성향'(이 성향이 일본인들만이 가진 특성인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고 넘어가자)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딱히 일본에 비해 환자가족에 대한 지원이 나을 것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아직 일본만큼의 '간병살인'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주목을 하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는 걸까? 나는 전자이기를 바라는데,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결국 간병에 대한 문제는 한 가정이 책임지기에는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장기환자 한 명은 한 가정을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시급하게 필요한 문제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공적인 지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저 '더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정도에서 끝을 맺는다. 기자들은 파헤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간병살인》 시리즈 취재 후에 일본의 매스컴에서 간병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하니 사회적 담론으로 끌어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답변은 정부와 사회가 할 차례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일본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일본은 이미 2006년에 세계최초로 초고령사회에 진입을 했고, 65세 이상이 아니라 70세 이상의 고령인구가 20%를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다. 얼마 안 남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놓고 있다가는 일본이 겪고 있는 문제에 그대로 맞닿뜨릴 수 밖에 없다. 미리 고민해서 알맞은 방안을 준비해 두지 않으면 몇십년 후, 아니 빠르면 몇년 후면 우리에게도 분명히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 정부에서는 '치매국가책임제' 등 고령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으니 기대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더불어 고령인구가 아닌 다른 간병에 대한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도 함께 고려하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면 가장 좋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 못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개인과 함께 사회도 함께 대비하는 것만이 불의의 사태를 맞아 개인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방법이다.


★★★★☆
이 책의 마지막에는 기사를 읽은 사람들의 편지 일부가 실려 있다. 하나같이 위로를 받았다는 내용과 사회의 지원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비록 상황은 우리와 다르지만 읽어 보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책이다. 부디 환자를 간병하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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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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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불완전하다

나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은 2살 때의 기억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엄마 아빠와 함께 극장에서 서부극일 것 같은 영화를 본 것 같다. 딱 한 장면, 마차 바퀴가 보이고 엄마 아빠가 영화를 보며 나를 안고 있는 장면이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다. 그 다음 떠오르는 것은 6살 이후의 기억이기 때문에 영화관에서의 기억은 나에게 정말 소중했다.


나이가 든 후에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였을까? 영화를 보면서 울지는 않았을까? 2살이었던 건 맞을까? 어머니께 여쭤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은 대답은 물음표였다. 어머니는 결혼 후 단 한 번도 아버지와 극장에 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서부영화 본 적이 있을 거라고, 기억을 잘 더듬어 보시라고 해봐야 부질없었다. 하긴, 2살 때 본 영화를 기억한다는게 말이나 되나? 결국 아마도 나의 두살 기억은 왜곡된 것 같고, 내 생애 첫 5년은 백지가 되고 말았다.


기억은 완벽한 사진첩이 아니다.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1946 ~ . 영국의 소설가.

 


전작의 기대감을 오롯이 받은 신작

줄리언 반스는 전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다산책방, 2012)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한참동안 베스트셀러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기억과 책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을 독자가 마주쳤을 때 충격을 받았고, 나는 기억이라는 소재로 이렇게 충격적인 결말을 맺는 소설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


《연애의 기억》, 이 책의 제목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원제를 살펴 보았다. 《The Only Story》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도 제목을 잘못 달아 놓아서 책을 읽는 내내 서스펜스를 기대하다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제목이 썩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연애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전작의 히트에 기대는 제목인데, 전작의 결말이 계속 떠올라 충격적인 결말이 마지막에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 제목은 나의 생각을 많이 방해했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좋은 결말을 기대하기 힘든 연애 이야기

《연애의 기억》은 모두 3부로 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폴, 소설이 시작할 때 19세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의 부모 밑에서 자랐다. '연애'의 기억 속에 있는 연애의 대상은 수전, 다르게 부르면 매클라우드 부인, 즉 유부녀다. 게다가 소설 시작 시점에서 48세, 무려 폴보다 29살 연상이며, 심지어 두 딸은 폴보다 나이가 많다. 둘은 동네 테니스 클럽에서 복식조로 테니스를 치면서 친해졌고 연애를 시작한다. 영국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라면 쉽게 인정받기 힘든 연애 형태이다. 엄마 나이의 유부녀와의 연애라니...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1부는 폴과 수전이 만나서 연애를 시작하고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굉장히 급하게 빠져 들고 연애를 하게 된다. 그런데 연애소설이라고 하기엔 사랑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폴이 표현하는 수전의 모습도 그렇고 에피소드도 그렇다. 이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이 1960년대이고 폴은 노인이 되어 현재의 시점에서 기억을 더듬어 가며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같이 굉장히 쿨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1부에서 두 사람이 사랑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 후 2부에서는 수전의 불행, 둘이 멀어져 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1부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수전은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고(폴 때문인지, 원래 폭력성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폴이 좋아하던 앞니 두 개가 부러지기까지 한다. 결국 둘은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는데, 이제는 수전이 알콜 중독에 시달리며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알콜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하기도 한다.


