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의 침실 문이 열리고 드레스 차림의 소피야가 앞으로 걸어 나왔을 때, 백작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소피야가 성년의 문턱을 넘어서는 시점이었다. 경계의 한쪽에는 백작에게서 우정과 조언을 기대하는, 몸가짐이 바르고 차분하면서도 동시에 상상력이 기발한 다섯 살, 열 살, 또는 스무 살의 소녀가 있었다. 경계의 다른 한쪽에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기댈 필요가 없는 분별력과 우아함을 갖춘 젊은 여성이있었다. - P630

이 부분을 읽은 여러분은 혹시 로스토프 백작이 - 스스로를 예의범절의 표본이라고 주장하는 - 그가 탁자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엿듣지는 않았는지, 다소 냉소적으로 묻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의 질문과 냉소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최고의 하인들이 그렇듯, 유능한 웨이터의 기본 업무가 바로 엿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 P644

백작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부모로서의 충고를 두 가지 간단명료한 요소로 제한하였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 P654

소피야,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 P657

애초에 백작은 노르웨이나 덴마크, 스웨덴, 또는 핀란드에서 온 투숙객에게 몇 가지 물건을 슬쩍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 P666

그렇지만 한 가지 사소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백작이 확보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품목은 바로 남자의 여권이었다. - P667

비숍이 들고 있는 것은 최근에 쓴 편지가 아니었다. 아니, 편지 자체가아니었다. 그것은 맨 처음 잘라냈던 베데커의 지도였다. 팔레 가르니에서 시작하여 조르주 생크 거리를 거쳐 미국 대사관에 이르는 길을 백작이 선홍색으로 그려 넣은 그 지도였다. - P670

비숍이 침실을 빠져나갔을 때 백작은 폭풍처럼 밀려오는 감정-분노, 회의, 자책,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리석게 지도를 책상 서랍에 넣어둘 게 아니라 불에 태워버렸어야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6개월 동안이나 공들여 계획하고 필사적으로 실행한 일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소피야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었다.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그 애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할까? - P672

"제가 오는 걸………… 모르고 계셨어요?" 소피야가 망설이면서 물었다.
"물론 알고야 있었지! 네 아버지는 이런 첩보 영화 같은 방식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백작은 나한테 분명 네가 올 거라고만 얘기했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 거라는 건 알려주지 않았어. 더구나 맨발의 소년 차림으로 올 거라는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단다." - P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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