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대에 바티칸에서 인정하지 않은 유일한 언어가 영어였습니다. 이탈리아어, 라틴어, 독일어, 심지어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까지도 취급했지만, 영어는 바티칸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영어는 더러운 언어이고, 초서나 셰익스피어 같은 불경스러운 자들, 자유사상가들이 쓰는 언어라고 생각했던겁니다. - P266
"첫 번째 표식은 산치오의 무덤에 있나 보네요." 비토리아가 말했다. 랭던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말했잖습니까." "그래, 산치오가 누구예요? 무덤은 어디에 있어요?" 갑자기 신이 난 비토리아가 물었다. 랭던은 혼자 웃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르네상스 미술가의 성(性)인 ‘산치오‘를 아는 사람은 놀랄 정도로 드물었다. - P273
판테온이 첫 번째 과학의 제단임을 깨달은 건 달콤하고도 슬픈 순간이었다. 역사를 좇는 이에게 역사는 잔인한 장난을 친다. 모든 조각상이 제자리에 있고 ‘계몽의 길‘도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한편으로는 랭던도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 직접 일루미나티의 신성한 은신처를 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P282
"여러분, 12월 25일은 고대 이교도에서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즉, 무적의 태양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동지와 겹치는 날이죠. 태양이 다시 돌아오고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멋진 날입니다." - P303
‘흙(Earth)을 앰비그램으로? 어떻게?"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보고 말았다. 수백 년을 전해 내려온 일루미나티의 전설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추기경의 가슴에 찍힌 불탄 낙인에서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살은 시꺼멓게 되어 있었다. - P349
비토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모든 사건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었다. 창밖 어둠 속에서 인간의 비극이 강렬한 힘으로 인파를 바티칸으로 빨아들이는 광경이 보였다. 광장에 모여든 사람 수는 일 분 일 초가 다르게 늘어났다. 길 가던 사람들이 인파에 합류하고, 언론사 차량도 더 많이 모여들어 성 베드로 광장에 자리를 잡겠다고 아우성이었다. - P404
텔레비전에 나타난 MSNBC 기자는 이제 정말로 불안한 표정이었다. 기자 옆에는 사망한 교황의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BBC에서 방금 들어온 긴급 속보입니다." 기자는 정말 이것을 보도해야 하는지, 승낙을 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았다. 곧 확인을 받은 듯, 그녀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정면의 시청자를 향했다. "일루미나티가 밝힌 바에 따르면 .…" 기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보름 전에 발생한 교황의 사망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궁무처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 P405
"바티칸은 변화에 능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현대화의 길을 가는 것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기피해온 일이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걸 바꾸고 싶어 하셨습니다. 현대 세계에 손을 내밀고 주님께 가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셨지요." - P417
비토리아는 사후 경직으로 교황의 입이 꽉 다물어져 있어 혀를 보기 위해 턱을 부숴야 할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양 볼이 움푹 들어가 입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황의 혀는 죽음 그 자체만큼이나 새까맸다. - P431
천장 높이 돔 안에 연기와 불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향로 줄은 남자의 손목에서 시작해 천장에 있는 도르래를 통과한 다음 성당 양편 벽에 있는 금속제 쐐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랭던은 쐐기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마저도 벽 높은 곳에 있었고, 만약 거기에 올라가 줄을 느슨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추기경을 불바다에 던져 넣는 꼴이 될 뿐이다. 갑자기 불길이 더 높이 타올랐고, 머리 위에서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남자의 발에서 피부 허물이 일어나고 있었다. 추기경은 산 채 불태워지고 있는 것이다. 랭던은 쐐기를 향해 달려갔다. - P459
투표 세 번, 선출 실패. 시스티나 소성당 안에서 모르타티 추기경은 이게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고 있었다. ‘후보를 보내 주시옵소서!‘ 이미 지연될 대로 지연된 상태였다. 후보 한 명이 사라졌다면 모르타티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 명 모두 사라지다니, 남은 선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3분의 2에 달하는 표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P463
모르타티 추기경은 시스티나 소성당에서 어리둥절한 동료 추기경들에게 둘러싸인 채 궁무처장의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모르타티의 눈앞에서, 촛불의 희미한 빛에만 의지한 궁무처장은 온몸이 전율할 만한 증오와 배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추기경들이 납치되고, 낙인이 찍히고, 심지어는 살해되었다는 얘기였다. 일루미나티라는 고대 조직의 이름은 모두에게 한동안 잊고 있던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 P469
"당신들이 전쟁의 승리자입니다." 이제 성당 구석구석까지 침묵이 전해졌다. 모르타티는 절망적으로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당신들은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러니 승리는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어느 때보다 그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과학이 새로운 하느님입니다." 궁무처장이 말했다. - P472
궁무처장은 추기경단을 가리켰고, BBC 카메라 기자는 본능적으로 그 손을 따라가 좌중을 비췄다. "우리는 이제 정말 시대에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모두 마지막 남은 공룡들입니까? 내가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정말로 가난하고 약한 자들, 핍박받는 이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한 목소리가 필요합니까? 정말로 여기 모인 이 사람들처럼 불완전하나마 도덕의 기준을 읽어 내고 길을 잃지 말라고 호소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이들이 필요합니까?" - P474
그는 지금까지 세 번 되풀이한 대로 벽에서 횃불 하나를 꺼내 들고 쇠붙이를 달구기 시작했다. 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달궈지자 감방으로 향했다. 안에는 남자 하나가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늙고, 혼자 남겨진 채로. "바지아 추기경, 기도는 했나?" 암살자가 말했다. 이탈리아인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암살자를 쳐다보았다. "네 영혼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 P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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