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천하영웅들께서 모처럼 왕림하시어 실로 저희 소림파의 영광이요 크나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희 방장 사형께서 급작스런 병환으로 여러 준현들을 뵙지 못하게 되어 노납에게 명하여 정중히 사과드리라 하셨으니, 이 점 널리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 P137

강호 인물 사이에 전해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무림에 추앙을 받는 삼대 세력으로 명교, 개방, 소림파‘ 를 손꼽는다고. 교파 중의 우두머리는 명교요, 천하 방회 가운데 어른은 개방이며 그리고 무학의 문파로는 소림을 으뜸으로 쳤다. 명교가 스무 살 남짓한 청년 장무기를 교주로 모셔 앉혔을 때만 해도 무림계 인사들은 세상 오래 살다보니 별 희한한 일을 다 본다고 혀를 찼는데, 이번에는 개방마저 철부지 어린 소녀를 방주로 추대할 줄이야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 P145

"삼가 명교 장교주님의 호령을 받들어 우리 개방 제자는 끓는 물,
타는 불더미 속에라도 거침없이 뛰어들겠습니다!"
구호를 외치듯 입 맞춰 지르는 함성에, 군웅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개방이 언제부터 명교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당(死黨)이 되었단 말이냐? - P147

"주장문, 장무기가 사죄하러 왔소."
말끝이 떨어지기도 전에 아미파의 여제자 10여 명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하나같이 버들잎 같은 눈썹들을 곤두세우고 얼굴에 온통 분노한 기색이 서리처럼 맺혀 있었다. 그러나 주지약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몸을 약간 틀어 답례했다.
"장교주님의 지나치신 예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장교주께서도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평정한 얼굴빛에 기쁨이라든가 노여움, 슬픔이나 즐거움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길이 없었다. - P157

"우리 같은 무림계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강호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면서, 하루하루 칼날의 피를 핥으면서 보내왔소. 이날 이때껏 살아오는 동안 여러분 가운데 손에 몇 사람의 목숨을 매달고 다니지 않은 분이 과연 몇이나 되겠소? 무공 실력이 강한 자는 몇 사람 더죽이고 배운 게 변변치 못한 약자는 남의 손에 목숨을 바쳐야 했소. 만약 사람을 하나씩 해칠 때마다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면.…흐흐흐, 지금 이 광장 안에 계신 몇천 명의 영웅호한 가운데 목숨이 붙어 있을 분은 아마도 손가락으로나 꼽을까, 몇몇 남지 않을 것이외다. 하씨 성을 가진 노영웅께 한마디 물읍시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차례도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으셨소이까?"" - P164

주지약이 싸느랗게 웃었다.
"장교주, 예전에 당신은 흐리멍텅해서 그렇지 호남아다운 맛은 제법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야비하고 질투가 많은 소인배였군요. 사내대장부라면 자신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법, 막칠협은 당신이 죽였는데 어째서 내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거죠?"
"뭣이, 뭐라고 했소? 나더러 일곱째 사숙을 죽였다고 했소?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단 말이오?" - P209

은리정은 보면 볼수록 분통이 치밀어 버럭 고함쳐 꾸짖었다.
"송청서! 이 배은망덕한 놈아,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구나! 무당파를 배반하고 뛰쳐나간 놈이 무당파의 무공으로 치사하게 목숨을 건져보고 싶으냐? 제 아비도 필요 없다고 저버린 불효자 놈이, 아비가 손수 가르쳐준 무공이 필요하기는 한 게냐? 천하에 비열한놈 같으니!"
사숙에게 호통을 들은 송청서가 얼굴이 벌개져서 마주 고함을 질렀다. - P237

장무기는 볼수록 기가 막혀 입이 절로 벌어졌다. 주지약의 채찍쓰는 수준이 소림사의 도액, 도난, 도겁 세 고승에 비해 높다고는 할수 없으나, 수법 하나만큼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아미파에 또 다른 사악한 무공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 주지약의 유령 같은 동작이나 솜씨가 멸절사태와는 전혀 딴판임을 깨달았을 때 가슴속에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범요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곁에서 중얼거렸다.
"저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야!"
그 한마디가 장무기의 심사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 P257

"좋소이다. 이 대결장에 나서서 겨루실 분이 없는 바에야, 우리는 영웅대회에서 미리 약정한 대로 금모사왕 사손을 아미파 장문 송부인께 넘겨드려 그분의 처분에 맡기도록 하겠소이다. 도룡도가 현재 어느 분 수중에 있는지 모르나 이 자리에 내놓으셔서 송부인이 거두어 보관하도록 합시다. 이것은 영웅 여러분 모두가 공식적으로 결정한 일이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소이다." - P269

