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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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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8년 이후, 어쨌든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누군가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언제든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겠냐만은, 2008년 이후의 자본주의는 확실히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위기의 문제가 곧잘 '인간의 위기'로 치환되곤 하고 마는데, 그것은 철의 여인이 말했던 '대안이 없다'라는 인식탓이다. 2008년 위기 이후 탐욕이라는 인간의 오류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망가뜨렸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위기때마다 위기의 근원을 드러내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어떤 장치를 덧대기 바쁘다. 


그래서 우리는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 문명의 멸망은 상상하기 쉬워도,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체제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한 종교적 세계를 살고 있다.


이 책,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쓴 [부채]는 바로 이런 '신앙'을 정조준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인간을 자본주의 이후에 두었던 일종의 편견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체계가 사실은 가상의 원시시대에 대한 가정에 기반을 둔 불안전한 체제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본주의 이후를 고민하는 것이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류학자다. 인류학이라는 것은 과거 인간의 삶을 직소퍼즐처럼 맞추는 자이기도 하지만, 현대인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원시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내는 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인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에는 수많은 인간사회의 사례들이 나온다. 일군의 경제학 책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수식이나 그래프 없이도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핵심으로 치고들어 간다.


[부채]를 관통하는 질문은 서론에 저자가 직접 겪은 일화에서 나온다. IMF의 탐욕은 이해가 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강제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 빚을 떠 안긴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 빚을 갚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 국가들은 돈을 빌렸잖아요! 돈을 빌렸으면 갚는 것이 당연하죠."(6)


이 말은 저자가 나름 진보적이라는 활동가에서 들은 호소다. 그렇다. 우리가 처해있는 경제적 상황은 빚으로 쌓아올린 도덕적 요구에 처해 있는 막다른 길이다. 저자는 이런 도덕적 요구가 사실, 교환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가설적인 전제에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교환=경제의 등식이야 말로 인간경제의 제 모습을 잃게 만든 주범이다.

"인간의 모든 삶을 교환으로 압축한다는 것은 곧 다른 형태의 경제적 경험(계급조직, 공산주의) 모두를 제외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들 중에서 성인 남자가 아닌 까닭에 일상적 활동을 물물교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현장에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229)


 

이를테면, 아담 스미스가 상상하는 물물교환의 그림을 상상해보자. 물고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곡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담 스미스는 그 둘 간의 교환 비율로 슬쩍 넘어가지만, 이런 교환상황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내가 물고기를 가지고 있을 때 상대방이 내가 필요한 곡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다. 그게 일상적으로 물물교환이 가능할 정도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아담 스미스나 현대 경제학 교과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원시적 물물교환의 그림이 사실상 가상의 전제에 불과하다는 것은 단순한 사고 실험을 통해서 쉽게 반박된다. 


사실 생각해봐도, 어린 시절 동네 가게는 늘 외상장부가 있었다. 라면 두개, 파 한단을 그에 맞는 돈을 주고 가져다 먹진 않았다. 그저 "아주머니, 파한단 가져갈께요~"라는 말한마디로 외상이 성립되었고 한달에 한 두번 한꺼번에 그간 밀린 외상을 갚았다. 그것이 상당히 일상적인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누구나 공유하는 사실적 경험이 경제학 교과서의 비현실적인 상식에 의해 전도되었다. 이에 가장 비근한 사례는 바로 신용카드다. 실질적인 현금지급이 없어도 지불이 가능한 것은, 아담 스미스가 상상했던 물물교환이 얼마나 예외적인 것인지 보여준다. 문제는 그렇게 형성되는 신용경제를 위해서는 이후에 지불가능한 소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이런 국가 혹은 사회의 조건에 대해서만은 침묵한다.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적 시장은 왜 등장하게 되었을 까. 그것은 바로 통치의 문제와 연관된다. 


