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왜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화이트백작은 잠시 침묵에 빠졌고, 이어 어깨를 으쓱했다.
"1914년 파리로 떠났을 때, 저는 다시는 동포를 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당신은 볼셰비키도 동포로 칩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 P335

"간단하오. 한 달에 한 번씩 이 방에서 나와 저녁을 먹읍시다. 나랑 프랑스어와 영어로 얘기를 합시다. 서구사회에 대한 당신의 인상들을 나에게 들려주시오. 그러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글레브니코프는 문장을 끝맺지 않고 길게 뺐다. 자신이 백작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게 아니라 반대로 아주 많다는 것을 시사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백작은 손을 들어 보답 얘기는 그만두라는 동작을 취했다.
"오시프 이바노비치, 저는 보야르스키 식당의 고객에게라면 뭐든 기꺼이 해드릴 수 있습니다." - P339

"역사학도로서, 그리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해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 P338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 시작된 이래로 죽음은 늘 부지불식간에 찾아왔지, 그는 설명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죽음은 소리 없이 마을에 도착한 다음 여관에 방을 하나 잡고, 골목길에 잠복해 있거나 혹은 슬그머니 시장을 어슬렁거리지. 그러다가 주인공이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한숨 돌리려는 그 순간에 죽음은 그를 찾아가. - P357

"지금 저 애를 데려갈 수는 없어요. 일자리와 살 곳을 먼저 알아봐야 하니까요. 한두 달 걸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거기 정착하는 대로 애를 데리러 올게요." - P369

복도를 지나 종탑으로 소피야를 안내한 백작은 다시 한번 소피야에게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소피야는 급격한 각도로 휘어진 좁은 계단을 올려다보더니 백작에게로 몸을 돌려 두 손을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안아주세요‘를 뜻하는 만국 공통의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 P374

이 아이의 무엇이 다 큰 성인 남자로 하여금 일 분 일 분을 조심스럽게 세면서 점심시간이 어서 오기를 바라게 만들었을까? 아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아서? 낄낄거리며 방 안을 어지러이 돌아다녀서?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울음을 터뜨리거나 짜증을 부려서?
그와 정반대였다. 아이는 조용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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