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초입이었다. 이슥한 밤거리에 서 있자니 안개 알갱이가 딱딱한 가루처럼 뺨과 귓불을 때렸다. 나는 가정교사로 가르치는 프랑스어의 초급 교재를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고 추위에 맞서 몸을 웅크린 채 교외로 나가는 막차 버스가 안개 속에서 배처럼 흔들리며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P150
절대로 이름을 알려 주어서는 안 된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째서 나는 선생을 따라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이대로 피로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선생의 의지대로 끌려가 버린다면 내가 받은 굴욕을 온 천하에 광고하고 선전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 P168
외국 군인을 태운 지프 한 대가 새벽안개를 헤치고 달려오고 있었다. 올가미에 걸린 새의 날개를 철사에 둥글게 꿰어서 어깨에 메고 산골짜기 외딴곳의 자기 사냥터를 돌아보던 소년은 숨을 죽이고 한동안 지프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 P174
"거짓말하지 마. 내가 속을 줄 알고?" 통역이 막말을 했다. "군대의 물건을 훔친 자식은 총살당해도 하는 수 없어. 그래도 좋단 말이지?" - P182
오늘은 내 생일이다.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세븐틴이다. 가족이라는 아버지, 엄마, 형 모두 오늘이 내 생일이란 걸 모르거나 혹은 모른척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잠자코 있었다. - P192
나는 신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심정으로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얼굴색이 푸르죽죽했다. 이것은 상습적으로 자위를 하는 자의 얼굴색이다. - P196
내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이 짧은 생 다음에 몇억 년도 더 무의식의 제로 상태로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 이 우주, 그리고 또 다른 우주가 몇억년이고 존재하는데 나는 그동안 죽제로 상태다. 영원히 나는 사후의 무한한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공포에 질려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 P211
내가 성실하게 죽을힘을 다해서 꼴사나운 800미터 달리기를 마치고 받은 대접은 이렇게 심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초라하고 꼴사나운 세븐틴이라고는 하지만 타인의 세계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정말 부당했다. 나에게 너무 심한 짓을 한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타인들의 현실 세계에서 선의를 찾아내기 위해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 P229
나는 사심을 살육한 순간, 나 개인을 지하 감옥에 가둔 순간 새롭게 불안을 모르는 천황의 아들로 태어나며 한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천황 폐하가 선택해 주시기 때문이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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