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에 버들가지 한들대고 꽃향기 물씬 풍기는 남국南國의 봄날복건성 福建省 복주부福州府를 가로질러 서문까지 곧게 이어지는 서문대로의 청석길이 봄볕에 부드럽게 반짝였다. 그 청석길 한쪽에 웅장한 저택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 P30

15세 사람이 동쪽 곁채에 모이자 임진남이 아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임평지는 돌아오는 길에 술집에 들렀다가 사천 사람들이 술집 손녀를 모욕해서 말다툼을 했고 결국 싸움까지 벌어졌다는 이야기와 상대방이 목을 붙잡고 억지로 절을 하라고 다그치기에 당황하고 분한 나머지 신발에 넣어둔 비수로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 채소밭에 시체를 묻고 술집 주인에게 은자를 주어 입 다물게 했다는 이야기를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 P55

사람들이 기뻐하며 문가로 달려가 보니, 임평지의 훤칠한 몸이 골목을 돌아나오는 것이 보였다. 양쪽 어깨에 짊어진 시체들은 바로 길가에서 죽은 표사들이었다. 임진남과 임 부인이 약속이나 한 듯 임평지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움켜쥐고 혈선을 넘어 달려갔다. - P79

"대장부답게 내가 한 일은 나 혼자 책임지겠다! 사천에서 온 여씨는 이 임평지가 죽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천 갈래 만갈래 찢어 죽여도 불평하지 않을 테니 복수를 하려면 이 임평지에게 하란 말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 무슨 영웅호걸이냐? 임평지가 여기 있으니 어서 나와 죽여라! 컴컴한 곳에 숨어서 남들을 괴롭히는 것은 간덩이가 콩알만 한 비열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 썩어문드러질 놈들아!" - P81

무예가 고강하신 거지발싸개 같은 아드님께서는 마중을 나오셨더군.
더구나 사부님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아들까지 죽였으니 결례도 이만저만한 결례가 아니지."
그 한마디에 임진남은 써늘한 기운이 등골을 훑어내리는 듯했다. 아들이 죽인 사람이 청성파의 보통 제자인 줄로만 알고, 무림에서 제법 명성이 있는 사람에게 중재를 청해 진심으로 사과하면 이 끔찍한 상황을 수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송풍관 관주 여창해余滄海의 친아들이라니, 이제 목숨 걸고 일전을 벌이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 P94

"우 사제, 사부님께 배운 72로 벽사검법을 똑같이 흉내 내었더니 임 총표두가 혼비백산하는 것을 자네도 보았지? 임 총표두, 아마 지금쯤 우리 청성파가 어떻게 임가의 벽사검법을 알고 있을까 궁금할 거요. 안 그렇소?"
그의 말대로였다. 그러잖아도 임진남은 청성파 제자가 어떻게 벽사검법을 펼칠 수 있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 P101

복위표국 공격은 사부님께서 친히 지휘하셨고, 방 사형과 우 사제는 선봉대였을 뿐이니 여 사제가 죽었다고 해서 방 사형 일행을 탓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 P121

그 한마디에 임평지는 등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이럴 수가, 내가 여씨 놈을 죽였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우리를 칠 계획이었구나! 그놈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야. 여창해가 직접 복주에 왔다면 최심장 한 번에 심장을 갈가리 찢은 것도 그자 짓이 분명해. 대체 우리가 청성파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악랄한 짓을 벌였을까?‘ - P121

"유정풍과 교분을 트려고 온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삼형제도 그 때문에 온 것은 아니니까. 금분세수를 한다는 말은 앞으로 유정풍이 다시는 검을 쓰지도 않고 강호의 시시비비에도 나서지 않는다는 뜻이야. - P127

‘저 낭자는 대사형에게 정이 깊은 것 같구나. 둘째 사형이 저렇게 늙었으니 대사형이라는 사람은 대체. 기껏해야 열대여섯밖에 안 되어 보이는 낭자가 어쩌다가 늙은이에게 마음을 주었을까?"
하지만 짚이는 데는 있었다.
‘참, 그렇지. 저 낭자의 얼굴에는 보기 흉한 얽은 자국이 덕지덕지 나 있어서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었을 거야. 홀아비가 된 늙은 술꾼을 선택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P142

여 관주의 사부인 장청자長靑구가 젊은 시절에 임원도林遠圖의 벽사검법에 당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았느냐?‘ 나는 당황했다네. ‘임원도라면… 임진남의 아버지입니까?‘ 사부님은 고개를 가로저으셨네. 아니다. 임원도는 임진남의 할아버지이자 복위표국의 창설자다. 당시 임원도는 72로 벽사검법으로 흑도에서는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다. 백도의 영웅들 중 몇 사람은 그의 기세를 보다못해 비무를 청했는데, 장청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벽사검법에 패배했지.’ - P168

일행이 길 쪽을 돌아보자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기름 먹인 우의를 입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으며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좀 더 가까이 오자 여승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제일 앞에 선 나이 든 여승은 키가 호리호리하게 컸는데, 찻집 앞에 이르기 무섭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영호충令狐中, 썩 나오너라!" - P181

"태산파 사형들께서는 천송도장이 형양성에 있을 때 영호충 사형이 의림儀琳 사매와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친히 목격하셨다 했습니다. 그 술집의 이름은 회안루고, 의림 사매는 영호충 사형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는지 몹시… 몹시 괴로운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 옆에는 온갖 나쁜 일만 저지르는 전… 전백광田伯光이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 P183

"그 말을 들은 전백광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영호형, 내가 탄복한 부분은 영호 형의 호기와 담력이지 무공이 아니오.’ 영호 사형도 말했습니다. ‘이 영호충이 탄복한 부분 역시 전 형의 일어서서 싸우는 솜씨지, 앉아서 싸우는 솜씨가 아니오." - P240

전백광은 그 말을 듣고 영호 사형을 흘끗거리며 물었습니다. ‘영호 형,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구려?‘ 영호 사형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오! 서서 싸우면 이 영호충은 천하 무림에서 겨우 여든 아홉 번째밖에 못 되지만, 앉아서 싸우면 첫 번째는 몰라도 두 번째는 될 거요!‘ 전백광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영호 형이 두 번째면 첫 번째는 누구요?‘ 영호 사형은 ‘바로 마교 교주 동방불패東方不敗요!‘라고 대답했습니다." - P245

사람들은 회안루에서 벌어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싸움을 떠올리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천문 진인과 유정풍, 문 선생, 하삼칠 같은 고수의 눈에 영호충이나 나인걸 정도의 무공은 별달리 뛰어날 것도 없지만, 이렇게 참혹하고 변화무쌍한 싸움은 강호에서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더욱이 아름답고 순결한 여승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니 과장되거나 거짓이 섞였을 것 같지도 않았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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