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커버롤을 벗어 수행원에게 넘겨주었다. 다닐과 지스카드도 커버롤을 벗었다. 그러자 수행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스카드에게 꽂혔다. 글래디아는 불안감을 억누르기라도 하려는 듯 신경질적으로 콧구멍에 필터를 틀어막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토록 많은 단명한 인종들 앞에 서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단명한 것은 체내에 만성질환의 병균과 수많은 기생생물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귀가따갑도록 들어온 터였다. - P257
"그러면 마담 글래디아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글래디아는 불빛이 자신에게 옮겨지자 가슴 속으로부터 심한 공포의 전율을 느꼈다. 귓전에는 아우성치는 환호성이 정신없이 웅웅 울려댔다. 옆에 서 있는 DG도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평화를 원하지요? 마담은 입법부 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장황한 연설이 아니에요. 대강 인삿말만 하고 자리에 앉으셔도 되는 겁니다." - P264
"괜찮으시다면 그대로 서 계시겠어요, 마담? 제가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은 나이를 이야기할 때 어떤 식으로 따지시나요? 태어난 이후 살아온 해수를 계산하시나요?" - P270
"인생의 길이를 자신이 겪는 사건과 행위, 성취와 흥분의 양으로 측정한다면 저는 여러분 그 누구보다도 어립니다. 가히 어린아이라 할수 있을 정도지요. 내가 살아온 기간의 대부분은 단지 지루하고 권태로운 시간의 연속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 중 그 누구도 저보다는 많은 흥분과 즐거움을 누렸을 것입니다. 자, 마담 램비드! 다시 한번 당신의 나이를 제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램비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충실한 쉰네 살입니다, 마담 글래디아."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 P272
그녀는 나무나 풀 같은 수동적인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지나치게 잘 정돈된 사회와 간섭에 가까울 정도로 시중을 드는 로봇으로 인한 불행한 생활에 대해서 주절주절 호소했습니다. 얼마나 그 생활이 혐오스러운 건지 엄살을 떨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행성에 무슨 위험이 있습니까? 무슨 재앙이 있다고 두 로봇까지 대동하고 왔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환영하는 이 자리에까지 그 로봇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지금 그 로봇들은 연단 위에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이제 실내에 불이 들어와서 여러분들도 그들의 모습을 쉽게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나는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 다닐 올리버이고, 다른 하나는 쇳덩어리로 된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R. 지스카드 레벤트로프입니다. 친애하는 베일리 행성의 시민 여러분! 그들을 환영합시다. 그들이야말로 이 여자와 피를 나눈 친척 아닙니까?" - P277
"약 160년 전 바로 이 행성에서 일라이저 베일리가 죽어갈 때 그의 임종을 지킨 것은 그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도 아니었지요." . . . "이 행성에 착륙해서 일라이저의 마지막 유언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다닐 그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다닐이 여러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나요?" 그녀는 주먹을 하늘로 치켜 흔들었고, 목소리도 한 옥타브쯤 높였다. - P279
"다닐과 지스카드는 이 세계의 영광된 이름입니다. 일라이저 베일리의 뜻을 따라 그 이름은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타고 온 우주선의 선장은 다닐 지스카드 베일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 저와 얼굴을 마주하고 계신, 그리고 하이퍼비전을 보고 계신 분들 중에도 수많은 다닐과 지스카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뒤에 서 있는 이 로봇들이 바로 그 이름을 가진 로봇들입니다. 왜 이들이 토마스 비스터반 씨에게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 P280
"이 두 로봇들은 결코 일라이저 베일리를 잊지 못합니다. 제가 그를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요. 그들의 기억 속에는 지난 세월이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그대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제가 베일리 선장의 우주선에 동승하게 되었을 때, 어쩌면 베일리 행성을 방문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다닐과 지스카드를 데리고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라이저 베일리로 인해 탄생되었고 그가 말년을 보냈던 이 행성을 이들이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데요. 그렇습니다. 이들은 로봇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라이저 베일리에 게 충직하게 봉사했던 지능을 가진 로봇들이지요. 저는 지능과 지성을 가진 모든 존재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 P280
