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의 재판에 대한 재조사의 필요성을 실제 제기한 인물은 정엄이었다. 1571년(선조 4) 사헌부 장령이었던 그는 유연 사건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 P167
이 사건의 극적인 전환은 다시 여러 해가 흐른 뒤에 일어났다. 살아 있는 유유를 목격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홍문관 수찬 윤국형이었다. - P171
1579년 겨울 윤국형은 선조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유유의 생존 가능성, 즉 유연 재판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 P172
채응규를 서울로 붙잡아 오는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그가 여전히 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는 비밀리에 해주 관아에 공문을 보내 채응규와 그의 첩 춘수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 P174
서울로 압송된 그녀는 세 차례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춘수가 구체적인 진술을 한 것은 신문 관원들이 점차 이지에게 혐의를 두고 그녀를 압박하면서였다. - P178
유씨 집안의 상속에서 채응규나 춘수가 간여할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백씨가 춘수의 아들 정백을 유유의 서자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 P181
춘수의 공초에는 이지가 채응규에게 "네 스스로 유유라 하고, 나도 유유라 한다면 그 누가 분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 P183
이지는 결국 신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당시의 판결은 이지가 채응규를 내세워 유연을 죽음으로 몰았던, 다시 말해 그를 사건의 주모자로 보았다. 춘수의 진술을 대체로 인정한 판결이었다. - P185
이지의 재판은 진짜 유유가 살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또한 심통원의 축출과 사림의 전면적인 등장이라는 정치 상황의 변화로 인해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 P188
이지는 처가의 상속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인 유씨와 사별하였는데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 만일 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혹은 외조부 유예원에게 극진하게 대했다면 별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 P198
이지와 재혼한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 이언용은 「이생송원록」에서 진짜 유유가 나타나면 탄로 날 일을 아버지가 했을 리 없다고 강변하였다. - P206
이 사건은 채응규와 춘수, 두사람이 지역의 어엿한 양반가였던 유연 집안을 상대로 벌인 사기극이라고 하기에는 그 성공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이지와 같은 조력자가 필요했거나 혹은 그들이 이지의 조력자일 수밖에 없었다. - P208
1564년 유연이 처형될 무렵 그의 부인 이씨는 친정이 있는 서울로 갔다. 남편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확신한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라진 채응규를 찾는 것이었다. - P211
많은 사람은 유연의 억울한 죽음에 동정을 보내면서 신중하게 재판을 처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지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각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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