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중앙 집권제의 전통을 가진 조선은 국왕을 제외한 여타 인물이나 계층의 영원한 권력 향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반들도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지 않는 이상 정치권력에 참여하기가 어려웠고 대대로 관직을 유지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 P298

조선의 균분 상속은 딸에 대한 차별과 아들 사이의 균분을 거쳐 적장자 우대 상속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상속 관행의 변화는 시간이 갈수록 지역과 계층에 상관없이 확대되었다. - P306

당시 조선에서는 장남이 자식 없이 죽었을 때 관습적으로 그의 부인이 총부로서 제사를 관리하고 가계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반면 법전의 규정은 그 권리를 장남의 남동생에게 부여하였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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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백씨는 채응규가 정말 남편이 맞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데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채규가 사라졌을 때 유연을 살인자로 무고하는 일에 더 적극성을 보였다. - P231

아버지의 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된 유유는 부인 백씨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지난날 백씨가 채응규를 자신으로 여겨 동생을 죽게 했다며 힐난하였다. - P231

유유의 출현은 이러한 위기로부터 그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평소 사이가 나빴던 남편의 진위보다 그의 출현 자체가 중요했을 수도 있다. 남편이 가짜일 수도 있었지만 백씨는 직접적인 판단을 미루었다. - P235

유예원의 딸은 모두 세 명으로 각각 이지, 하항, 최수인과 혼인하였다. 족보에는 이 가운데 맏딸과 사위 이지가 완전히 빠져 있다. - P238

유유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고 사건 재조사의 물꼬를 튼 윤국형은 세상일이란 실상을 알기 어려울 수가 있으므로, 자신의 자손들 가운데 옥사를 맡는 이가 있으면 이 일을 거울삼아 경계하라고 당부하였다. - P244

국가 차원에서 종법에 대한 논의는 16세기 전반 중종 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연산조의 폐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예제의 정비에 관심을 가졌다. 종법의 시행 역시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에 있었다. - P255

종법은 이를 주도한 인물이 가문별로 존재하였고, 시행 과정은 개별 가문이 처한 조건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 P258

종법이란 적장자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의 이상을 실현하고 종손에게 가계의 주요한 의례, 특히 제사의 권한과 책임을 맡기는 것이었다. - P259

1548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르티가의 농민 마르탱 게르는 아내와 아이를 남겨 두고 집을 떠났다. 유유가 가출하기 8년 전의 일이니, 두 인물은 동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마르탱 게르는 결혼 뒤 8년이 지나서야 아이를 얻을 수 있었다. - P287

돌아온 유유는 끝내 그녀와 화해하지 않았다. 자식이 없었고 양반 부인으로 재혼을 할 수도 없었던 백씨는 아마도 친정에서 받은 상속 재산으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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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르와 세크메트는 동일한 존재입니다. 강이 우리에게 줄 때는 하토르고, 주지 않을 때는 세크메트인 거죠. 젖과 생명을 주는 암소의 여신 하토르, 생명을 앗아가는 암사자의 머리를 한 세크메트.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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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업적 두 가지는 <아베스타> 경전을 만든 것과 이 경전에 입각한 세계적인 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창조입니다. - P254

일 년의 한 번은 땅이 죽습니다. 땅이 죽었다는 것은 황폐해졌다는 의미이지요. 겨울을 맞이해 황폐해진 땅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봄에는 새로운 생명으로 대지를 일깨워야 하는데, 어떻게 죽어버린 땅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인가. 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해결해야 할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 P306

사실 인신공희는 거의 모든 고대 신화에서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야말로 신에게 바칠 수 있는 희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 P308

여신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와 땅의 특성을 지닌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도 양면성이 있고 땅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또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P317

여신의 상징물 가운데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여사제가 발로 누르고 있는 달의 상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달은 물처럼 흐르는 감정을 지시합니다. - P320

‘큰물‘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홍수로 인한 그 파괴는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기초를 만드는 ‘정화‘ 작업이기도 합니다. 홍수는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 P321

페르시아신화 속의 전쟁의 신 이슈타르는 나중에 기독교에 배척당하면서 여러 악마의 형태 가운데 하나인 사탄의 원형이 됩니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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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의 재판에 대한 재조사의 필요성을 실제 제기한 인물은 정엄이었다. 1571년(선조 4) 사헌부 장령이었던 그는 유연 사건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 P167

이 사건의 극적인 전환은 다시 여러 해가 흐른 뒤에 일어났다. 살아 있는 유유를 목격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홍문관 수찬 윤국형이었다. - P171

1579년 겨울 윤국형은 선조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유유의 생존 가능성, 즉 유연 재판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 P172

채응규를 서울로 붙잡아 오는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그가 여전히 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는 비밀리에 해주 관아에 공문을 보내 채응규와 그의 첩 춘수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 P174

서울로 압송된 그녀는 세 차례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춘수가 구체적인 진술을 한 것은 신문 관원들이 점차 이지에게 혐의를 두고 그녀를 압박하면서였다. - P178

유씨 집안의 상속에서 채응규나 춘수가 간여할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백씨가 춘수의 아들 정백을 유유의 서자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 P181

춘수의 공초에는 이지가 채응규에게 "네 스스로 유유라 하고, 나도 유유라 한다면 그 누가 분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 P183

이지는 결국 신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당시의 판결은 이지가 채응규를 내세워 유연을 죽음으로 몰았던, 다시 말해 그를 사건의 주모자로 보았다. 춘수의 진술을 대체로 인정한 판결이었다. - P185

이지의 재판은 진짜 유유가 살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또한 심통원의 축출과 사림의 전면적인 등장이라는 정치 상황의 변화로 인해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 P188

이지는 처가의 상속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인 유씨와 사별하였는데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 만일 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혹은 외조부 유예원에게 극진하게 대했다면 별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 P198

이지와 재혼한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 이언용은 「이생송원록」에서 진짜 유유가 나타나면 탄로 날 일을 아버지가 했을 리 없다고 강변하였다. - P206

이 사건은 채응규와 춘수, 두사람이 지역의 어엿한 양반가였던 유연 집안을 상대로 벌인 사기극이라고 하기에는 그 성공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이지와 같은 조력자가 필요했거나 혹은 그들이 이지의 조력자일 수밖에 없었다. - P208

1564년 유연이 처형될 무렵 그의 부인 이씨는 친정이 있는 서울로 갔다. 남편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확신한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라진 채응규를 찾는 것이었다. - P211

많은 사람은 유연의 억울한 죽음에 동정을 보내면서 신중하게 재판을 처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지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각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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