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위 일은 하루빨리 집어치워야 한다. 생각만 그런 채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고백하자면 사실은 꼬박꼬박 월급을 손에 쥘 수 있는 생활을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빨리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 P7

당시 나는 방문 저편에서 자고 있는 구라모치의 숨소리를 들으며 지금이야말로 그를 죽일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 더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는 그를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P23

"그래, 아무래도 사기라는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동서 상사는 침몰 직전의 배라고 할 수 있어. 침몰하는 배에 탄 쥐새끼 신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어."
구라모치가 소리를 낮추었다.
"슬슬 도망칠 때가 됐어." - P45

그때 구라모치 오사무의 이름을 댔다면 어떻게 됐을까. 라고 때때로 생각해 보곤 한다. 그가 경찰에 체포됐다면 그 이후 내인생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80

그러나 내가 형사에게 구라모치의 이름을 대지 않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이 발견된 그의 악행을 내 가슴속에 담아 두는 편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를 단죄하는 사람은 나여야만 했다. 경찰의 개입은 원하지 않았다. - P80

그 답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구라모치는 마키바 노인에게 돈을 돌려주려고 제3의 피해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가 왜 유독 마키바 노인만 그토록 특별하게 취급했는가는 그 후의 전개를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목적은 마키바 노인에게 감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구라모치가 진짜로 노렸던 것은 유키코의 호의를 얻는 것이었다. - P108

"말은 정확히 해야지. 돈을 나 혼자 빼앗은 게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빼앗았어. 우리는 파트너였으니까."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내게 그는 덧붙였다.
"결혼식에는 와 줘. 아무튼 우린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잖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 P117

결혼식에 가자. 피로연에도 참석하자. 행복한 구라모치와 아름다운 신부 유키코의 모습을 눈에 새기는 거다. 나의 굴욕과 질투심이 한껏 부풀어 오를 테지. 그러면 지금까지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한계점을 마침내 넘어서게 될 것이다.
증오가 살의로 바뀌는 그 한계점을 넘어서면 아무리 애써도 생기지 않던 진정한 살의가 싹틀 것이다. - P120

그런 의식이 작용했는지, 구라모치와 통화한 이후 나는 미하루와의 결혼을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무사히 결혼에 골인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한다면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 P143

"그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유키코는 입술 사이로 혀끝을 살짝 내밀었다가 집어넣고 말을 이었다.
"미하루를 다지마 씨에게 소개하면 어떻겠냐고 말을 꺼낸 사람이 실은 그이예요."
"뭐라고요?"
"하지만 그이는 내가 소개하는 형식으로 해야 다지마 씨가 받아들일 거라면서 자신은 빠지는 척하겠다고 했어요." - P150

그 시점에서는 아직 내가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해심 없는 남편으로 비치기 싫었고, 그녀의 소망이라면 가능한 한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미하루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알지 못했다. - P167

이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함정에 빠진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됐다. 즉 데라오카 리에코는 처음부터 자취를 감출 작정을 하고 내게 접근해 나를 유혹하고 내 가정을 파괴한 것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 P342

물론 구라모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와 벌이는 논쟁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났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한두 걸음 앞서 대답을 준비했고 그런 그에게 나는 아무런 응수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남는 것은 불완전 연소된 것 같은 찜찜함이었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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