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CD 재킷에는 동명의 뭉크 그림이 인쇄되어 있다. 부둥켜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벌거숭이 소녀와 해골 사나이. 소녀의 살결은 환한 핑크빛이다. - P79

사실 간질 발작으로 죽는 경우는 흔치 않아. 하지만 어머니는 그 흔치 않은 경우 중 하나를 직접 겪으신 탓에 극도로 예민하셨지. 나를 볼 때마다 방에서 혼자 꺽꺽거리다 죽어간 남편이, 그동안 짊어져야 했던 죄책감이 떠올랐을 거야. - P85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나? 두려움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거야. 그래서 난 의대로 진학했지.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치고 어쩌고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무관하게, 단지 사람들이 얼마나 유약하고 죽음에 가까운 존재인지 곁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 P88

꽤 비중 있는 역을 따냈나 봐. 산장에 모인 사람들이 한 명씩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스토리인데, 거기서 두번째로 죽는 여자를 맡았다. - P91

인생이란 게 서너 번쯤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면 좋을 텐데, 딱 한 번뿐이라는건… 부조리해.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또 당신에게도 안 그래? - P91

나는 그 애의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어. 나에게는 고통의 척도라는 게 없었거든. 죽음을 유일신으로 모신 이후 고통의 무게마저 마냥 축소해왔으니까. 막연히 동생은 이겨낼 거라고만 생각했어. - P93

시간과 노력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여된 소비재 아닙니까. 제 갈망을 위해 얼마든지 투자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비례, 뿌린 만큼 거두는 것. 얼마나 깔끔합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잖아요. - P99

나비문신과 마주친 이후 제 마음속에 다시 지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스무 살의 전도유망한 법대생이 놓친 가능성들이, 이제는 깨끗이 떨쳤다고 생각한 미련과 회한이, 한을 품은 원귀들처럼 뛰쳐나와 아우성을 치더군요. - P112

이런 말이 있죠. 복수란 개한테 물렸다고 개를 무는 것과 같다. 제겐 이 말이 반어적인 교훈이 아니라 직설적인 행동 지침으로 들리더군요. 그래요, 저는 놈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광견병이 옮았으니, 저도 미친개가 되어 물어뜯는 수밖에요. - P115

의뢰를 받으면 먼저 그럴듯한 사연을 하나 만들지. 물론 사연에 맞게 내 인생도 전부 새로 짜야하고,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표적을 미행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내내 그 가짜 인생에 온전히 감정이입을 하는 거야. 나의 철천지원수를 쫓고 있다고 말하자면 일을 하나 맡을 때마다 새로운 내가 하나씩 태어나는 셈이지. - P127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벌름거린답니다. 거실에 퍼질러 앉아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왜 손을 놓으면 아이도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아갈 거라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지요. 당시 전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 P144

드디어 뿌리 깊은 내 불운의 비밀이 밝혀진 셈이야. 나의 사주도, 나의 이름도, 나의 별자리도 모두 죽은 형의 껍데기였어. 이유식 맛도 못 보고 골로 간 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인생 잘 풀릴 턱이 있겠어?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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