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혼인은 인륜지대사인데 부의 혼인 문제를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어. 과의 나이가 아직 어려 사소한 말썽을 부리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전진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도 꼭 과의 잘못만은 아닌 듯하니 생각을 좀 해보자고."
"전진교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당신이 부친들 사이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양과는 보면 볼수록 제 아비를 너무 닮은 것 같아요. 그러니 내가 어찌 부를 그 아이에게 시집보낼 수 있겠어요?" - P91

양과는 원래 자신의 출생 배경이나 부모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고, 그것도 타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셨고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어머니조차도 양과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쁜 무리의 손에서 자랐다‘느니,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느니 하는 말을 듣자 머리가 멍해지고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 P92

"사실 내가 네게 무공을 전수해주지 않은 것은 널 위해서였는데, 그 때문에 도리어 네가 고생을 많이 했구나. 곽 백부는 항상 날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난 될 수 있는 한 그의 뜻을 받들려고 노력한단다. 곽 백부는 네가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고계셔. 곽 백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난 최선을 다해 널 가르칠 생각이다. 그러니 과야, 너도 백부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알겠지?"
양과는 황용이 예전과 다르게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말해주자,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 P99

"이분은 몽고 서정우군(西征右軍)의 원수를 맡으신 적이 있는 곽정이시고, 이분은 곽 대협의 부인이시자 개방의 방주이신 황 방주이십니다."
승려는 ‘몽고 서정우군의 원수‘ 라는 말을 듣자 별안간 눈을 크게 뜨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곽정을 위아래로 한차례 훑어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개방의 방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분은 제 사존이신 몽고의 성승 금륜국사(金輪國王)이십니다. 현재 대몽고국의 호국대사(護國大師)이시지요." - P116

그녀는 안색이 창백한 것이 병색이 완연했다. 촛불이 붉은 빛을 띠고 있는데도 그녀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붉은 색이 감돌지 않았다. 이런 창백한 모습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선녀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수려한 외모였다. 선녀를 본 적은 없지만 그녀를 보면 선녀 같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듯했다. 주자류와 곽도를 주시하며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그 백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양과는 그녀를 보자 깜짝 놀라는 한편미친 듯이 기뻤다. 마치 큰 철퇴에 얻어맞은 양 가슴이 쿵쾅거렸다. 양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그녀에게 뛰어갔다.
"선자! 선자!"
그녀는 바로 소용녀였던 것이다. - P137

"다른 사람이 맹주가 되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우리 사부님께선 당신의 사부가 맹주가 되는 것만큼은 못 참으시겠다고 한다."
"대관절 너의 사부가 누구냐? 지금 어디 계시냐?"
양과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네 눈앞에 계신다. 선자, 이놈이 선자께 인사를 올린다는데요."
소용녀가 곽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좌중은 잠시 조용해졌다가 이내 폭소가 터졌다. 저토록 여리고 아름다운데다 나이조차 어린소녀가 어찌 양과의 사부가 될 수 있으며, 무림의 맹주가 되겠다는 말인가. - P173

고묘파의 경공은 무림의 최고라 할 만했다. 다른 어떤 문파의 경공도 고묘파의 경공술을 따를 수는 없었다. 아마도 넓은 광야 같은곳에서라면 고묘파 경공의 장점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좁은 대청 안에서 상승의 경공술을 펼치니 그 오묘한 변화와 우아한 자태가 더욱 돋보였다. 더구나 그녀는 평생 동안 좁은 묘실 안에서 무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한정된 공간을 최대로 이용하는 몸놀림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P216

"제 딸을 낭자의 제자와 맺어주고 싶습니다. 과의 부모님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 일은 용 낭자가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오늘 뭇 영웅들이 모두 모였으니, 이 자리에서 연륜과 덕이 높으신 영웅께서 직접 혼사를 성사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P231

그러자 소용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과의 부인이 될 것이니 과가 어르신의 딸과 혼인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나 맑고 분명한 어투여서 대청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도 모두 똑똑히 들었다. 곽정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지만 양과의 손을 잡고 너무나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용녀를 보니 그 말이 진심인 것 같았다. - P234

"좋아. 너도 솔직하게 나오니 나도 돌려 말하지 않으마. 용 낭자는 네 사부이니 네 웃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남녀 간의 사사로운 정을 품어서는 절대 안 되는 거야."
양과는 이런 규율을 소용녀처럼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인정할 수는 없었다. 소용녀가 단지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줬던 사실 때문에 아내가 될 수 없다니. - P241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여러분들을 방해했나요? 누구를 해쳤나요? 선자는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었지만 난 선자를 아내로삼 을래요. 나를 천번 만번 칼로 도막을 낸다고 해도 난 선자를 아내로 삼을 거예요." - P241

지난날 양과와 소용녀는 〈옥녀심경〉의 이 검법을 수없이 연마했지만 그때마다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위험에 닥쳐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상대방을 걱정하는 마음을 앞세우니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상부상조, 상호보위. 이것이야말로 이 검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요지(要旨)였던 것이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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