"나도 알고 있어. 흥! 구음백골조(九陰白骨水), 백망편(白麟範)이라? 그따위가 천하에서 제일 강한 무공이라곤 할 수 없지."
뭇 사람들은 그녀가 산봉우리에 올라섰을 때의 위풍과 기세, 또 아리따운 용모와 표일한 자태에 눈길을 쏟고 있었기에 그녀가 코웃음치는 소리마저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군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찔끔 놀라 동료들끼리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나이 지긋한 연장자들은 생각이 한결같았다.
아미파의 주장문 부부가 쓰던 다섯 손가락 조법이 설마 했더니 역시 일백여 년 전 강호에 악명 떨치던 구음백골조였단 말인가? 주장문이 오늘도 꺼내든 저 기다란 채찍이란 게 백망편이었던가?‘ - P291

주지약의 다섯 손가락은 어쩔 속셈인지 사손의 머리 위에 수직으로 들린 채 멈추더니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는 곁눈질로 장무기 쪽을 차갑게 흘겨보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장무기, 그날 호주성 혼례식장에서 날 버리고 도망쳤을 때, 오늘같은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겠지?" - P311

"이렇게 다짐하거라. 소녀 주지약은 하늘에 맹세하노니, 오늘 이후 마교 교주 장무기에게 절대로 마음을 두고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그자와 혼인해서 부부로 맺어질 경우, 나를 낳아주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지하에서 유골조차 평온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내 스승 멸절사태는 죽어서 반드시 원귀가 되어 내 평생을 두고 밤낮없이 불안하게 만들 것입니다. 내가 만약 그자하고 자식을 낳게 된다면 아들은 대대로 비천한 노예가 될 것이요, 딸은 세세에 창녀 갈보가 될 것입니다. 자, 이렇게 내가 말한 대로 맹세하거라!" - P327

"큰아버님, 저 사람은 성곤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손은 장무기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추접스런 노승 앞에 버텨선 채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성곤, 네놈이 모습은 바꿨어도 목소리만큼은 바꾸지 못했구나. 헛기침 소리를 들었을 때, 난 벌써 네가 누군지 알아보았으니까!" - P349

눈부시게 비쳐 내리는 햇빛 아래, 광명세계로 돌아온 이들 두 사람은 마주 선 채로 움직일 줄 몰랐다. 초원벽력수 성곤과 금모사왕 사손, 옛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의 눈에서 시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 P369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똑같은 수법으로 똑같은 부위를 공격했다.
그리고 타격을 받아 생긴 상처 또한 같았다. 그러나 피아 쌍방 간의효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사손은 애당초 장님이었으므로 앞 못보는 두 눈에 성곤의 손가락이 꽂혀봤자 기껏해야 살갖 근육의 손상을 입는 것에 불과했으나, 성곤은 이제 난생처음으로 진짜 소경이되어버린 것이다. 앞 못 보는 성곤이 허겁지겁 양손을 허우적거리면 - P370

"성곤, 네놈은 내 일가족을 몰살했다. 오늘 네놈의 두 눈을 빼앗고 무공마저 전폐시켰으니, 이것으로 빚은 다 갚았다. 사부님, 내 일신의 무공은 오로지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것, 이제 내 스스로 남김없이 모조리 흩어버려 당신깨 돌려드렸소. 이제부터 그대와 나 사이에는 은혜도 원한도 없거니와, 그대는 영원히 나를 볼 수 없을 테고, 나 또한 영원히 그대를 보지 못할 거요." - P372

종남산 뒤편 골짜기에,
활사인의 고묘 있다네,
신조협려 내외분께선
강호에 자취를 끊으셨네! - P380

‘내가 송청서의 아내라고 자칭한 것은 임시방편으로 둘러댄 말이다. 그것은 강무기란 놈의 화를 돋우어 심신이 흐트러지게 하기 위해서였지. 그놈은 무공 실력이 워낙 뛰어나 본 장문으로서도 확실히 따르지 못하겠기에 그런 술수라도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아미파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나 한 사람의 명예 따위야 대수로울 게 뭐 있겠느냐!’ - P477

장무기의 마음은 단순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이것저것 더 생각해보고 싶지 않았다. 무공 실력은 최강자였으나 성격이 워낙 우유부단하여 세상만사가 눈앞에 닥칠 때마다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만 따를 뿐이었다. 어쩌다 부득이한 경우가 생길 때면 남의 뜻을 거역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자신의 견해를 버릴망정 남의 뜻대로 따르는 고지식한 일면도 갖추었다. 과단성이 부족하니 다른 사람의 권유에 모든 것을 떠맡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 P505

양과는 절대 주도적으로 행동해온 성격의 소유자다. 곽정은 매사 대국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처신했을 뿐, 그밖의 사소한 일들은 황용에게 밀어붙이곤 했다. 반면, 장무기는 한평생을 두고두고 시종일관 남의 영향을 받고 환경의 지배를 받아 그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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