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어원은 ‘살리마‘로 ‘자신을 완전히 바치다‘, ‘항복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대상은 알라다. 무슬림은 이슬람의 분사형으로서 항복의 행위를 취하는 사람을 뜻한다. 인간이 자기의 모든 존재를 알라에게 전적으로 맡김으로써 참되고 순수한 평화를 발견하는 내적인 태도, 이것이 바로 무슬림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 한마디로 이슬람(Islam)은 종교고, 무슬림(Muslim)은 사람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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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복잡한 시기에 두각을 드러낸 도시가 앗슈르다. 앗슈르 신을 섬기는 이 도시국가는 티그리스강을 건너는 요지에 위치했다. 자연스레 앗슈르는 교역으로 번성했다. - P133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 앗슈르의 샴쉬-아다드 1세를 이어 바빌론의 함무라피(Hammurapi)는 기원전 2천 년대 전반기의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했다. 사유화가 시작되고 희년이 선포되었다. 바빌론의 안정기에 수메르-아카드 문학은 황금기를 누렸다. - P143

함무라피는 재위 말년인 39년에 ‘함무라피 법전‘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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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전은 이스라엘의 율법은 물론 고대근동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실제로 법률로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는 학자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빠진 영역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P147

핫투쉴리가 자신의 위업을 자랑하며 남긴 문헌은 역사상 최초로 전차를 언급한다. 그래서 히타이트가 역사상 최초로 전차를 사용했다는 견해가 있다. - P130

기원전 2천년대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의 사람들은 가장 높은 신 엔릴과 그의 명을 받아 실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다드를 섬겼을 것이다. 최종결정권은 엔릴에게 있었지만 평범한 인간사의 길흉화복은 하다드로 체험되었다. 그가 비와 바람을 통제하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 P155

하다드는 시리아 출신이었는데 이미 기원전 3천 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신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고대근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왜 그토록 선호되었을까? 건조한 이 지역에서 비와 바람을 뿌리는 그의 능력이 긴요했기 때문이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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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들은 영리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 게 아녜요. 위험천만한 광신자들이라고요. - P402

"왜 내가 여전히 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왜냐하면 레즈비언이나 게이 팀원이 포함된 모든 프로젝트가 왜 하나도 빠짐없이 시드니 연구소 밖에 있는 부서로 전출되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 문이야. 그게 순전히 우연인지, 아니면 우연이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 었던 거지." - P411

마틴 입장에서 마르디 그라 축제에 참가한다는 행위는, 누가 보아도 동성애자이지만 그 사실을 아예 감추지 않는 탓에 편협한 차별 행위에 더 자주 직면해야 했던 게이 남성들에 대한 연대감의 표명인 것이다. - P427

나는 수술실 천장에 줄지어 매달려 있는 수술실 전등의 먼지로 뒤덮인 등갓을 내려다보고 있다. 금속 등갓의 회색 페인트 칠이 된 표면에는 깔끔한 손 글씨가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스티커는 누르스름하게 변색했고 글씨도 조금 희미해진 데다가 한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지만 말이다. 스티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체외 이탈 경험을 하셨다면 137-4597로 전화하십시오. - P441

침착하게 나의 기이한 시점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기 몸밖으로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은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겪는 현상이라고 들었지만... - P442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아래쪽에 누워 있는 나의 후두가 떨리고 입술과 혀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저 몸 위에서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감각은 여전히 확고하게 남아 있다. - P449

언젠가는 머리에 총을 맞게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돈을 과도하게 벌었고 운도 과도할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늦든 빠르든 인생의 균형추가 움직이면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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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젤라가 자기 자신이 찌부러질 경우-최대한 완만하게 진행되겠지만, 마지막에 가서 압사할 것이 거의 확실한-의 이점에 관해 고찰하고 있었을 때, 전령이 그녀의 전용 홈스케이프에 출현했다. - P309

