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앤이 마치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베레스포드에 있는 내 아파트가 그냥 놀게 될 것 같은데, 당신이 쓰는 게 어때요? "아, 그럴 수는 없어요, 앤." "왜요?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쓴 말은 절반만 옳아요. 거긴 방이 많고도 많아요. 내가 1년 동안 빌려줄게요. 내 나름대로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해요." - P457
세월은 마음에 술수를 부리는 재주가 있다. 과거를 돌아보다 보면 동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1년 동안 쭉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계절 전체가 단 하룻밤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 P468
"그러니까 그 팅커라는 친구는………." 디키가 말했다. 자신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학비를 탕진해버리는 바람에 사립학교에서 쫓겨났고, 취직해서 일을 하다가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그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그 친구를 꾀어 뉴욕으로 오게 했다는 거지? 너와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우연히 만났고, 그리고 그 친구는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도 우유배달 트럭에 부딪혀 망가진 네 친구를 택했고, 나중에 네 친구가 팅커라는 친구를 찼어. 그리고 팅커의 형도 그 친구를 차다시피 했고……………." - P474
지금까지 함께 했던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디키는 초자연적으로 보일 만큼 초연한 태도로 물었다. 넌 아직 그 친구한테 빠져있어? ‘말하지 마, 케이티 제발 부탁이니까, 인정하지 마. 얼른 일어나서 이 무모한 장난꾸러기한테 키스해. 디키가 다시는 이 말을 꺼내지 않게 확신을 심어줘.‘ "응" 내가 말했다. - P473
내가 상당히 비참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디키가 내 무릎을 토닥거렸다. "우리가 자신과 완벽히 맞는 사람하고만 사랑에 빠진다면, 애당초 사랑을 둘러싸고 그런 소동이 벌어지지도 않을 거야." 그가 말했다. - P477
"잘 있었어요?" 운나는 그의 뒤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듣고 그가 몸을 돌려 일어섰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또 틀렸음을 깨달았다. 검은 스웨터를 입고, 수염을 깨끗이 깎고,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팅커는 풀 죽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케이티!" 그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다가 멈칫했다. 자신이 친구로서 나와 포옹할 권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 P480
그러다가 중간에 내가 도대체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한 건지 팅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팅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내가 주로 생각하는 건 앞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에요.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한 후회와 혹시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요.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와 지금 내게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도 괴롭고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동시에 원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아주 지쳐버렸어요. 그래서 이번만은 그냥 시험 삼아 현재만 생각해보려고 해요." - P487
"잘 지내던가요?" 내가 물었다. "그게 말이지, 조금 추레했어. 살도 조금 빠졌고." "그게 아니라, 잘 지내더냐고요." 행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정신적인 걸 묻는 거로군." 행크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어." - 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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