"만약 자신의 영토 안에 금광과 은광들이 있다면, 국왕들은 보통 그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금을 채굴해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찍어 국민들 사이에 유통시켜놓고는 국민들에게 그 돈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89)

 

 


이것은 시장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데, 여기서 시장은 단순히 교환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을 구성원으로서 구속시키는 기제를 의미한다. 이런 기본적인 부채를 바탕으로 개개인은 국왕이 발행한 국채하에 결속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런 인류학적 가설을 통해서 사실 물물교환의 현대적 형식으로서 화폐경제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장이 경제활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지배라는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진 부채는 사실상 사회적 부채에 가깝다. 그리고 부채가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제나 위기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부채위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 점에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인류학적 사실로 제시하는 '희년' 제도는 매우 흥미롭다. 이를테면 페르시아의 '깨끗한 서판' 사례가 그것이다. 부채를 진지 7년이 지나면 왕의 명령으로 기존의 부채를 청산하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희년이라는 것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된 방도였다는 점이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부채의 기본적인 속성으로는 '평등'이 있는데, 그것이 상하관계와 같은 계급적 관계로 치환될 때 사회를 구속하고 있는 도덕적 규범이 파괴되고 만다. 이를 테면, 면대면 사회의 경우 부채가 사회관계에 우선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고대왕국은 부채위기를 부채 탕감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이런 부채위기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 하지만 누구도 그와 같은 부채를 일괄해서 탕감해주는 방식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은행이라는 제도는 과거의 면대면 사회를 타인과 타인의 관계로 만들었고, 사회의 도덕적 구속원리는 부채의 비도덕적 구속원리와 병렬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방법이 다를 것은 없다.


"이것이 20세기의 위험한 함정이다. 한쪽엔 시장의 논리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 개인으로 출발한다고 상상하길 즐긴다. 다른 한쪽엔 국가의 논리가 있다. 그 논리 때문에 우리 모두는 상환이 절대로 불가능한 빚을 안은 채 시작한다. 우리는 시장과 국가는 정반대이며, 시장과 국가 사이 어딘가에 진정으로 인간적인 가능성들이 있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다."(127)


 

 

대안은 화폐의 다른 기능, 즉 저자가 표현하는 인간경제를 위한 속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저자가 수많은 인류학적 사례를 통해서 밝히고자 한 것은 화폐가 단순히 교환가치를 담고 있는 '소비장치'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업경제와 내가 "인간경제"라고 부르는 것, 즉 돈이 물건을 구입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끊는 사회적 통화의 역할을 하는 경제의 차이를 밝히려 한 것이다."(283)


사실 저자는 이런 부채의 속성, 즉 인간과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성의 한 형태로서 부채를 발굴해냄으로서 채무이행이라는 현재 경제체제 내의 도덕적 명령이 사실상 정치적 지배체제의 폭력적 수탈의 한 형태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부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은행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빚을 갚지 않으면 경제체제가 붕괴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은행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을 납세자의 돈으로 지원해주는 상황은 부채를 둘러싼 도덕의 전도된 풍경을 여실히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현재의 금융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채무자가 빚을 갚으라는 요구를 거부할 때 가능하다는 암시를 읽는다. 그래도 인간의 삶은 지속될 것이며, 오히려 삶 자체가 자유와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읽는다. 아마도,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는 빚에 있을 것이고, [부채]의 저자가 제안한 빚의 백지화가 그것을 새로운 대안적인 체제- 저자가 말한 바 '인간경제'-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오랜 만에 마음껏 생각을 뻗어볼 수 있는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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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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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서평을 보면, 평범한 미국 노동법 변호사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체제 혹은 복지체제를 접하면서 느끼는 일상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에세이로 소개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맴돌았던 생각은 '한미FTA'였다. 많은 이들이 한미FTA의 문제에 대해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최대의 수출시장인 미국에 우리기업이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도록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북미권에 수출되는 현대자동차의 자동차가 대부분 멕시코에서 생산되고 있다면? 삼성전자의 텔레비전 등이 국내에서 생산되는 비율이 10%도 안된다면? 


