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가 여러 경로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후보를 물색했다. 때마침 청신의 대학 동창이 뉴욕에 왔다가 그녀에게 연락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다른 동창들의 근황을 얘기하다가 윈톈밍의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는 윈톈밍이 폐암 말기라는 걸 후원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청신은 윈톈밍의 이야기를 듣고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위웨이민 부국장을 찾아가 윈톈밍을 후보로 추천했다. 위웨이민이 계단 프로젝트 탑승자 선발을 책임지고 있었다. - P108
"서약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인류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어째서 계단 프로젝트에 참여했나요?" 세이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윈톈밍을 바라보는 시선도평온했다. "다른 세계를 보고 싶습니다. 인류에 충성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삼체문명을 본 뒤에 결정하겠습니다." 세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도 서약을 강요하지 않아요. 내려가세요. 자, 다음 분." - P118
청신은 병원 밖에서 서성였다. 들어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어서 그 자리에 선 채로 고통을 곱씹었다. 함께 온 웨이드가 성큼성큼 병원으로 들어가다가 우뚝 멈춰 서더니 청신의 고통을 몇 초쯤 감상한 뒤 흡족한 표정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참, 자네가 기뻐할 소식이 있어. 자네의 그 별 말이야. 그걸 선물한 사람이 바로 윈톈밍이라더군." 청신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눈앞에서 빠르게 변하고 감정의 격랑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덮쳤다. - P119
지구 함대가 장렬하게 산화된 후 14년이 지났다. 태양계 양끝에서 벌어진 어둠의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함대와 지구의 교신이 끊겼다. 하지만 그 후 1년 반 동안 청동시대호는 지구에서 발사한 많은 신호를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지구 표면의 방송과 통신 내용이 흘러나온 것이었지만 선명한 우주 통신도 있었다. 그런데 위기의 세기 208년 11월 초의 어느 이틀동안, 지구에서 흘러나오던 전자파가 완전히 사라졌다. 툭 꺼져버린 전등처럼 지구의 모든 주파수대가 고요해졌다. - P128
지구의 전자기 신호가 갑자기 사라진 원인에 대해 청동시대호 탑승자들은 대부분 태양계가 삼체인에게 점령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청동시대호는 속도를 높여 지구형 행성을 가진 26광년 밖 항성을 향해 열심히 나아갔다. 그런데 열흘 뒤 갑자기 우주 함대 사령부가 보낸 전파 신호가 수신되었다. 청동시대호와 태양계의 다른 쪽 끝에 있는 블루스페이스호를 향해 동시에 발송된 이 신호는 지구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설명하고 인류가 삼체세계를 위협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지구로 귀환하라는 내용이었다. - P130
"이제 선포한다. 그대들은 이미 군적을 박탈당했다. 그대들은 더 이상태양계 함대 소속이 아니지만 그대들이 함대에 안긴 치욕은 영원히 씻기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가족을 만날 수 없다. 가족이 만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대들의 부모는 그대들을 부끄러워하고, 그대들의 배우자는 이미 떠났다. 그대들의 자식이 사회에서 차별받지는 않았지만 십수 년간 수치심을 안고 자랐으며 그대들을 증오하고 있다. 그대들은 함대 세계의 사법 시스템으로 넘겨졌다!" - P133
-최종 판결 닐 스콧 함장과 고위 장교 6명은 반인류죄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 1,768 명 가운데 138 명만이 무죄 판결을 받고 나머지는 각각 징역 20~300년 형까지 선고받았다. - P142
지구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도착했을 때 블루스페이스호는 미끼를 덥석 물지 않고 의심하며 망설였다. 저출력으로 감속하며 고민하고 있던 그들은 청동시대호가 보낸 경고 신호를 받은 뒤 감속을 중단하고 최대 출력으로 가속해 태양계에서 도망쳤다. - P144
청신이 소유한DX3906에서 얼마 전 2개의 행성이 발견되었다. 그중 하나가 질량, 궤도, 대기 스펙트럼으로 추측할 때 지구와 비슷한 지구형 행성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다. 사람들은 그 머나먼 세계에 주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UN과 태양계 함대가 그 항성의 소유권을 되찾으려 했지만 주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264년 동안 동면하고 있던 청신을 소생시킨 이유였다. - P146
21세기 초 일본과 한국의 남자 스타들도 얼핏 보면 여자로 오해할 만큼 예뻤다. 대협곡이 인류의 여성화를 중단시켰지만 위협의 시대로 들어선 뒤 반세기 동안 이어진 평화롭고 안락한 분위기가 여성화를 가속시켰던 것이다. - P150
여기서 더 나아가 한 세계 전체를 멸망시키고 모든 생명을 죽인다면 그는 틀림없이 구세주가 될 겁니다!" AA가 말했다. "뤄지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를 심판하고 싶어 하죠." "왜?" "아주 복잡해요. 직접적인 이유는 그 항성계, 그러니까 뤄지가 우주에좌표를 알려서 멸망시킨 그 항성계 속에 생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어요. 그래서 그가 세계 멸망죄를 지었다는 주장이에요. 그건 현대 법률에서 가장 무거운 죄예요." - P152
