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으로 들어선 영호충은 주위를 흘끔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어마어마하게 긴 전각이군!‘ 폭은 30자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깊이는 300자는 됨직해 보였다. 전각 끝에는 높다란 단을 설치해 의자를 놓았고, 그 위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동방불패였다. - P25
바로 그때, 그들 뒤에서 누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방 형제, 정말로 자네가 나를 잡아오라고 했나?" 나이 지긋한 목소리였지만 공력이 잔뜩 실려 있어, 그 한마디는 널찍한 전각 안에서 한참 동안 메아리쳤다. 당당하고 용맹한 태도로 보아 나타난 사람은 바로 풍뢰당 당주라는 동백웅이 분명했다. - P27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녔다는 동방불패가 고작 힘 빠진 동전 하나를 피하지 못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었다. 임아행이 껄껄 웃으며 외쳤다. "저 동방불패는 가짜다!" - P35
진짜 동방불패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세상을 뒤덮을 무공과 기지를 지닌 그가 양연정이 가짜를 내세워 권세를 농단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동방불패가 이미 죽은 이상, 양연정과 겁쟁이 가짜 따위를 괴롭히는 일은 임아행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P40
그때 안방에서 교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 아우, 누구를 데려왔어?" 어조는 높고 뾰족했지만 목소리가 굵어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했다. 그 괴상한 목소리를 듣자 일행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양연정이 대답했다. "옛 친구들이 당신을 꼭 만나야겠다기에 데려왔소." 안방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 "무엇 하러 여기까지 데려왔어? 여긴 당신만 올 수 있는 곳이란 말이야. 당신 말고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분명히 여자들이 응석을 부릴 때 쓰는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의심할 바 없는 남자였다. - P44
꽃과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방 안에는 연지분 냄새가 진동했다. 주렴 한쪽에 놓인 화장대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는데, 화사한 분홍색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수틀을 다른 한손에는 수침을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이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일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표정도 임아행 일행의 이상야릇한 표정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영호충을 제외하면, 모두들 그가 일월신교의 교주 자리를 찬탈하고 10여 년 동안 천하제일의 고수라 불려온 동방불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동방불패가 수염을 깎고, 얼굴에 연지분을 덕지덕지 바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옷은 빛깔이 몹시 선명해 영영이 입어도 너무 요염하고 자극적일 것 같았다. - P45
영호충은 물론이고 견문이 넓은 임아행조차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상황이었다. 남자가 남자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일월신교의 지존인 동방불패가 여장을 하고 첩 노릇을 자처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했다. 양연정은 지아비라도 되는 양 위세를 부리고 동방불패는 현숙하고 순종적인 아내처럼 구는 것을 보자 일행은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P47
임아행과 상문천도 사태가 위급한 것을 보고 각각 검과 연편을 휘두르며 협공을 퍼부었다. 당세의 3대 고수가 나섰으니 그 위력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만큼 어마어마했지만, 동방불패의 두 손가락에 쥐어진 수침은 패색조차 없이 세 사람 사이를 번개처럼 오갔다. 상관운이 칼을 뽑아 뛰어들자 싸움은 4대 1이 되었다. - P56
‘이 《규화보전》의 요결에는 신공을 연성하려면 스스로 양물을 자르고 영단을 복용하여 안팎을 두루 통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노부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무엇 때문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느냐? 으하하하!! - P63
"영호충이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악불군은 옆으로 비켜서며 쌀쌀하게 말했다. "영호 장문께서 어찌 이리 과한 예를 차리시오? 남들이 보면 웃지 않겠소?" 영호충은 그래도 꿋꿋이 절을 끝내고 일어서서 옆으로 비켰다. 악부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항산파의 장문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앞으로 행동을 삼가고 조심한다면 편히 살 날이 올 거야." - P97