내가 여기 온 건 자네들의 동기를 음미하기 위해서지. 자네들의 기계를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거든."
"우리 동기라고요?" 기젤라는 혹시 번역 오류가 난 것이 아닌지 의아해했다. "우린 시공의 구조에 관해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동기가 아니라면, 블랙홀에 다이빙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 P334

폭발은 몇백 미터나 떨어진 건물들의 창문까지 박살 냈지만, 화재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중에 매쿼리대학의 지진계에도 이 폭발의 충격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폭발 시각은 정확히 오전 3시 52분이었다. - P377

"계속해 줘. 이제 넌 갈색 눈이나 검은색 머리, 또는 왼쪽 오금에 점이 있는 걸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게이인 걸 딱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거잖아."
나는 항변했다. "맞는 말이잖아. 왜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걸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거지? 난 그게 자랑스럽지도 않고, 창피하지도 않아. 난 단지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야.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가장행렬 따위에 참가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 P389

연구소가 폭파된 지 나흘째 되는 날, 새로운 실마리를 찾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재닛 랜싱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연구 프로젝트의 유전자조작 세포계 백업 샘플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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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곤이 등장했다. 기원전 24세기였다. 그는 아카드제국을 세워 뛰어난 무력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일했다. 동서남북의 다양한 민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 P61

이 이야기에서 사르곤을 모세로, 이쉬타르를 야훼로 바꾸면 구약성경의 모세 이야기와 병행하는 점이 퍽 많다. - P64

사르곤과 나람-신은 강력한 군주의 모델로서 후대의 여러 이야기에 등장한다. 이 둘은 영웅의 원형이다. 때로는 위대한 영웅으로 때로는 교만한 자의 모습을 오간다. - P67

우르는 남부의 수메르인들을 규합해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이른바 ‘우르 제3왕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원전 22세기였다. 전쟁보다는 외교가 중시되었다. 문(文)의 시대가 열렸다. 함무라피 법전보다 더 이른 ‘인류 최초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이 선포되었다. - P74

아카드적인 것이 대체로 실용적이며 호전적이고 현세적인 북부의 경향을, 반대로 수메르적인 것이 원칙적이며 지혜롭고 종교적인 남부의 경향을 띤다는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경향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계속해서 병행하며 드러난다. - P78

고대 이집트와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4천 년대에 문명이 시작되었지만 서로 퍽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고대 이집트의 자연, 사회, 종교, 이념, 문화, 역사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강력하고 우월한 하나의 중심이 대비되는 두 세계를 통합한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면 유리할 것이다. - P85

상이집트는 전통적이고 소박한 문화가, 하이집트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문화가 피어났다. 메소포타미아와 비교하면 남북의 경향성이 뒤바뀐 것이 흥미롭다. - P87

마아트는 삼라만상의 근본적 원리요 상지(智)였고, 파라오는 마아트가 체현된 인격이었다. 파라오는 ‘짐이 곧 국가‘라는 중세 유럽의 절대왕권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우월했다. 파라오는 최고의 인간이자 최고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 P89

이집트는 외국에 원하는 것이 없는 나라였다. 국경을 확장해 더 많이 더 넓게 다스려야 한다는 의지 자체가 희박했다. 오직 자신의 풍요로운 중앙을 방어하기 위한 계획, 곧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단조로운 논리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고대 이집트는 마아트를 따라 스스로 만족해 지속된 문명이다. - P94

가장 큰 피라미드는 모두 고왕국에서 나왔다. 세번의 중간기는 물론이고 중왕국과 신왕국에도 고왕국의 것만큼 큰 피라미드는 건설되지 않았다. 특히 4왕조는 ‘열렬히‘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었다. 이후로 그런 왕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P106

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우나스부터 피라미드 내부에 문서가 새겨지기 시작한다. ‘피라미드 텍스트‘의 시작이었다. 대개는 "죽은 왕의 안녕을 보증하고, 신들 가운데서 그에게 부여된 지위를 차지하도록 돕는 종교적 문서이며 주술이다." - P120

이제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서 고왕국 시기 정도 규모의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언어도 종교도 체제도 그대로 유지되지만, 조금 다른 성격의 나라가 출현할 것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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