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그래서 투명해 보이는 손으로 그 서책의 책장을 가늘게 찢어 입안에 넣고는, 그 책장으로 제 몸을 살찌우려는 듯이 호물호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 P877

「서둘러라! 서둘지 않으면 저 영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먹어 치우겠다!」
사부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 먹어 치우고는 죽을 테지요.」
사부님과 합류하면서 나는 심술을 부렸다.
「저 영감탱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붙어 있는 독약을 먹고 있으니 지금 먹은 양으로도 영감은 명재경각(命在傾刻)이다. 문제는 서책이야. 서책을 찾아야 해!」 - P881

서책에 맞은 등잔은 공중을 날아가 서안 위에 펼쳐져 있던 다른 서책들 위로 떨어졌다. 기름이 엎질러지면서 불길은 곧 양피지 위로 번졌다. 양피지는 흡사 잘 마른 낙엽 같았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장서관의 고서는 수세기 동안 불길을 기다리고 있다가 일단 불길을 만나게 되자 함성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 P883

「틀렸어. 이젠 안 돼. 이 수도원 수도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해도 이젠 안 돼. 장서관은 끝났어.」 - P890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필사사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필사하던 땀과 눈물이 밴 양피지를 구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헛일이었다. - P892

수도원은 나락의 혼돈을 방불케 했으나 이는 비극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창과 지붕에서 튀어나온 불똥은 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다가 이윽고 교회 지붕 위로 우박처럼 내려앉았다. - P893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 P896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 P897

뒷 이야기이지만 수도원은 그 후로도 사흘 밤낮을 탔다.
불길을 잡아 보려던 마지막 노력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생존자들은, 수도원 건물 중에 지켜 낼 수 있는 건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느님의 응징에 맞서 보려고 쳐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 P903

사부님께서는,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나를 안아 보시고는 나를 떠나보내셨다.
그 뒤로는 그분을 다시 뵙지 못했다. 금세기 중엽 역병이유럽을 휩쓸 당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아, 바라건대 하느님께서 그분의 영혼을 수습하시되, 지적인 허영에 못 이겨 그분이 지으신 허물을 용서하시기를.... - P906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 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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