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한 유유에 대한 소식이 유연에게 전해진 것은 달성령 이지에 의해서였다. 이지는 유유가 해주에서 채응규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편지를 유연에게 보냈다. - P75
상속에는 제사라는 책임이 동반되었다. 사위들이 처가의 재산을 포기한 배경에는 처가 제사의 회피라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 P89
1563년 겨울이 되었다.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유유가 서울에 나타났다. 그것도 춘수라는 첩, 정백이라는 아들과 함께였다. - P96
오랜만에 나타난 유유는 얼굴 형상이 바뀌어서 진위를 판별하기가 어려웠는데, 자형 이지, 고종사촌 매형 심륭, 고종사촌 이자첨과 또 다른 친척 김백천은 모두 유유가 맞다고 보았다. - P97
상황이 복잡해진 것은 보방된 지 며칠 만에 유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유유를 가짜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채응규가 가짜 유유임이 탄로나자 춘수의 도움을 받아 도망한 것으로 읽힐 만했다. - P107
유유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한 사건은 이제 유유가 왜 사라졌는가, 유연이 정말 형 유유를 죽였는가 하는 문제로 초점이 옮겨 갔다. - P107
백씨는 자신이 확인할 기회를 유연이 주지 않고 유유를 바로 관아에 넘겨 버렸다고 원망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관아에 억류된 유유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백씨는 많은 사람이 유유가 아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사족의 부인인 자신이 모르는 사람과 대면할 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며 확인을 거부하였다. - P109
백씨는 곡을 하며 재물을 탐한 시동생 유연이 박석에게 뇌물을 주어 남편 유유를죽이고 종적을 없앴다며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감사에게 읍소하였다. - P110
유연은 위관에게 무리한 재판에 대해 항의하며 만일 자신이 죽은 뒤 형이 나타나면 자신의 목숨을 다시 살려 낼 수 있느냐고 따졌다. - P124
조선의 죄인 신문과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는 큰 특징은 자백의 비중이 컸고 자백을 받는 과정에서 고신, 즉 일종의 고문이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사형수의 경우 죄인의 자백이 담긴 결안을 받아야 재판이 종결되고 처형할 수 있었다. - P127
유연의 재판에 참여했던 이들은 유유의 비정상적인 가출과 이후 집안일을 도맡아 주관했던 이가 유연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재산을 노린 단순 범죄로 이 사건을 한정해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 P139
유연이 집을 나간 유유를 찾아 나선 경험이 있었고 서울에서 유유를 다시 만났을 때 무척이나 기뻐했던 것을 보면 과연 그가 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는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 P146
중국의 종법은 맏이인 장남이 가계 계승자로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법전은 이를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비하여 형망제급이라는 부차적 원칙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형망제급과 충돌할 수 있는 오랜 관행이 존재했다. 바로 장남의 부인을 총부라 하여 현실에서 우대하였던 것이다. - P150
총부는 넓게는 큰며느리를 가리키지만 주로 자식 없이 죽은 큰아들의 부인을 의미했다. - P151
입양은 총부가 자신의 지위를 시동생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받아들인 고육책이란 측면도 있었지만 종법과 충돌 없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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