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그런 괴이한 사건이 수도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까닭인즉, 수도사들이라는 사람들은 바로 학문에 몸을 바친 사람들이고, 수도원 장서관이란 곧 천상의 예루살렘이자, <미지의 세계terra incognita〉와 하데스(冥府)의 변경에 가로놓인 지하 세계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모두 장서관에, 장서관의 규칙과 금기에 완전히 매료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서관과 더불어, 장서관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 P347
만일에 수도원만이 소장하고 있는 새로운 학문이 수도원 밖에서 자유로이 나돈다면 신성한 수도원은 교구의 부속 학교나 도시의 대학과 다를 바가 없어지고 이로써 수도원의 신성은 허물어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P349
내가 살바토레를 관심 있게 보았던 것은, 그의 특이한 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주위에서 있었던 일이 당시 이탈리아를 술렁거리게 했던 수많은 사건과 운동의 빛나는 축도(縮圖)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P366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말로 살바토레에게 물어보았다. ‘혹 세상을 주유하시면서 돌치노 수도사를 만나신 적은 없습니까?’ 그의 반응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는 두 눈을 화등잔같이 뜨고 거듭거듭 가슴에 성호를 긋고는 횡설수설, 나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 대었다. 요컨대 그는 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던 듯하다. 내 질문이 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믿고 나에게 우정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던 살바토레는 질문이 던져진 순간부터 나를 두려워하는 것같았다. 그는 우물쭈물 핑계를 대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 P367
사부님께서는 우베르티노 어르신과 말씀 나누실 때에는, 성자든 이단자든 필경은 모두 똑같다고 주장하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장과 말씀 나누실 때 사부님께서는 이 이단과 저 이단, 그리고 이단과 정통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걸 설명하려고 애쓰시는 것 같았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사부님께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다른 것이라고 우기시는 우베르티노 어르신을 나무라시면서, 기본적으로 다른 것을 같다고 우기시는 원장님을 질책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 P370
「그걸 모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이 가벼웠던 게 불찰이었다. 사부님은 걸음을 멈추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 보면서 대갈 일성 꾸짖었다. 「네 이놈!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더냐? 주님의 권능에 힘입어 학식과 기예를 고루 갖춘 내가 아니더냐? 저 혼자만 알겠다고 만들어 놓은 다른 사람의 암호를 그것도 단 몇 시간에 해독한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너같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감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고 재잘거릴 수 있다더냐!」 나는 황급히 사죄했다. 무의식중에 사부님의 빳빳한 자존심을 건드려 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분이 자기의 추리의 속도와 그 정확성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P3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