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은 많은데 혼자서 여러가지를 해야 하는 터라 시급에 비해 일이 힘들었지만 나는 그곳에 가는 게 즐거웠다. 그 이유는 바로 에지리 요코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53

카페에서 보낸 두 시간 동안 대화는 대부분 구라모치와 요코사이에서 오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었을 뿐이다.
카페에서 나오자 구라모치는 요코를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 P160

요리할 일도 없는 아버지가 뭐 하러 아들의 조각칼 숫돌까지 빌려 가면서 칼을 갈았을까.
아침부터 무더운 날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는 시마코를 죽일 작정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 P176

아버지를 말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시마코 때문에 추락한 우리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 여자를 죽이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그보다 나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여자를 죽일까 하는 것이었다. 죽인 다음엔 어떻게 할것인가, 죽이겠다는 결의는 얼마나 강렬한가, 그런 것들도 궁금했다. - P176

나는 모쪼록 아버지가 냉철한 실행자이기를 바랐다. 가슴 깊이 살의를 불태우며 치밀하게 계획해 대담하게 결행하길 바랐다. - P177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너무도 허망한 첫사랑의 종말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역 개찰구를 지나면서 내가 물었다.
"요코가 사귄다는 상대,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이야?"
요코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지만 놀란 기색은 없었다. 내가 눈치를 챘다는 건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 P182

아버지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자를 죽이려던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환멸이 느껴졌다. 아니, 아버지의 살의가 겨우 그정도였다는 사실에 실망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살인은 역시 무리였다. - P194

시마코에게 감쪽같이 넘어간 아버지는 그녀가 일하는 술집의 단골이 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들고 있는 성냥을 보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 화가 난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시마코와 관계를 회복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휴일에도 그녀를 만나는 눈치였다. 나는 수년 전 그들과 함께 긴자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버지는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다. - P195

사건이 일어난 학교는 에지리 요코가 다니던 고등학교였다. 그리고 투신자살한 학생은 바로 에지리 요코였다. - P196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살의가 용솟음쳤다. 물론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지만 몇 번이나 그런 장면을 상상했다. 엉망으로 취한 채 자고 있는 아버지의 해마 같은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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