좌냉선이 외쳤다. "우리 오악검파는 한 뿌리고, 100여 년 동안 결맹을 맺어 이미 한집안이나 다름이 없소. 이 몸이 오악검파의 맹주가 된 지도 벌써 몇 년이지났소. 한데 최근 무림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 오악검파를 위협하기에, 이 몸은 오악검파의 선배들과 상의하여 문파를 하나로 병합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훗날 큰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소." 그때 누군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맹주께서는 대체 어느 문파의 선배들과 상의하셨소? 이 몸은 들은 적이 없소." 바로 형산파 장문인 막대 선생이었다. 형산파는 합병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하지 - P106
영호충은 의아해하며 악영산 옆에 선 임평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저건 무슨 표정이지? 누군가 저런 표정 지은 걸 본 것 같은데…. 어디선가 본 듯한 표정이었지만 떠오를 듯 떠오를 듯하면서도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 P119
영호충은 고개를 저었다. "항산파는 혼자가 아니오. 화산파 장문인이신 악 선생은 이 몸에게 절기를 전수해주신 은사시오. 지금은 다른 문파에 몸을 담고 있으나 은사의 가르침을 잊지는 않았소." "화산파악 선생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이오?" "그렇소. 우리 항산파는 화산파와 손을 잡고 한마음으로 움직일 것이오." - P131
영호충은 그제야 깨닫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하에 받아주시겠다는 말씀이 화산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었구나. 오악검파가 합병하면 사부님, 사모님과 한 문파가 된다는 의미였어‘ - P137
도지선이 그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어이, 좌냉선. 옥기자에게 황금과 미녀를 주며 장문인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해놓고 왜 팔다리를 자르는 거야?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여 없애려는 거지?" 도근선도 끼어들었다. "우리가 옥기자를 네 갈래로 찢을까 봐 제 딴에는 돕겠다고 그런 모양인데, 우리를 완전히 오해한 거야." "혼자 온갖 똑똑한 척을 다 하더니… 참 딱한 사람이라니까. 우리는 말이야, 그저 장난이나 칠까 하고 옥기자를 붙잡았던 것뿐이야. 오늘은 오악파가 새로 선 경사스러운 날인데 무슨 배짱으로 살풍경하게 사람을 죽이겠어?" - P163
악영산이 검법을 펼치는 순간, 그는 단번에 화산 사과 안쪽 동굴의 벽에 새겨진 태산파 검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사과애에서 벽화를 발견한 뒤로 그는 화산파의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사과애를 떠날 때 안쪽 동굴 입구를 꼼꼼히 가려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악영산은 대체 어떻게 그 동굴을 발견했을까? - P190
‘임 사제와 소사매는 한창 깨가 쏟아져야 할 신혼인데 어째서 저렇게 울적한 표정일까? 소사매가 사부님께 뺨을 맞았는데도 달려가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무관심하게 눈길조차 주지 않다니, 남편이라는 사람이 정말 인정머리가 없구나.‘ - P199
수십 초가 지나도록 악불군의 방어가 흐트러질 것 같지 않자, 좌냉선은 독이 퍼질 것이 염려되어 더욱더 힘차고 빠르게 검을 놀렸다. 악불군은 허둥지둥 오른쪽 왼쪽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쉽사리 막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그의 검법이 싹 바뀌었다. 검날이 늘어났나 싶게 쭉 뻗어나가다가 별안간 휙 거두어지는 등 신출귀몰하게 움직였고 초식은 여태 누구도 본 적이 없을 만큼 기괴했다. - P241
지금 사부가 쓰는 초식은 바로 지난번 동방불패가 수침으로 그들과 싸울 때 펼쳤던 무공이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지독한 통증도 까맣게 잊고 벌떡 일어났다. - P243
영호충은 희미해져가는 사부의 뒷모습과 각 문파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뒤에서 분에 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군자!" 영호충은 몸을 움찔했다. 상처의 통증이 견디기 힘을 정도로 그의 몸을 짓눌렀다. ‘위군자‘라는 단어가 묵직한 망치라도 된 양 그의 가슴을 힘차게 내리치는 것 같아 숨이 턱턱 막혔다. - P253
단 1초에 여창해를 제압한 임평지의 초식은 악불군이 좌냉선과 싸울 때 쓴 초식을 쏙 빼닮았고 방법도 똑같았다. 영호충은 흠칫 놀라며 영영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나지막이 외쳤다. "동방불패!" 그들의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당황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확실히 임평지의 초식은 동방불패가 흑목애에서 사용했던 무공이었다. - P264
"그 검보를 보았을 때는 이미 당신과의 혼사가 정해진 후였소. 혼례를 올리고 당신과 진정한 부부가 된 다음 검법을 익히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 검보의 초식은..… 무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항거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소. 그래서 결국・・・ 결국・・・ 내 손으로 거세를 하고 연검을 시작했소…." - P341
임평지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벽사검보>의 첫번째 요결은 바로 ‘무림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자는 검을 들어 생식기를 잘라낼지어다‘였소."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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