삼성이나 현대기업이 이익을 버는 것이 산술적으로 고용으로 이전되기 어렵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아웃소싱된 생산체제에서는 상식과 가깝다. 그런데 협정문도 읽어 본적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날림으로 통과시킨 한미FTA는, 사실 수출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한국경제 체제의 미국화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소는 2006년 보고서를 통해서 자유무역협정의 체결은 한국경제체제의 외부적 충격을 제공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경제체질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한 바 있다. 경제적 체질이라고?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건강보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럽인은 단순히 돈을 더 쓰는 게 아니다. 미국인과 달리 그들은 효과적으로 돈 쓰는 방법을 안다.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는 독일의 의료보험도 관련 총비용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퍼센터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의료보험 관련 총비용은 GDP의 17퍼센트나 되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물론 보험에 가입한 중산층도 종종 혜택을 받지 못한다. 64쪽

이게 바로 체질의 문제다. 정부는 건강보험이 안전할 것이라 주장하지만, 카피약의 제조가 어려워지면 현재 건강보험의 40%이상을 차지하는 약값비중이 높아지고 결국 보장성의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건강보험이 있음에도 별도의 민간보험을 가입해야 하는 '시장'이 생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삼성경제연구소가 말한 체질 개선이다. 


우리는 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독일의 길이 아니라 미국의 길로 가고자 하는걸까. 손쉽게 독일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의 삶과 미국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의 삶을 비교해도 쉽게 알 수 있을 일을 말이다. 


결국 배경에는 제조업 경시와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놓여 있다고 본다. 이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제조업이 국민성과 연관된다는 저자의 평가는 이 책의 백미에 가깝다. 


제조업에 신경 쓰기 싫다고? 뭐, 괜찮다. 노동운동도 생각하기 귀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국민성'이 어떻게 변화할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제조업과 노동운동의 존재 여부에 따라 국민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 미국인은 숙련된 제조업 노동자처럼 독립적이고 기술 지향적이 될까? 아니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갓 취직한 신입 사원처럼 서비스 지향적이고 의존적이 될까? 140쪽


개인으로 이 주장이 이 책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에서, 지금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산업의 선진화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로라고 믿고 있다면, 이는 심각하게 제고할 필요가 있다. 얼마전 장하준 교수가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저자는 능청을 떨며, 미국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냐라고 말한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이 있음에도 그것이 막혀 있는 미국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시간이 조금더 흐른다면, 우리 역시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미FTA가 걸려있는 지금이, 바로 그 갈림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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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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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통제되지 않는 지성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있을까. 고국에서 버려져 스위스-프랑스-영국을 오갔던 루소의 행적을 보면, 흡사 예수의 고난이 떠오를 정도다. 그런데 이 책은 루소의 고난을 정조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을 보면 루소의 처지가 참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을 탄생하게 만든 배경은 아니다.


이 책의 리뷰에 앞서 필요한 것은, 왜 지금 '루소와 흄'이냐는 질문일텐데 아무래도 해답은 이 책의 저자들이 보여준 전작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들의 전작 역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짧은 논쟁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꽤나 흥미로운 책이었고, 이 책 <루소의 개>는 그런 전작과의 모티브와 유사하다. 


이야기로 들어가보면, 자기 신념이 강하고 결벽증이 강한 루소는 자신이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고향에서도 쫒겨나 스위스의 구석 지방에 정착한다. 하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시혜를 거부했던 그는,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다. 이를테면, 흄과 루소가 최초로 갈등한 마차의 사례를 보자. 너무나 한적한 곳이어서 마차를 이용할 경우 왕복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곳인데 루소의 후원자가 그를 위해 마차를 보내며 그냥 보내면 분명 타지 않을 것이 확실하여, 편도값만 미리 내고 루소로부터 편도의 비용만 받도록 했다. 그런데 루소가 이 사실을 눈치챈다. 그러면서, 의심은 흄으로까지 확장되어, 흄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기만했다는 의심을 하게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쯤되면, 루소는 누구에게나 민폐를 끼치는 독특한 인간형이라 할 만하다. 


