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부인은 함께 오지 않았나요? 지원 부대의 가족들도 동면할 수 있었다고 들었어요." "같이 오지 않았소. 날 보내기 싫어했지. 잘 알겠지만 그때는 미래가 어둡고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책임하다고 날 원망하더군. 아이 엄마가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어요. 그리곤 바로 다음 날 지원 부대에 출발 명령이 떨어졌지. 가족과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왔어요. 추운 겨울밤에 가방 하나 둘러메고 집을 떠났소…………. 아마 날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P519
탐측기의 목표는 태양계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머물러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P529
이노우에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둥팡옌쉬의 나지막한 탄식에 말허리가 잘렸다. "오, 마이 갓! (Oh, my god!)" 두 부함장의 눈길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장베이하이 앞에 떠 있는 조작 창이었다. 그 조작 창 위에 우주전함 자연선택호의 현재 상태가 나타나 있었다. 전함은 이미 무인 원격 조종 상태로 설정되어 있었고 4급 가속 상태로 돌입하기 전 승선원들이 심해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를 생략한 뒤였다. 전함과 외부의 통신이 이미 차단되었고 전함이 최고 추진 단계로 돌입하기 위한 거의 모든 설정이 끝나 있었다. 이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연선택호는 최대 가속도로 우주 지도상에 설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 P531
장베이하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두 부함장이 아니라 둥팡옌쉬였다. 둥팡은 그의 눈빛을 보며 우주군의 휘장을 떠올렸다. 별과 검이 그 속에 모두 들어 있었다. "둥팡, 내가 말했지. 당신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용서해달라고. 시간이 많지 않군." - P533
아시아 함대 총사령부는 그제야 이 믿기 힘든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연선택호가 도주하고 있었다! 유럽과 북미 함대가 아시아 함대에 강력한 항의와 경고를 보냈다. 처음에는 아시아 함대가 단독으로 삼체 탐측기를 저지하기 위해 전함을 출동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자연선택호의 비행 방향을 보고 그게 아님을 알았다. 자연선택호는 삼체 함대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P535
자연선택호의 속력을 광속의 100분의 1까지 끌어올리느라 핵융합 연료가 절반 넘게 소모되었다. 이제 자력으로는 태양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연선택호가 영원히 외우주를 떠도는 외로운 조각배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 P536
함대 사령관 반역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베이하이: 이탈하기는 했지만 반역은 아니지. 함대 사령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베이하이: 이 전쟁에서 인류는 반드시 패배한다. 나는 지구의 항성 간 우주선을 보존해 인류 문명의 씨앗이자 희망을 지키려는 것이다. - P537
정부는 일단 신중한 입장이었다. 정부대변인은 삼체 세계가 협상을 원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성급한 추측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사이에 UN과 태양계 함대 협의회가 긴급 정상 회담을 열고 협상 절차와 조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 P543
함대 세계가 아시아, 유럽, 북미 세 함대의 항성급 전함 2,015대를 총동원해 연합 함대를 구설하고 한꺼번에 출격시키기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해왕성 궤도를 넘어온 삼체 탐측기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 P545
뤄지가 물었다. "야스키 게이코 씨는요?" "UN 본부에 있던 그 명상실 기억해요? 거기가 황폐해져서 지금은 관객들이나 가끔씩 찾아가지요………. 거기에 있던 철광석도 기억나요? 게이코가 그 위에서 할복자살을 했어요." "아…………" "죽기 전에 날 저주했죠. 나더러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 거라고 했어요. 나의 패배주의는 멘털 스탬프 때문에 절대로 흔들릴 수 없지만 인류는 승리했으니 말예요. 그녀 말이 맞았어요.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 P548
탐측기의 크기는 길이 3.5미터로 예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딩이도 처음 받은 인상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수은 방울 같다는 것이었다. 탐측기는 아름다운 물방울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앞부분은 매끈하게 둥글었고 꼬리 부분은 뾰족했으며 표면은 거울처럼 반지르르한 반사경으로 되어 있었다. - P554
딩이가 다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탐사를 떠난 뒤 이 우주선, 그러니까 이 양자호가 심해 상태로들어갈 수 있소?" 장교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함장이 물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딩이가 다시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함대의 빛을 받아 그의 백발이 더욱 하얗게 반짝였다. 그가 처음 양자호에 탑승할 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정말로 아인슈타인과 비슷해 보였다. "음………. 어쨌든 그렇게 해도 큰 손해는 없는 거지? ………내 예감이 안좋아." - P560
물방울이 자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또 한 가지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군사용 탐측기라면 적에게 포획당했을 때 자폭해야 한다. 자폭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이 삼체 세계가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며, 삼체 문명이 인류가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보낸 평화의 메시지라는 추측이 정확하다는 의미다. 세계가 또 다시 환호했다. - P564
"1000만 배로!" 대분자도 보일 만큼 확대 배율을 높였지만 현미경 창에 나타나는 것은여전히 반지르르한 반사 표면뿐이었다. 티끌만한 흠조차 없을 뿐 아니라 밝기도 육안으로 보이는 주위의 표면과 차이가 없었다. - P574
합 함대의 100만 명이 그 뜻을 곱씹었다. 그때 딩이가 불쑥 외쳤다. "피해!" 두 글자의 낮은 외침 뒤에 그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찢어질 듯한목소리로 외쳤다. "바보 놈들아! 빨—리—피—해!" 시쯔가 당황해서 물었다. "어디로요?" 딩이보다 몇 초 늦었지만 중령도 상황을 파악했다. 그도 딩이처럼 절망적으로 외쳤다. "함대 함대! 흩어져!"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였다. 강력한 전파 방해가 나타나 당랑호에서 송출되는 영상이 일그러져 사라졌고 함대는 중령의 마지막 외침을 듣지 못했다. - P578
물방울은 인류의 물리학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운동 방식으로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은 채 제3우주속도의 두 배 속도로 인피니트호를 향해 날아갔다. 물방울은 인피니트호의 3분의 1쯤 되는 곳을 측면으로 뚫고 들어가 그대로 관통했다. 그림자처럼 아무런 저항력도 받지 않고 가뿐히 선체를 뚫었다. - P580
함대의 지휘관들은 이미 충격과 전율에 휩싸여 판단력을 상실한 뒤였다. 과거 200년 동안의 우주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고 갖가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모두 예상했지만 눈앞에서 전함 100대가 폭죽처럼 1분 만에 모두 폭발해버린 이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P583
이로써 인류가 보유한 우주 군대가 완전히 섬멸되었다. 물방울은 양자호와 청동시대호가 도주한 방향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가속했지만 곧 추격을 포기했다. 두 목표물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양자호와 청동시대호가 이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 전함이었다. - P596
둥팡옌쉬가 마지막으로 장베이하이에게 경례를 했다. "아시아 함대 소속 자연선택호입니다! 선배님께서 인류의 항성급 전함다섯 대를 지켜주셨습니다. 이 다섯 대는 현재 인류가 가진 우주 함대 전체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저희는 선배님의 지휘에 따를 것입니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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