글래디아는 그런 청중들의 모습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함과 환호성이 끝없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는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평생 이런 순간을 기다려온 듯한 기분이었다. 고독에 익숙하도록 교육받은 이백삼십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나, 군중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게 된 이 순간을… - P281
"그게 왜 나쁜 결과였다는 거지요? 사람들은 모두 만족해했는데?" "도가 지나칠 정도로 만족했지요, 마담, 우리는 당신이 귀여운 우주인 영웅이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시기상조의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냉각시켜주길 바란 겁니다. ‘장수‘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발휘한 편이었습니다. 단명한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로봇에 갈채를 보내게 만든 점입니다. 그건 우리가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 우주인과 혈연관계라는 생각을 품는 건 좋지 않습니다." "시기상조의 전쟁도 원하지 않지만 시기상조의 평화도 원치 않는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마담." - P286
다닐, 나는 사람이 아니야. 복잡하고 모순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정신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반응하는 메카니즘은 잘 몰라. 하지만 개인보다는 군중들이 훨씬 더 조작하기 쉽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지. - P290
노인의 눈이 다닐을 알아차리자 그의 창백하고 말라 비틀어진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실렸다. "다닐, 내 옛 친구…." 그의 말소리는 희미했지만 분명히 일라이저 베일리의 음성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트 아래쪽에서 팔 하나가 빠져나왔다. 그것은 자신이 일라이저임을 확신시키려는 동작이었으리라. "파트너 일라이저!" "고맙네.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파트너 일라이저." - P296
내가 염려하는것은 자네에게 미칠 영향이야. 자네는… 항상 자네가 주장하고 내가 반박하듯이 로봇 아닌가. 오랜 옛날부터 자네는 내가 죽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임무로 삼아왔어.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까봐…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자넬 부른 거야. - P298
"각 개인의 업적은 인류 전체에 공헌하는 것이고, 그것은 전체의 일부로 영원히 살아남게 되는 거야. 그 전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까지 수만 년에 걸쳐 짜여질 하나의 거대한 직물(織物)을 이루지. 그 직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정교해지고 아름다워져. 우주인들도 그 직물의 일부에 아름다움을 새겨넣을 수 있지. 개인의 삶은 그 거대한 직물의 날실과 같은 거야. 그 어마어마한 전체에 비한다면 한 가닥의 실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어? 다닐, 자네는 그 직물 전체에 관심을 가져야 해. 한 가닥의 실이 끊어진다 해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구. 거기에는 무수한 많은 씨줄, 날줄들이 있어. 하나 하나가 모두 큰 몫을 하고 있는…" - P298
"오로라가 메시지를 보냈더군. 지구를 경유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에게 보낸 거야." "그들에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모양이군요. 어떤 얘깁니까?" "솔라리아 여인을 다시 돌려달라는 거야." - P309
우리에게는 세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봇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손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빠른 세대교체입니다. 그것이 지속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지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뿌리이자 핵인 지구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P320
"지스카드, 자네는 마담이 자네나 나 없이 귀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불가능하지. 그렇다고 오로라 의회가 자네나 나를 필요로 할 리가 있겠나?" "나라면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 몰라. 하지만 자네는 달라. 자네는 인간의 마음을 직접 느낄 수 있잖나."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을 몰라." "우리가 오로라를 떠난 이후 그들이 사실을 알아냈을 가능성도 있지. 그래서 자네가 오로라를 떠나도록 허용했던 걸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 P325
사실 오로라인들 사이에서 그녀는 반역자일 뿐이다. 이런 대단한 환영행사 자체가 훌륭한 증거 아닌가?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그녀에겐 평화와 화해를 정착시켜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길이라면 기꺼이 걸어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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