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누마 엘리쉬>는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을 찬양하는 내용의 서사시입니다. 총 일곱 개의 토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원전 2000년대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에누마 엘리쉬‘라는 말은 제1토판 서두에 적힌 말로, ‘그때 그 위에‘라는 뜻입니다. - P218

<에누마 엘리쉬>는우주진화형과 사체화생형, 그리고 창조형이 복합된 창세신화에 해당합니다. - P229

티아마트가 서양 용 드래곤의 원형이라면, 이런 무시무시한 드래곤인 티이마트를 죽인 마르둑의 무용담은 드래곤 슬레이어 Dragon Slayer, 즉 용살자 설화의 원형이 되겠지요. - P236

신화는 자연에 대한 당시의 해석이죠. 남자는 힘이 세고 무기도 다룰 수 있으나,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여성, 여신이 위대한 것은 생산력 때문이었습니다. - P238

바빌로니아의 신년의례는 춘분에 시작해서 12일간 진행되었는데 <에누마 엘리쉬>는 넷째 날에 암송되었다고 합니다. 이 의례는 ‘아키투‘ 축제라고도 불리었는데, 아키투는 ‘보리‘라는 뜻입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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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한 유유에 대한 소식이 유연에게 전해진 것은 달성령 이지에 의해서였다. 이지는 유유가 해주에서 채응규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편지를 유연에게 보냈다. - P75

상속에는 제사라는 책임이 동반되었다. 사위들이 처가의 재산을 포기한 배경에는 처가 제사의 회피라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 P89

1563년 겨울이 되었다.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유유가 서울에 나타났다. 그것도 춘수라는 첩, 정백이라는 아들과 함께였다. - P96

오랜만에 나타난 유유는 얼굴 형상이 바뀌어서 진위를 판별하기가 어려웠는데, 자형 이지, 고종사촌 매형 심륭, 고종사촌 이자첨과 또 다른 친척 김백천은 모두 유유가 맞다고 보았다. - P97

상황이 복잡해진 것은 보방된 지 며칠 만에 유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유유를 가짜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채응규가 가짜 유유임이 탄로나자 춘수의 도움을 받아 도망한 것으로 읽힐 만했다. - P107

유유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한 사건은 이제 유유가 왜 사라졌는가, 유연이 정말 형 유유를 죽였는가 하는 문제로 초점이 옮겨 갔다. - P107

백씨는 자신이 확인할 기회를 유연이 주지 않고 유유를 바로 관아에 넘겨 버렸다고 원망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관아에 억류된 유유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백씨는 많은 사람이 유유가 아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사족의 부인인 자신이 모르는 사람과 대면할 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며 확인을 거부하였다. - P109

백씨는 곡을 하며 재물을 탐한 시동생 유연이 박석에게 뇌물을 주어 남편 유유를죽이고 종적을 없앴다며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감사에게 읍소하였다. - P110

유연은 위관에게 무리한 재판에 대해 항의하며 만일 자신이 죽은 뒤 형이 나타나면 자신의 목숨을 다시 살려 낼 수 있느냐고 따졌다. - P124

조선의 죄인 신문과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는 큰 특징은 자백의 비중이 컸고 자백을 받는 과정에서 고신, 즉 일종의 고문이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사형수의 경우 죄인의 자백이 담긴 결안을 받아야 재판이 종결되고 처형할 수 있었다. - P127

유연의 재판에 참여했던 이들은 유유의 비정상적인 가출과 이후 집안일을 도맡아 주관했던 이가 유연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재산을 노린 단순 범죄로 이 사건을 한정해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 P139

유연이 집을 나간 유유를 찾아 나선 경험이 있었고 서울에서 유유를 다시 만났을 때 무척이나 기뻐했던 것을 보면 과연 그가 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는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 P146

중국의 종법은 맏이인 장남이 가계 계승자로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법전은 이를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비하여 형망제급이라는 부차적 원칙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형망제급과 충돌할 수 있는 오랜 관행이 존재했다. 바로 장남의 부인을 총부라 하여 현실에서 우대하였던 것이다. - P150

총부는 넓게는 큰며느리를 가리키지만 주로 자식 없이 죽은 큰아들의 부인을 의미했다. - P151

입양은 총부가 자신의 지위를 시동생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받아들인 고육책이란 측면도 있었지만 종법과 충돌 없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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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는 장남과 장손을 통한 가계 계승이 확산하여 나가지만 그전에는 장남 유고 시에 다른 아들이 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 P38

균분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15세기 분재기를 보면 노비의 경우 수적인 균분은 물론 질적인 균분까지 추구하였다. - P42

조선의 오랜 관행이던 균분 상속은 아들과 딸이 부모로부터 동등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는 장치였으며, 결혼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가계가 물질적으로 결합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 P47

한정된 자원을 분할하기보다는 특정 자녀에게 집중시킬 때 가계의 영속 확률은 더 커지는 것이다. 그때 그 대상은 아들들, 그 가운데에서도 장남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 P50

달성령은 종친으로서의 특권을 누렸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적자인 종친에 비해서는 낮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첫 부인은 바로 현감 유예원의 딸 유씨였다. - P62

일반적으로 종친은 품계에 따른 경제적 대우를 받았지만 과거응시나 관직 진출은 제한되었다. 관직 진출은 작위를 받지 못해 일반 양반들과 처지가 같아지는 종친의 후손들에게 개방되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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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실학자 정약용은 균분 상속 때문에 유력한 집안들마저 종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했다. 종가의 성립과 유지가 재산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균분 상속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개별가계의 재산규모를 줄어들게 하였다. - P11

유유는 몸이 작고 허약했으며 수염이 없고 음성은 여성 같았다. 이런 신체 특성과 자식이 없다는 서술 때문에 성적 장애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 P20

16세기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입양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은 집이 많았다. 가계가 꼭 장남을 통해서만 계승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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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먼 길에서 돌아와 지쳤고, 평화를 발견했다
그의 모든 수고를 돌판에 새겨 넣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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