수전이 병원에서 퇴원한 후 폴은 수전과 몇년간 생활을 계속하지만 견디지 못하게 되고, 해외출장을 핑계로 수전과 결별을 하는 내용이 3부이다. 이후 폴은 많은 시간이 지나서 수전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병원에 있는 수전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 병원을 찾는다.

 


바라건대, 당신은 내가 기억나는 대로 모든 걸 이야기 하고 있다고 알고 있겠지? 나는 일기를 쓴 적이 없고, 내 이야기-내 이야기! 내 인생!-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거나 멀리 흩어졌다 .따라서 내가 꼭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기억에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있고, 이것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p.39


파편화된 기억, 파편화된 문장

《연애의 기억》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문장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쉼표가 문장 곳곳에 찍혀 있고, 도치된 문장이 너무 많다. 게다가 너무 사변적이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체계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냥 아무 말이나 나오는대로 주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만약 작가가 의도적으로 파편화된 기억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면 성공적이다. 읽는 내내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읽는 속도가 나지 않는데 재미도 없다. 정말 읽기 힘든 소설이다. 굉장히 짧은 문장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책을 읽다가 계속 딴 생각이 난다. 흡입력 따위는 쥐뿔도 없고 몇 번이나 책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번역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이 책을 번역한 정영목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번역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그렇게 쓴 책이고 번역자는 그런 느낌을 최대한 반영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내용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어머니 또래의 연상의 여자와 사랑을 하고 도피를 하고 헤어졌다. 단지 이것 뿐이다. 그 외에 에피소드나 폴의 생각에 대해 계속 쓰고 있지만 도저히 흥미가 돋지 않는다. 연애에 대해서든 기억에 대해서든 소설을 쓰고 싶었으면 전체 플롯에 에피소드와 생각을 녹여냈어야 하는데, 그냥 따로 노는 것 같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도 별로 없다. 연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쓰고 싶었으면 에세이를 써야지 이런 식으로 단순한 플롯에 아무 말이나 마구 집어 넣어서야 곤란하다. 대단히 지적인 것처럼 쿨한 태도로 글을 썼는데, 온갖 잡다한 생각을 모두 때려 박아 넣었다고 해서 지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읽는 재미가 전혀 없다.


책 후면에 쓰인 매체들의 평가에도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은 힘의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황량하긴 하지만 전혀 찬란하지 못하다. 강렬하지도, 팽팽하지도 않다. 진실 따위는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더불어 나에게 어떠한 감동도 사랑에 대한 통찰도 주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너무 지루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전혀 주지 못했다.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는 '노년의 소설가가 그냥 젊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끄적거린 책을 명성에 기댄 매체들이 호평하고 그 명성에 기대하는 나같은 멍청한 독자들이 선택하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황량함이다. 제목은 《연애의 기억》인데, '연애'보다는 '기억'에 방점이 찍혀 있다.


★☆

내가 이 책에서 건진 건 두가지다. 유명작가나 전작이 인상적이었던 작가라고 해도 다음 책이 좋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그 하나다. '인생은 단면이고, 기억은 결을 따라 쪼개지는 것이며, 기억은 그것을 끝까지 쭉 따라간다 (p.188)'는 기억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다른 하나다. 하지만 겨우 이 두가지를 깨닫기 위해 돈을 쓰고 출퇴근 시간 피곤함을 이겨내며 이 책을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보통 책을 읽으면 되도록 정독을 하고 끝까지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마지막까지 읽는데 정말 큰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전작의 함정에 빠지기 말기를..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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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세계사 - 판사의 눈으로 가려 뽑은 울림 있는 판결
박형남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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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8 격동의 사법부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재판장인 이정미 판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했던(후무하기를 바란다) 대통령 탄핵 결정을 내렸다. 국정농단으로 우리나라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연인원 수천만 명이 촛불집회를 벌이던 참이었다. 이 판결은 거꾸로 흘러 가던 대한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았고, 한때 대통령이었던 박근혜는 이제 구치소에 구속되어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하게 헌법재판소는 사법부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헌법기관이긴 하지만 판사가 판결을 한 것으로 생각하면, 박근혜의 탄핵판결은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파급력이 큰 판결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마저 구속되어 1심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두번째로 두 전직 대통령이 한꺼번에 구속된 꼴을 지켜보고 있다.

역사를 바라볼 때, 중요한 사건을 짚어가면서 보는 것은 당연하다. 《재판으로 본 세계사》는 그 중에서도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재판을 살펴보는 보기 드문 책이다. 게다가 저자는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이다. 재판에 대해서만큼은 가장 전문가인 판사가 쓴 책이기 때문에 읽기 전부터 큰 기대가 되었다. 책에서는 개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재판들을 한 번에 모아서 역사순으로 보니 정리도 잘 된다. (이거 설마 혹평을 쓰면 고소당하거나 그런거 아냐?)

