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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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the ECONOMY, Stupid.' '내가 갑철수입니까?'
장면 1.
1992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공화당의 아버지 부시였고,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에 걸프전을 이끌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은 미국 뿐이라는 것을 전세계에 각인시켰고, 한때 국민적인 지지율이 90%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국민들을 보수화시키는 경향이 있고, 보수당인 공화당의 재선 대통령 후보인 부시가 4년의 임기를 연장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부시의 경쟁자는 아칸소 주지사 출신인 빌 클린턴. 미국 사회는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담론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빌 클린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로 부시 행정부가 놓치고 있었던 경제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그리고 재선을 노리던 부시를 물리치고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 되었다. 'It's the ECONOMY, stupid'는 미국의 선거 역사상 가장 멋진 구호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보수가 만들어 놓은 담론을 진보의 담론으로 바꾸어 놓은 성공적인 정치 캠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장면2.
2017년 봄, 박근혜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탄핵되어 대통령의 자리에서 쫒겨나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치뤄지고 있었다. 당시 국민의당 소속이었던 안철수 후보는 인터넷 상에서 'MB 아바타', '갑철수'라는 공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4월 23일 3차 TV토론회가 열리는 날, 안철수 후보는 '제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제가 MB아바타입니까?'라는 질문을 문재인 후보에게 던진다. 문재인 후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TV를 시청하던 시청자들은 달랐다. 그 전에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던 유권자들의 머릿속에는 '갑철수'라는 말과 'MB아바타'라는 말이 깊이 박혀 버렸고, 다음날 온라인 포털의 검색 상위권은 '갑철수'와 'MB아바타'가 차지했다. 이후로 한때 지지율 1위까지 차지했던 안철수 후보는 자신이 '갑철수'도 아니고 'MB아바타'도 아니라고 유권자들을 설득해야 했고, 스스로 만든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지지도가 급격히 하락하여 대선 경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19대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위의 두 장면은 선거 운동에서 프레임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례들이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민주당 후보로서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효과적인 선거 구호로서 아버지 부시를 물리치고 미국의 42대 대통령이 된다.


프레임 이론의 고전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부제 : 진보와 보수, 문제는 프레임이다>를 2004년에 썼다. 햇수로 따져 봤을 때, 이제 겨우 15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프레임이라는 말이 지금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지금은 프레임이라는 말이 사회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상대방을 내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가둬서 담론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각 정치세력들이 이른바 '프레임 전쟁'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프레임을 설명할 때는 반드시 이 책이 언급이 된다. 이제 겨우 15년밖에 되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정치학의 '고전'이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제목 단 한 줄로 프레임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사회의 담론에서 '코끼리'가 주제가 되어 있고, 나는 코끼리에 대한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때, '코끼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코끼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코끼리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서 모든 담론이 코끼리를 중심으로 찬성, 반대의 입장을 가지게 되면 내가 원하는 얘기는 할 수 없다. 이 때는 아예 코끼리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다른 주제를 꺼내야 한다. 이것이 프레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클린턴 후보는 효과적으로 프레임을 전환하는데 성공했고, 안철수 후보는 자신에게 불리한 프레임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꼴이 되었다.

 


조지 레이코프 George Lakoff. (1941 ~ )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진보학자. '은유'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의 생각을 파헤쳐 프레임 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보수 : 진보 = 엄격한 아버지 : 자상한 부모
조지 레이코프에 따르면,
사람들은 국가를 하나의 커다란 가정으로 여기고 있다. 국가는 확장된 가정의 한 형태로 책에서는 국가를 가정의 '은유'적 형태로 규정한다. 보수와 진보가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든 요소를 집어 넣고 그 결과를 도출한 후 역으로 그 요소에 맞는 가정을 추론해서 모형을 만들었다. 보수는 국가를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으로 생각하고, 진보는 국가를 '자상한 부모의 가정'으로 생각한다.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는 이 차이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엄격한 아버지는 가정을 보호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들에게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을 제시하고 가르친다. 선고 악은 아버지가 판단을 하며 아이들(과 배우자까지)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여야 하고, 잘못된 길을 걷는 자녀들은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을 받아야 한다. 훈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은 사회에서 성공할 것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회로 확장해 보면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제대로 훈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제대로 훈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사회의 성공은 지극히 개인적인(혹은 가정적인) 요인으로 결정이 된다. 사회에서 뒤떨어지는 시민은 훈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보살핌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훈육이 없는 보살핌은 시민을 망치고 결국은 사회를 망치게 된다. 여기서 엄격한 아버지는 실제 아버지, 부유한 사람, 백인, 남성, 이성애자, 서양인 심지어는 미국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이것이 보수의 프레임이다.


