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끝내기 전에 설명해야 할 공동체적 트라우마가 한 가지 더 있다. 이는 우리가 현재 유대교와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기원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였는데, 모든 형태의 유대교는 이 둘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추었다. - P258

예루살렘 파괴는 단순한 하나의 재앙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로마 이데올로기에서 사실상 로마에 대적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전형적인 파괴를 보여주는 신화적 사건이됐다. - P262

하드리안(Hadrian) 황제는 군단을 보내어 바르 코흐바의 군대를 쓸어버렸고, 예루살렘 내부에, 이전에 유대 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이교도 신전을 세웠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금지되는 죽음의 고통을 겪었다. 할례, 안식일, 토라 낭독은 수년동안 금지됐다. - P264

로마인들은 요나단 벤 자카이를 상당히 좋아했기에, 그가 야브네에 랍비 학교를 세워 유대교 율법의 다양한 문제에 관한 여러 규정을 논의하고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 - P267

이런 신흥 랍비 학교는 성전을 상실하고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성전 이후의 유대교 형태를 발전시켰다. 여기서 랍비들은 바빌로니아 포로기에 조상들에 의해 시작됐던 종교적 혁명을 계속해서 확장했다. - P268

유대인들은 유일신론적 종교관습을 지속하는 것이 허용됐고, 유대교는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합법화된 무신론"의 형태가 됐다.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불법이었을) 규범적으로 요구되는 황제에 대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대신에 황제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 허용됐다. 이러한 여러 특권에 대한단 하나의 조건은 이것이었다. 곧, 유대인들은 그러한 "무신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선교적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 됐다" - P273

예수 유대교는 로마의 관점에서 볼 때 특별히 악독한 형태의 유대교를 대표했다. 유대교의 다른 형태들과는 달리 예수 운동은 이방인들을 이전의 신에 대한 숭배로부터 전향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 P275

타키투스의 논평들은 반-로마 폭동 선동가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당한 인물을 따라 설립되고 칭해졌던 이 예수 유대교를 "치명적인 미신"으로 간주하는 로마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 P275

전통에 따르면 복음서는 예수 생애의 목격자들, 사도들, 동료들—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해 쓰였다. 그러나 한 세기 이전에 성서학자들은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이 복음서들이 분명한 초기 전통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더 후대의, 사도 이후 교회의 관점으로부터 예수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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