 

저자 박형남. 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60 ~ )


한 장에 재판 하나

《재판으로 본 세계사》은 모두 15장이다. 각 장은 역사적으로 의마있고 유명한 재판을 담았다. 각장의 구성도 비슷하다. 첫 페이지에서는 각 재판이 벌어진 시기, 재판 당사자, 쟁점, 결론과 역사적인 의미를 간단하게 소개해서 재판의 개요를 미리 머릿속에 넣어 놓고  읽을 수 있다. 각 장은 먼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재판 또는 사회현상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본격적으로 주제가 되는 재판의 발단, 경과, 결론이 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할 문제와 역사적, 법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약 400페이지의 책에 15개의 재판 에피소드가 담겨 있으니 각 에피소드는 약 30페이지 정도이다. 끊어서 읽기 편하다.


현직 판사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려고 하니 기대는 되었지만 처음엔 좀 딱딱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현직 판사가 쓴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재판으로 본 세계사》의 저자인 박형남 판사는 법률만 아는 편협한 판사가 아니다. 역사 지식이 해박하고 당시 사회상까지 자세히 살펴보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글을 풀어낸다. 쉽게 읽으면서도 각 재판의 배경과 쟁점을 법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어서 유익하다. 거기에 덧붙여서 각 장의 구성이 똑같고 설명이 깔끔해서 이해가 안돼서 앞장을 펼칠 일이 별로 없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세일럼에서는 마녀사냥으로 37명의 무고한 여자들이 생명을 잃었다.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다양한 판결들

《재판으로 본 세계사》에는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들을 가려서 실어 놓았다. '의미있는' 판결이지 꼭 '올바른' 판결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숨어서 내뱉었다는 갈릴레이의 판결도 중요한 판결로 등장한다. 미시사로 유명한 '마르탱 게르'의 귀환을 다룬 흥미진진한 재판 기록도 있고, 책의 뒤로 갈수록  근로시간 제한, 참정권, 인종차별, 악의 평범성, 미란다 원칙 등 유명하면서도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세계적인 판결들이 많이 실려 있다. 때로는 지금의 상식에 비추어 봐도 올바르게 판결이 된 것이 있고, 어떤 판결들은 도대체 말이 안되는 판결도 있다. 하지만 옳든 그르든 하나같이 중요한 판결들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판결들이 이 책 하나로 굴비 꿰이듯이 엮여나가면서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온 방향을 조망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1859 ~ 1935)

 


재판, 판결, 사회의 마지막 보루

책을 읽으면서 가장 관심을 두고 읽은 부분은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재판이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이미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재판에 다시 한 번 꽂힌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사법부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판사이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 판사는 개개인이 독립적인 기관이면서 판사 본인의 양심에 맞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을 보면 판사가 법과 양심이 아닌 다른 것을 고려해서 판결을 내린다.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는 그 '다른 것'이 정치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사법부의 이익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고,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재판은 최종판결이 나면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저자가 쓴 다음 해설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드레퓌스가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왜 12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형사사건이 유죄로 확정되면 재심으로 바로잡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분열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판결을 번복하는 경우 엄청난 정치, 사회적 갈등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법적 논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p. 262


위의 해설이 저자의 의견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판사들의 생각을 해설해 놓았을 것이다. 판결에서의 모든 문제는 법적 논리만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법적 논리가 아닌 정치적 상황, 전관예우, 돈, 권력 등이 결부되는 순간 판사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사회는 마지막 보루를 잃어 버려 사회적 안정성이 치명적인 해를 입게 된다. 사회적 안정성은 차치하고라도 재판의 당사자인 피의자는 인생을 잃게 된다. 법이라는 객관적인 잣대에 기댄 판결만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이런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잘못된 판결로 인해 인생을 망친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에르네스토 미란다 Ernesto Miranda가 서명한 미란다 카드. 미란다는 출소 후 미란다 카드에 사인을 해서 1달라 50센트에 팔았다.


재판에 관한 책을 읽은 김에..

우연히도 이 책이 나온 시점으로부터 내가 읽은 시점에 우리나라는 판사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다. 쓰레기같은 양XX라는 전임 대법원장은 판결을 가지고 권력과 거래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진실을 파헤칠 것을 많은 국민들이 원하고 있는데 양XX의 뒤를 빨던 판사들은 정당한 영장을 발부하지 않음으로써 검찰의 수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사법부가 이런 상태라면 어떤 국민이 자신이 받는 판결에 대해서 승복을 할까? 유죄를 선고받은 피의자가 판사들이 무슨 권위와 권리로 나에게 유죄를 내리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판사의 권위는 공평하다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이미 많은 국민들은 판사들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의 사법부 적폐를 드러내지 않는 한, 아마도 언젠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흥미있게 읽을 수 있고 유익하기도 하다. 책이 어렵지도 않고 끊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꽤 두꺼운데도 불구하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대체적으로 모든 재판을 쉽게 읽을 수 있는데, 법적인 논리를 따지고 드는 재판을 설명한 장은 깊이 생각하면서 그 안의 논리를 읽어나가야 해서 좀 어려운 편이다. (나의 리갈 마인드가 많이 부족하다). 책의 저자인 박형남 판사가 누군지는 모른다. 그저 국민에게 신뢰를 받는 멋진 판사가 쓴 좋은 책을 읽었기를 바랄 뿐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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