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갑자기 땅굴 위쪽에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린 총독 대인이 야크사(흑룡강 연안)에 온 것을 알고 만나뵙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오자 위소보는 마치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등골이 오싹해지고, 청천벽력을 맞은 듯 기절초풍했다. 그 음성의 장본인은 바로 다름 아닌 신룡교의 교주 홍안통이었다. - P27
귓전에는 계속 홍 교주와 러시아 총독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리고 통역을 통해 그 내용도 알 수 있었다. 오삼계가 출병을 하면 양쪽에서 만청을 협공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몽골인 털보 한첩마가 한 말과 완전히 일치했다. - P29
소피아는 까르르 웃었다. "우린 내일 돌아가, 모스크바로." 위소보는 모스크바가 어딘지 몰랐다. 그래도 무조건 엉겨붙었다. "아름다운 공주님이 모스크바에 가면 이 중국 대관도 모스크바에 간다. 아름다운 공주가 달나라에 가면 이 중국 대관도 따라서 달나라에 간다." 소피아는 영리하고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위소보가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널 데리고 모스크바에 간다." - P41
영장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저 명에 따를 뿐입니다. 황태후께서 공주님더러 이곳에서 편히 지내시랍니다. 표트르 1세 폐하께서 등극 50주년을 맞이하면 공주님도 경축예전에 초대하겠답니다." 소피아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표트르 등극 50주년이라고? 그럼 나더러 여기서 50년이나 기다리란 말이냐?" - P49
"우리 중국에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여황제가 있었는데, 그녀는 많은남자 황후들을 거느리고 아주 즐겁게 살았어. 공주, 내가 보니까 공주도 그 측천무후와 비슷해. 자기가 여황제가 되는 게 낫잖아!" 그 말에 소피아는 귀가 번쩍 뜨였다. 여황제가 된다는 것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에는 여태껏 여황제가 없었다. 여자는 사황이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정말 여황제가 있었다면 러시아에도 여사황이 없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 P52
소피아는 곧 대·소 사황의 이름으로 칙령을 내려 위소보를 타타르 지방을 다스리는 백작에 봉하고, 대신을 시켜 국서를 작성해서 위소보로 하여금 중국 황제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신 한 명과 카자크 기병대를 시켜 위소보를 호위케 했다. 물론 금은보화를 비롯해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위소보한테 받았던 은표 10만여 냥도 돌려주었다. 그 외에도 중국 황제에게 보낼 초피를 비롯해 보석 등 러시아의 귀중한 특산을 바리바리 챙겨주었다. - P83
러시아의 사신이 귀국한 후 강희는 위소보의 공을 치하했다. 위소보는 이번에 오삼계의 막강한 후원자인 러시아와 신룡교의 위협을 제거했으니, 그 공을 인정해 삼등충용백에 봉했다. 왕공대신들은 모두 앞다퉈 위소보를 축하해주었다. - P92
강희는 앞으로 몇 걸음 옮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너는 내 명을 받들어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고생이 많았다. 오대산을 비롯해서 운남, 신룡도, 요동, 마지막에 러시아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네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보내줄까 한다." 위소보가 얼른 말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좋은 곳이 바로 황상 곁입니다. 황상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고, 황상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마음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몰라요. 황상, 이 말은 저의 진심이지 절대 아첨을 떠는 게 아닙니다." - P117
위소보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황상, 말씀드리기가 좀 쑥스러운데.. 저희 집은 여춘원이란 기루예요. 양주에서는 그래도 손에 꼽히는 아주 큰 기루죠." 강희는 빙긋이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쩐지 말투가 시정잡배들이나 다름없었어. 선비 집안 출신일 리가 없지. 그래도 나한테 그런 수치스러운 일까지 다 털어놓는 걸 보면 녀석이 나에 대한 충심은 확실해." 사실 위소보가 자기 집이 기루라고 말한 것도 허풍을 세게 친 거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저 기루의 기녀일 뿐이지 주인이 아니니 말이다. - P121
그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시랑 등을 대동해 천진에 가서 당고항을 통해 바다로 나갈 때, 수사 총병 황보는 자기한테 아주 깍듯이 대했는데 유독 텁석부리 무관 한 사람만이 자기한테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거리며 얕잡아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 그 무관의 이름을 잘 기억해두지 않았으니 지금은 당연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처럼 아첨을 떠는 사람은 진짜 실력이 없어. 그 텁석부리는 아침을 하지 않으니 틀림없이 실력이 있을 거야." - P128
"텁석부리가 어떻다는 거요? 지금 우릴 갖고 장난하는 거요?" 목청이 어찌나 큰지 위소보와 명주는 다 깜짝 놀라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체구가 아주 우람해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는 만면에 노기가 가득해 수염이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처음엔 멍해 있다가 바로 반색을 했다. "맞아요, 맞아! 저 노형이에요. 내가 찾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그 텁석부리는 버럭 화를 냈다. "지난번 천진에서 내가 눈을 좀 부라렸다고, 이제 와서 복수를 하겠다고 불러온 거요? 흥! 난 잘못한 게 없소이다! 무조건 죄명을 뒤집어씌우진 못할 거요!" - P130
조양동은 서재에 책이 잔뜩 진열돼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우아, 나이는 어린데 학문은 뛰어난가 보지.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과는 역시 다른 모양이야.‘ 위소보는 그가 책을 훑어보자 웃으며 말했다. "조 대형, 솔직히 말해서 저 책들은 그냥 멋으로 장식해놓은 거요. 내가 아는 글이라곤 다 합쳐봤자 아마 열 글자도 못 될 거요. 이름이 ‘위소보‘인데, 세 글자를 합쳐놓으면 그래도 알아보겠는데, 따로따로 떨어뜨려놓으면 종종 헷갈리는 경우도 있소. 그러니 책은 나하고 친할지 몰라도 난 책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아요." 그 말에 조양동은 하하 크게 웃었다. 그리고 이 어린것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솔직담백한 것 같아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위 대인, 비직이 앞서 무례한 언동을 한 것을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 P133
위소보가 말했다. "난 전혀 나무랄 생각이 없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에 다시 조대형을 찾지도 않았을 거요. 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갖고 있어요. 실력이 없는 사람은 아침을 떨어서 승승장구를 하더군요. 그러니 아첨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자죠." - P134
그는 백작부로 돌아와 조양동에게 승진을 약속했다. 아니나다를까, 며칠 후에 병부에서 발령장을 보내 조양동을 총병에 임명하고, 위소보의 지휘를 받게 했다. 조양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했다. 이 소년 상사를 모시면 아침을 하지 않아도 승진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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