반면에 진보가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자상한 부모의 가정'은 엄격한 부모의 가정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이다. '자상한 부모의 가정'은 가정에 대한 책임이 '아버지'가 아닌 '부모'에게 있다. 성별 중립적이다. 부모의 역할은 훈육보다는 보살핌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고, 자신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키워줘야 하며,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을 해야 한다. '자상한 부모의 가정' 역시 사회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사회는 뒤떨어지는 시민들을 보살펴야 하고, 그들과 공감을 해 나가야 하며 시민들이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할 때에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한다. 계급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이것이 진보의 프레임이다.


굉장히 단순화시키고 도식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 기준이 모든 사회에서 들어맞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더욱 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일괄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 설명하는 방법이 탁월하다.

 


정치에 있어서 어떻게 유리한 프레임을 선점하는지가 갈수록 중요해 지고 있다.


프레임을 차지하기 위한 보수의 전략
당연히 이것은 미국의 이야기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모형으로 볼 때, 보수에는 사회의 기득권층, 즉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될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에 비해서 돈과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똑똑한 사람들은 보수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보수 진영은 사회가 진보화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1970년대부터 보수적인 가치관을 미국에 심기 시작한다. 각종 연구소에 수많은 돈을 쏟아 부어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보수를 돕는 각종 캠페인을 쏟아낸다. 똑똑한 사람들이 점점 보수 진영으로 몰려 들기 시작하고 이들은 '엄격한 아버지'상을 무의식 중에 미국인의 머릿속에 심어 넣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엄격한 아버지' 상을 불어 넣는 것은 정치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은유가 되어 사회 전체는 '엄격한 아버지' 상에 찬성하는 것은 '선'이고, 이에 반대하는 것은 '악'이라는 생각에 빠진다. 저자는 이후 보수 진영에서 개인의 자유와 기업의 지배, 결혼, 테러에 대한 가치관을 보수가 어떻게 자신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는지 밝히고 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 현재 미국의 정치 상황이다. 보수가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진영을 응원하는) 조지 레이코프는 가난한 사람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정책을 펼치는 보수주의자에게 투표를 한다고 설명을 한다. 현재 미국의 정치 상황은 근래 몇 년 동안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수십년 간 보수주의자들이 쏟아부은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에 단순히 구호 몇 마디를 바꾸고, 유권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하는 것이 이익인지를 설명해도 제대로 통하기 힘들 것이라고 충고한다. 프레임을 바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진보가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언론은 사회의 프레임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내용
이 글을 읽으면서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옳다. 나도 그렇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상대방 진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벗어나서 나의 프레임을 담론의 중심에 놓을 것인지, 그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술)을 찾기 위해서 이 책을 손에 들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은 위에서 제시한 두 개의 예시와 함께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상대방의 프레임을 박살내고, 나의 프레임을 만드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책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사회에서 보수가 어떻게 자신들의 프레임을 짜 왔으며,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주의자에게 투표를 하고, 진보는 어떻게 하면 이 프레임을 부수고 정치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책이다. 오로지 미국의 정치 지형을 생각해서 쓴 이 책을 통해 프레임에 대해 참고할만한 통찰을 얻을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프레임의 기술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는다.


사실상 오로지 제목만으로 큰 통찰을 보여 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 자체가 코끼리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코끼리라는 말을 자꾸 하려는 상대방의 의도를 무시하고 다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제목에 담겨 있는 뜻인데, 책의 내용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에는 언론보다 SNS가 사회적인 담론의 장으로서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리한 프레임을 형성하려는 정치권에서는 SNS를 장악하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SNS의 특성상 보수 진영보다는 진보 진영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
이 책의 제목이 어째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라는 조지 레이코프의 다른 책이 있다.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책의 제목이 이 책에 더 어울린다. 추측해 보면 아마도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도 이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일 것 같다. 제목이 반은 먹고 들어 가는 책이다. 혹시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영어 원제도 <Don't Think of an Elephant>로 한국어 제목과 같다.


진보와 보수의 출발점을 너무 단순화시켜 놓은 것도 좀 마음에 걸린다.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단순하게 후려쳐서 설명하는 것이 큰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너무 도식화된 모형은 모든 현상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억지로 꿰어 맞출 수도 있기 때문에 왜곡된 이해를 불러 올 수도 있다.


위의 두 가지를 감안하더라도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이론을 단순화시키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나쁜 점도 있지만 명쾌하게 이해를 돕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중에 미국의 정치상황에 빗대어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다. 보수쪽으로 기울어졌던 운동장이 진보쪽으로 기울어진 현재의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에서 보수와 진보가 어떻게 전략을 펼쳐야 할지 힌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정말 민주당이 진보인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판단할 바는 아니다) 단, 위에서 밝힌 것처럼 선거전술에 대한 힌트를 얻기는 힘들다. 이 책은 굉장히 장기적인 전략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특히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10주년 개정판인데, 첫 책이 나온 이후에 관한 내용이 굉장히 많아서 세부적인 내용이 첫 책과는 완전히 다른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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