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경찰관이 유치장으로 통하는강철 문을 열어주었다. 유치장 안에서는 곰팡이와 암모니아 냄새가났다. 이브는 침상 위에 담요도 없이 헝겊인형처럼 늘어져 있었다. 짧은 검은색 원피스 위에 내 신여성 재킷을 입은 차림이었다. 사고가 나던 날 이브가 입었던 바로 그 옷. - P339
"팅커가 청혼했어." "정말 근사하다, 이브, 축하해." 이브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거 무슨 농담이야? 세상에, 케이티 난 거절했어." - P345
딸이 죽으면 엄마는 딸이 결코 누릴수 없게 된 미래를 생각하며 슬퍼하지만 딸과의 그 친밀했던 추억속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딸이 부모에게서 달아났을 때는 그런 다정한 추억들이 잠들어버리고, 멀쩡히 잘 살아 있는 딸의미래도 해변에서 물러가는 파도처럼 엄마에게서 물러나버린다. - P353
내게 전화를 걸어온 팅커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기가 죽은 목소리인 건 확실했지만, 고르고 편안했다. 거의 부럽기까지 한,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안도감임을 조금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 P356
이브의 장래를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우정을 그대로 간직한 오랜 친구인 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옳은 짐작일 수도 있었다. 팅커에게는 두 사람의 관계가 1월 3일에 다시 맞춰져 있어서, 지난 반년 동안의 일은 영화의 형편없는 장면처럼 싹둑 잘려나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66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내 말에 팅커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가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좋아요. 우리가 트리니티 교회 맞은편의 그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날 기억하죠?" "네…………" "내가 당신 뒤를 따라 들어간 거예요." - P370
"저기요." 내가 말했다. "왜요?" 빗시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칸막이 좌석을 가리켰다. "저기 팅커가 자기 대모랑 같이 있어요. 저 사람들한테 내가 여기있는 걸 들키기 싫어요." 빗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빗시의 팔을 잡고 커튼 뒤로 잡아당겼다. "앤 그랜딘을 말하는 거예요?" 빗시가 물었다. "맞아요!" "팅커가 저 여자의 담당 은행원 아니에요?" - P382
내가 앤의 소환장을 당연히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소환장은 굴욕적인 결말을 가져온다. 앤은 똑똑하고 의지가 강한 여성이므로, 그녀의 소환장은 특히 불신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게다가 내가 당연히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꼴이라니! 나를 어린 여자로만 취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 P406
팅커는 멀어져가는 그녀를 지켜보더니 천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의지력을 동원해서 힘겹게 시선을 옮기는 사람 같았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사람처럼 피부가 잿빛으로 변하고, 눈주위가 퀭한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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