웨이드의 말투가 3세기 전 청신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처럼 담담했다. "이유가 뭐죠?" 청신이 3세기 후 그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고왼쪽 어깨가 마비된 것처럼 뭉근하게 아렸다. "검잡이가 되기 위해서 난 검잡이가 되고 싶어. 자네는 내 경쟁자가 될거야. 그리고 날 이기겠지. 자네에게 악의는 없어. 자네가 믿을지 모르지만 나도 가슴이 아파." - P155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 안 가 절망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암흑의 숲 위협 통제권을 인류 집단이 가지고 있다면 위협력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우선 인류 집단은 두 세계를 멸망시킬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 결정은 인류 사회의 윤리와 가치관의 마지노선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58
그때부터 암흑의 숲 위협 통제권은 계속 뤄지가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태양을 둘러싼 원자폭탄을 폭파시키는 스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중력파 발사 스위치로 바뀌었다. 두 세계의 전략적 균형이 뤄지라는 바늘 끝에 거꾸로 올라앉은 피라미드처럼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었다. 암흑의 숲 위협은 두 세계의 머리 위에 매달린 다모클레스의 검이고, 뤄지는검을 묶고 있는 머리카락이었다. 사람들은 뤄지를 검잡이라고 불렀다. - P159
뤄지는 양쪽의 주장에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중력파 발사 스위치를 손에 쥔채 반세기 동안 검잡이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사람들은 인류가 삼체 세계에 대해 어떤 정책을 내놓든 검잡이를 피해 갈 수없다는 것을 알았다. 검잡이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그 어떤 정책도 삼체 세계에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검잡이도 면벽자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가 되었다. - P161
인류가 억지력을 갖게 된 후 삼체 세계가 지구에 전송하는 과학 기술 정보를 수신하고 소화하기 위해 UN과 동급의 국제기구인 세계 과학원이 설립되었다. 사람들은 삼체 세계가 얼마 안 되는 정보를 치약 짜듯 보내줄 것이고 그마저도 인간을 오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류를 뒤섞어놓은 것이어서 지구의 과학자들이 수수께끼 풀듯 그 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골라내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삼체인들은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분량의 지식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송했다. - P165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아가씬 검잡이에 어울리지 않아. 정치 경험도 없고 너무 어려. 상황 판단력도 부족하고 검잡이에게 필요한 심리적 요건도 갖추지 못했지. 내세울 건 착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뿐이잖아." - P173
그래비티호가 블루스페이스호를 반세기 동안 추격한 끝에 차이를 좁히고 목표물에 거의 도달했다. 블루스페이스호와의 거리가 3천문단위밖에 되지 않았다. 두 전함이 비행한 1.5 광년의 머나먼 여정에 비하면 지척이라 할 만한 거리였다. - P180
그의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전투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하늘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왱왱거렸다. 채색 먹구름이 차례로 은하를 덮듯 대형 경보 화면이 광장 위 공중에 층층이 나타났다. 놀라서 어리둥절해하는 관이판을 향해 웨스트가 외쳤다. "물방울 공격이에요! 물방울이 급가속을 하고 있어요. 하나는 블루스페이스호, 또 하나는 우리를 향하고 있어요!" - P201
반년 전 UN과 태양계 함대 연합 회의에서 청신이 제2대 중력파 위협시스템 통제인, 즉 검잡이로 당선되었다. 그녀는 2위 후보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표를 얻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위협 통제 센터였다. 그곳에서 위협 통제권 인수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 P202
물방울이 최고 속도로 1500만 킬로미터를 뚫고 지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10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검잡이에게 허용된 결단의 시간이었다. - P208
"뤄지 선생님, 이쪽은 중력파 우주 전송 시스템의 제2대 최고 통제권자 청신입니다. 전송 스위치를 인수해주십시오." 서 있는 뤄지의 자세가 무척 꼿꼿했다. 그는 반세기 동안 응시했던 흰벽을 마지막으로 몇 초 응시하다가 벽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적을 향한 인사였다. 4광년의 심연을 사이에 두고 반세기 동안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이 역시 인연일 것이다. - P211
그러나 운명은 그 기이하고 변덕스러운 실체를 가차 없이 드러냈다. 정신은 검잡이로 살기 위해 일생동안 준비했지만 그녀의 검잡이 일생은 그녀가 붉은 스위치를 넘겨받은 지 단 15분 만에 끝이 났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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