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장로가 듣다못해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개방 원로로서 그의 수치심이 발동한 것이다.
"진장로, 주낭자를 놓아주시오! 우리 개방의 이 많은 제자들이 외부 사람 앞에서 꼭 이런 추태를 보여야겠소?"
전공장로에게 질책을 받고서도 진우량은 막무가내로 듣지 않았다.
"하하! 모르시는 말씀을, 대장부는 지혜로 싸울 것이지 뚝심만으로 싸우지 않는 법이외다. 장무기! 아직도 굴복하지 않을 테냐?" - P249

개방 제자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장무기는 어느새 양다리로 싸움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개방 방주 사화룡의 어깨 위에 떡 걸터앉은 자세로 목말타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른손바닥은 사화룡의 정수리에 얹히고 왼손은 뒷덜미 경맥을 움켜잡고 있었다. - P250

노랫가락이 유창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또 한 여자가 문턱을 넘어 들어섰다. 담황색 얇은 경삼을 걸친 그녀는 한 손으로 열두세 살가량 어린 소녀의 손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는 대문 앞을 가로막은 개방 제자들을 헤치면서 느린 걸음걸이로 천천히 앞마당 한가운데까지 들어왔다.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 일고여덟쯤 들었을까, 가냘픈 몸매에 용모는 아리땁기 그지없으나 얼굴에 핏기라곤한 점도 없이 너무나 창백했다. - P253

개방 사람들은 백의 처녀, 흑의 처녀, 담황색 얇은 경삼을 걸친 미녀, 못생긴 어린 소녀에 대해선 일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직 소녀의 수중에 들린 청죽봉(靑竹棒)만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통째로 투명한 벽록(碧綠)의 빛깔을 띠고 반들반들 매끄러운 정광(晶光)이 감도는 대지팡이였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몇 사람의 손때에 길들여졌는지 모를 정도로 고색창연한 윤기가 배어 있었다. 장무기가 보기에 그것 이외에 또 다른 특징은 없어 보였다. - P254

"아이고, 나 죽네! 사람 살려! 내가 한 일이 아니오! 나 혼자 한 짓이 아니란 말이야……! 진장로 …… 진장로가 시켰어..…"
가짜 방주는 얼굴이 됫박만큼이나 퉁퉁 부어오른 채 필사적으로 장봉용두의 손바닥을 도리질해 피하면서 고래고래 아우성쳤다. - P271

그는 방주로 있을 때 역대로 전해 내려온 스물여덟 초식의 항룡이십팔장 가운데 번거롭거나 별로 쓸모가 없는 부분을 과감히 줄여버리고 또 비슷한 초식을 융화시켜 항룡십팔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개방을 떠난 후 자신과 의형제를 맺은 대리국 왕세자 단예(段譽)와 소림사 승려 출신의 허죽(虛竹)을 사귀게 되면서, 이 절기를 나중에 영취궁(靈營宮) 주인이 된 허죽 선사에게 물려주어 대대로 전승하게 했다. 소봉이 비참하게 죽은 이후, 마음씨 너그럽고 착한 허죽은 이 절기를 또다시 개방 측에게 전해주었다. - P274

장무기와 개방 원로들의 부름은 허망하게도 텅 빈 하늘에 울리다가 이내 흩어졌다. 양소저, 담황색 경삼 차림의 미녀, 핏기 한 점 내비치지 않는 창백한 얼굴빛……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신조대협 양과와 고묘파 전인 소용녀 부부의 혈육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아는 이가 없다. 혹시 무당파 장문인 장삼봉이 여기 있었더라면 백년 전 소년 장군보 시절의 일을 기억으로 더듬어 추측해보기나 했을까. - P283

"조낭자, 솔직히 말해서 난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소. 또 당신과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내 마음속에 임자가 따로 있는 만큼 두 번 다시 당신의 번뇌를 불러일으키지 말아야 했소. 소민군주, 당신은 금지옥엽이오. 앞으로 이 장무기 같은 강호의 떠돌이는 잊어버리시오." - P337

이 무렵 양불회도 이미 은리정과 결혼한 몸으로 하객들을 따라서 함께 호주성에 왔다. 오랜 만에 양불회를 만난 장무기는 반가움에 싱글벙글 웃으면서 문안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여섯째 숙모님!‘ 하고 불러대어 양불회의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어 놓았다. 둘이서 맞잡은 손길에는 아주 오랜 옛날 철부지 오누이 시절 온갖 풍진을 함께 겪어가며 하염없이 서로 의지하고 아득히 머나먼 서역 땅으로 향하던 추억, 그리고 둘만이 아는 기쁨과 서글픔의 감회가 한꺼번에 묻어나 있었다. - P351

장무기와 주지약이 붉은 융단 깔린 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리려는 찰나, 돌연 대문 바깥에서 야무지게 호통 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뒤미처 푸른 옷 그림자가 번뜩 움직였는가 싶더니, 어느 틈에 청색 옷차림의 처녀 하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청 앞뜰에 들어섰다. 조민이었다. - P354

그러고는 두세 걸음 장무기 앞으로 더 나서더니 키가 작은 탓인지 발뒤꿈치를 들고 귓전에 가볍게 속삭였다.
"두 번째 요구사항은, 오늘 당신이 주소저와 혼례식을 올리지 말라는 겁니다."
"뭐라고?"
장무기는 일순 멍해졌다. 머릿속이 띵하도록 충격을 받아 제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조민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지금 올리고 있는 결혼식을 하지 말라는 게 두 번째 요구조건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 것은 이후에 생각나면 다시 말씀드리죠." - P359

장무기가 이제 막 대문 곁까지 뒤쫓았을 때였다. 돌연 눈앞에서 붉은 빛 그림자가 번뜩하더니 웬 사람이 조민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 다음 찰나, 붉은 소맷자락 밑에서 뻗어나온 다섯 손가락이 번쩍 치켜 들리기가 무섭게 조민의 정수리를 겨냥하고 내리꽂혔다. 그야말로 토끼가 뛰면 새매가 곤두박질쳐 덮친다더니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잽싸게 공격을 가한 것이다. 공격자는 오늘 경사스런 날의 주인공 신부, 바로 주지약의 솜씨였다. - P362

신부 주지약의 섬섬옥수가 얼굴을 가린 붉은 면사포를 확 뜯어내더니 그 자리에서 발기 발기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뭇 사람들 앞에 목청껏 낭랑하게 소리쳤다.
"여러분께서 친히 보신 바처럼, 저 사람이 날 저버렸을 뿐 내가 저사람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후로 나 주지약은 장씨 성의 남자와 맺은 인연을 모두 끊고 의절하겠습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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