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는 장남과 장손을 통한 가계 계승이 확산하여 나가지만 그전에는 장남 유고 시에 다른 아들이 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 P38

균분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15세기 분재기를 보면 노비의 경우 수적인 균분은 물론 질적인 균분까지 추구하였다. - P42

조선의 오랜 관행이던 균분 상속은 아들과 딸이 부모로부터 동등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는 장치였으며, 결혼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가계가 물질적으로 결합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 P47

한정된 자원을 분할하기보다는 특정 자녀에게 집중시킬 때 가계의 영속 확률은 더 커지는 것이다. 그때 그 대상은 아들들, 그 가운데에서도 장남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 P50

달성령은 종친으로서의 특권을 누렸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적자인 종친에 비해서는 낮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첫 부인은 바로 현감 유예원의 딸 유씨였다. - P62

일반적으로 종친은 품계에 따른 경제적 대우를 받았지만 과거응시나 관직 진출은 제한되었다. 관직 진출은 작위를 받지 못해 일반 양반들과 처지가 같아지는 종친의 후손들에게 개방되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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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실학자 정약용은 균분 상속 때문에 유력한 집안들마저 종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했다. 종가의 성립과 유지가 재산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균분 상속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개별가계의 재산규모를 줄어들게 하였다. - P11

유유는 몸이 작고 허약했으며 수염이 없고 음성은 여성 같았다. 이런 신체 특성과 자식이 없다는 서술 때문에 성적 장애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 P20

16세기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입양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은 집이 많았다. 가계가 꼭 장남을 통해서만 계승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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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먼 길에서 돌아와 지쳤고, 평화를 발견했다
그의 모든 수고를 돌판에 새겨 넣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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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남편 만들기, 1564년 백씨 부인의 생존전략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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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사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합리적인 추측
조선시대의 부조리가 지금은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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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춘수가 씌운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고문 끝에 옥중에서 죽었다. 유연은 고문으로 인한 고통을 참지 못하여 죄를 인정했지만, 이제는 끝내 인정하지 않고 결국 장형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 P215

고소 이전 대구부에서는 채응규가 진짜 유유인지 아닌지를 가리고 있었다. 곧 사기사건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씨의 고소 이후 사건은 동생이 적장자의 지위와 형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형을 살해한 살인사건이 되었다. - P219

유연이 살인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은 당시 사족들이공유한 생각이었다. - P219

유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묻고 사건의 실체를 알아내야만 하였다. 사법장치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면서 삼성추국의 위관과 추관의 책임을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은 없었다. - P220

1564년에 유연을 악인으로 만들어 사건을 성급하게 덮으려 했던 것처럼 1579년에는 이제 악인으로 만들어 동일한 효과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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