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가까이 지난 뒤 계단 프로젝트가 절망에 빠진 지구 문명에 한줄기 서광을 비춰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윈톈밍의 뇌를 실은 계단 프로젝트 비행체가 어떻게 삼체 세계에 포획되었는지는 아마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 P365

이것이 자신이 보는 마지막 일출일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곧 다가올 만남에서 설령 양쪽 모두 대화의 규칙을 충실히 지킨다 해도 그 머나먼 세계는 그녀를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규칙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일말의 여한조차 남지 않았다. - P379

청신은 이 고요한 정적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지만 윈텐밍이 침묵을깨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릴 적 같이 놀았던 거 기억해?"
청신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고 알아들을 수도없었다. 어릴 적이라니? 하지만 놀란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전화로 얘기했잖아. 동화를 지어서 들려주었지. 넌항상 나보다 동화를 더 잘 만들었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동화를 지었는지, 100개도 넘을 거야. 그렇지?"
"아마 그럴 거야."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그녀의 입에서 이렇게 태연한 거짓말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에 그녀 자신조차 놀랐다. - P388

윈텐밍이 국왕의 새 화가」라는 동화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된 민요를 읊조리듯 그의 목소리는 느리고 나지막했다. 청신도 처음에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하려고 했지만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가 들려주는 동화 속에서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그는 내용이 서로 이어지는 동화 세 편을 들려주었다. 「국왕의 새 화가」, 「도철해」, 「심수 왕자」였다. 세 번째 동화가 끝나자 지자의 화면에 카운트다운 숫자가 나타났다. 1분이 남아 있었다. - P390

누군가 말했다.
"여긴 지자의 사각지대입니다."
인류가 지자를 따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비록 이렇게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만 가능했지만 말이다.
참모총장이 말했다.
"두 분이 나눈 대화 내용을 모두 말씀해주십시오. 생각나는 건 하나도빼놓지 말고 다 말해주세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중요합니다." - P393

그 시간 3만여 킬로미터 아래 지구에서는 지자의 집이 시뻘건 불길 속에서 잿더미로 변했다. 지자의 화신(化身)이었던 로봇도 함께 타버렸다. 재로 변하기 전 그녀는 전 세계를 향해 태양계에서 지자가 완전히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 P394

아주 오랜 옛날 ‘이야기 없는 왕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어. 그곳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어. 사실 국왕에게는 나라에 이야기가 없는 게 제일 좋아. 이야기가 없다는 건 아무런 사건도 재난도 없다는 뜻이니까 백성들도 아주 행복하지. - P401

바늘귀가 단숨에 종이를 몇 장 눌러 잘라낸 뒤 신들린 듯 붓을 놀리기 시작했어. 그림 한 장을 완성할 때마다 그림 속 인물이 침대에서 사라졌지. 빙사가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씩 초상화로 그려져 지하 요새의 벽에 걸렸어. - P409

공령이 길게 탄식했어.
"큰일이군요. 공주님, 큰일 났습니다! 그놈은 악마입니다. 사람을 그림 속에 그려 넣는 악마의 그림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 P411

"하지만, 도철해에 간다고 해도 묘도까지 어떻게 가란 말이에요? 그 바다에 뭐가 있는지 알잖아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세요. 살길은 이것 뿐입니다. 동이 트면 모든 충신이 그림 속으로 들어갈 겁니다. 빙사 왕자가 금위군을 장악하고 왕위를 빼앗겠지요.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심수 왕자님밖에 없습니다." - P415

"고향에 가고 싶지 않아? 허얼신건모쓰컨 말이야."
"아뇨. 워낙 어릴 적에 떠나서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워해 봐야 소용도 없고요. 이야기 없는 왕국을 영원히 떠날 수 없으니까요."
멀리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장범의 말을 되풀이해서 따라하는 것 같았어. 영원히 떠날 수 없으니까요. 영원히 떠날 수 없으니까요." - P427

넋을 놓고 듣고 있던 노주가 한참 만에 물었어.
"지금도 바다 곳곳에 도철어가 살고 있어?"
"아뇨. 이야기 없는 왕국의 해변에만 있어요. 시력이 좋은 사람들은 먼바다의 수면에서 바닷새가 먹이 잡는 걸 볼 수가 있어요. 거긴 도철어가 없으니까요. 바다는 끝없이 넓거든요."
"그럼 이 세상에 이야기 없는 왕국과 허얼신건모쓰컨 말고 또 다른나라가 있어?"
"세상에 두 나라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 P430

관 씨가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고 바다 쪽 모래사장에 있던 호위대장이 그녀에게 손짓을 했어. 공주가 다가가자 그가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어.
"보십시오. 저기가 묘도입니다."
제일 먼저 공주의 눈에 들어온 건 묘도가 아니라 작은 섬에 서 있는 거인이었어. 그가 심수 왕자라는 걸 알 수 있었지. 그가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봉우리처럼 섬 위에 우뚝 서 있었어. - P432

"물론 공주님은 가실 수 없죠. 제가 가겠습니다."
노주는 그의 결연한 눈빛에서 굳은 결심을 읽을 수가 있었어. 노주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어.
"호위대장 혼자 가면 오라버니가 어떻게 믿겠어? 나도 갈래. 꼭 가겠어!"
장범이 평민 차림의 공주를 보며 말했어.
"공주님께서 가신다 해도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 P436

묘도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어. 20년 전 심수가 낚시를 하러 갈 때 그의 보호관, 궁중 교사, 호위병과 하인 몇 명을 데리고 갔어. 그런데 그들이 섬에 오르자마자 도철어 떼가 왕국의 근해로 몰려오는 바람에 돌아가는 길이 막히고 말았지.
왕자의 키가 아까보다 더 줄어들어 있었어. 배가 섬에 가까워질수록 왕자의 키가 줄어들고 있었던 거야. - P438

"폐하, 심수를 보았지만 그릴 수가 없습니다."
바늘귀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빙사가 싸늘하게 물었어.
"정녕 그에게 날개라도 돋쳤단 말이냐?"
"날개가 돋친 거라면 그릴 수 있습니다. 날개의 깃털까지 한 가닥 한가닥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지요. 하지만 그는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가 원근법과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원근법이라고?"
"모든 사물은 가까울수록 크게 보이고 멀수록 작게 보입니다. 이것이원근법입니다. 저는 원근법을 따르는 서양화파이기 때문에 그를 그릴수가 없습니다." - P445

AA가 작은 소리로 청신에게 말했다.
"공주가 선생님과 비슷하네요."
청신이 말했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마……. 난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않아. 적어도 우산은 직접 들겠지." - P451

모호성과 다의성은 문학작품의 특징입니다.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진정한 정보는 동화 세편 속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을 겁니다. 정보의 다의성과 불확실성이 훨씬 더 증가하죠. 따라서 우리 앞에 놓인 난제는 이 속에서 해독해 낼 정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걸 해독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 P452

하지만 세 편의 동화에 남긴 모든 내용이 이렇게 난삽하고 모호한 것은아니었다. 적어도 한 가지에 대해서는 그 안에 확실한 정보가 들어 있을 것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윈톈밍의 정보가 담긴 문을 여는 신비한 열쇠일지도 몰랐다.
그건 바로 ‘허얼신건모쓰컨‘이라는 범상치 않은 지명이었다. - P4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