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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도벽이 있는 말더듬이 책사냥꾼이 마흔 살이 넘어 모든 책을 잃고 쓰는 회고록이다.
단 한 권의 책
'세계의 책'은 모든 책의 책이다. 이 책 이외의 모든 책은 '세계의 책'의 주석이며 이 책을 아는 사람은 찰리 한 명 뿐이다. 오래전 알 모히드 바함이라는 술탄의 의전담당 신하가 쓴 아홉권 째 책이 '세계의 책'과 내용은 같았다. 하지만 의미가 달랐기 때문에 술탄에 의해 참수당했다. '찰리 이야기'는 리차드 브라우티건이 지은 책 사냥꾼에 관한 책이고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세계의 책'에 관한 책이다.
뭔가 복잡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주인공인 반디가 자신의 경험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써내려 갔듯이 나도 읽은지 며칠되지 않은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의 내용이 가물거려서 정확하게 쓸 수가 없다.
오수완. 1970 ~ . 경희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한 한의사.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으로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책사냥꾼에게 들어온 의뢰
반디는 한 때 유명했던 책사냥꾼이다. 책사냥꾼이 뭐냐구? 책을 찾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 책을 찾아주는 사람을 말한다. 책을 '찾는 것'이 이들의 일인데 그 방법을 따로 가리지는 않는 것 같다. 때로는 책도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책강도가 되기도 하고 책사기꾼이 되기도 한다. 책사냥꾼은 불법적인 일을 하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딱히 합법적인 일만 하는 것은 아닌 걸 보면 많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반디는 처음 '찰리 이야기'를 읽고서 책사냥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그저 헌책방을 운영하는 중이다.
지루하게 헌책방을 지키는 반디에게 책사냥꾼 사이에 전설로 일컬어지는 책방인 '미도당(헌책방의 끝판왕)'으로부터 책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찾으려는 책은 '베니의 모험'. 이윤희라는 미도당의 실장이 찾아와서 의뢰한다. 원래는 검은별이라는 반디의 라이벌이기도 한 책사냥꾼에게 의뢰했으나 책을 찾던 검은별의 행방이 묘연하다. 어쩌면 검은별은 책의 가치를 알아채고 '베니의 모험'을 찾은 후 잠수를 탈 수도 있다. 검은별보다 먼저 책을 찾아 미도당에 가져오는 것이 반디의 미션이다.
현실과 상상을 교묘하게 묶어 놓았다
저자는 오수완. 한의사이면서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한 멋진 경력을 자랑한다. 아마도 다독가인 듯하다.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모두 아울러서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이다. 설정이 흥미로운데, 오수완이 만들어 놓은 책의 지도에는 '세계의 책'이 그 정점에 놓여 있고, 그 주변의 다음으로 중요한 책 아홉 권이 자리잡고 있다. 아홉 권의 책을 찾는 실마리가 '베니의 모험'에 있고 '베니의 모험'은 반디를 다른 책으로 인도한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다른 책들과 존재하지 않는 책들에 대해 내용까지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실제 책과 가상의 책이 섞여서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또다른 재미있는 설정은 책파동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한다든지, 미하엘 엔데의 《모모》, 《끝없는 이야기》같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들인데!) 이런 장치들을 굉장히 그럴싸 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에 책파동 시위가 있었나 검색해 보기도 하고 있지도 않은 책이 정말 있는 책은 아닌지 찾아 보면서 책을 읽었다. 현실과 상상을 참 절묘하게 엮어 놨다.
모든 것은 미도당의 안배
우여곡절 끝에 반디는 모든 책을 찾고 미도당의 중심부로 들어간다. 거기서 미도당의 주인인 윤선생의 아버지를 만나고 그는 반디에게 미도당을 물려받을 것을 제안한다. 이 노인을 찾아가는 곳은 미로인데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이 연상되는 장치이다. 어쨌든 반디는 노인의 제안을 받으들이지 않고 열시 우여곡절 끝에 미도당의 서가는 허무하게도 불에 타고 소중하게 보관되어온 미도당의 고서들은 재가 되고 만다.
현학으로 도배되어 있다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초반부를 읽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굉장한, 혹은 굉장해 보이는 '세계의 책'에 관한 역사를 늘어놓는데, 사실이 아니다. 가상의 역사를 만들어 놓고 그 틈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역사의 한 부분을 새로 만들어 낸 현학적인 모습은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도 싫어하는 글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어서 짜증이 올라왔다. 대명사를 남발해서 적절하지 않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소리와 만나는 장면에서 그렇다. 대명사를 온통 남발하고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이건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게 아니라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장치다. 덕분에 초반부에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대단하지도 않은 내용을 흐릿하게 표현하고 그 순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부담감을 갖게 한다. 물론 뒷부분에 가면 그런 부분들은 잊혀진다. 70 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내가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는 읽는 속도도 나지 않는다. 어려워서가 아니다. 읽다가 앞에서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쓸데없이 계속해서 앞장을 들춰봐야 했기 때문이다.
★★★
초반은 어지럽고 중반 이후는 명쾌하다. 초반에 읽다가 지칠 수 있다. 굉장히 여러가지 책을 요약했고 가상의 책을 만들어 냈고 또 그 책들을 인용했다. 각종 책들의 개요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았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으면 쓸 수 없는 장치다. 좋게 말하면 지적이다. 나쁘게 말하면 너무 현학적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직후에 곱씹어 봐도 내용의 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체적인 플롯이 흥미롭지는 않다. 특히 책을 찾는 과정이 정교하지 않다. 다음 책을 찾아가는 과정은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더라도 가장 흥미로운 장치인데 도대체 별다른 실마리없이 다음 책을 찾고 또 찾는다. 전체구조는 만들어 놨지만 각주가 약했다. 추리소설에서 발생한 사건이 충격은 줬지만 트릭이 형편없어서 읽는 동안 투덜대면서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홍보용 수사이긴 하겠지만 하루키의 위트, 보르헤스의 상상력, 움베르토 에코의 지식을 모두 갖췄다고 쓰인 부분은.. 너무 나갔다. 각 분야의 끝판왕들을 모두 겸비했다고 평가를 받을 때, 나는 얼굴이 좀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초반의 지루함을 잘 이겨내야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중반 이후에는 읽는 속도가 잘 나오고 사뭇 흥미롭기도 하다. 책에 관한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부은 것은 좋지만 잘 정리되지 않아 번잡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