이 책 <루소의 개>는 사실 어떻게 영미권의 합리주의가 루소류의 자연주의를 가두는데 실패하는지를 보여주는 우화소설같기도 하다. 즉, 흄이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는 합리주의와 교양은, 루소가 보여주는 기행과 고집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합의주의의 그물은 자연인인 루소를 가두기엔 역부족이었다는 말이다. 


철학적 담론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두 사람은 종교, 인간 본성, 선한 삶, 정치, 경제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 했다. 하지만 진정 그들을 갈라놓고 떨어뜨려 놓은 것은 지식으로서 그들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217쪽


이런 지식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명훈' 논쟁이 떠오른다. 서울시향의 지휘자인 정명훈은 20억원이 넘는 서울시 지원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온통 특혜성이었던 것이다. 논란이 되자, 진중권은 예술에 대한 투자에 대해 지원예산의 많고 적음으로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논평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2008년 국립무용단 해체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다시 재론되었다. <뼈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의 저자 목수정은, 당시 파리에 있던 정명훈에게 무용단 조합원들의 의견을 담은 전단을 전달하기 위해 정명훈이 있던 공연장을 방문한다. 시간은 밤 10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정명훈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논란이, 스스로도 파리 예술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국내 예술인들의 처지에 눈을 돌리지 못한 정명훈이 아니라 밤 10시라는 시간에 예의가 없게도 정명훈을 찾아간 행위와 예술가에게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주장으로 번졌다.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 미학자라 말하는 진중권은, 스스로 보였던 정치적 당파성이 무색하게도 예술 지상주의로 숨어든 반면에, 스스로 운동권의 논리에 답답함을 느껴 진보정당의 연구원 자리를 벗어난 목수정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당파성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예의없는 해고에 저항하는 싸움에 예의를 들먹이는 것은 전형적으로 루소를 공격했던 당시 프랑스 사교계의 특징과 닮았다. 이런 차이는 아무래도 진중권이 자신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상아탑에 머물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목수정은 당파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터박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루소가 평생 함께했던, 그래서 연인이기도 했던 이의 매력은 원시성이었다. 세상이 잘난 시대에 가장 원시적인 행태는 자본과 권력의 공격 아래에서 나타난다. 진중권의 정명훈 옹호가 고까웠던 이유는 그가 그렇게 강조하고자 하는 예술의 자율성과는 별개로, 정명훈의 서울시향이 사실상 세종문화회관의 법인화를 위해 도입된 것이며, 환경파괴논란이 벌어진 한강예술섬 역시 정명훈의 서울시향을 위한 전용공간을 위해 구상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다. 


아무래도 루소에 대한 흄과 웰풀의 '공작'을 보면서,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하지만 이를 당시 지식계의 허영과 신분제가 이뤄놓은 서구 근대의 합리주의가 체계적으로 식민화한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 책은 단순히 역사서를 넘어서는 시사점을 준다. 결국 루소에 비해 흄이 내상을 더 많이 입게된 결말은 흥미롭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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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광선 2020-02-29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꼭 읽고 싶게 만드는 멋진 리뷰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요이~~ 땅!!

 

 

 

누구는 유령이라고 하고, 누구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이름도 모른체 안방에 들여놓은 한 경제체제에 대해 '애비'를 말하듯이 두려워 하는 것보단 그 정체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우리의 신자유주의가 시작한 기원을 알고 있다면 그 끝을 말할 수도 있으리라. 고로 끝을 말하고 싶다면 시작을 알아야 한다.

 

 

 

 

 

 

 

 

아니키스트로 소개되는 인류학자 그레이버의 경제사. 시장만능주의에 지쳐가는 사이에, 시장만 없으면 모든 것이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교환이 있는 한 관계의 한 형식으로 경제는 존재했다. 있던 것과 새로 생긴것을 구분할 수 있으려면, 과거의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볼 필요가 있다.

 

 

 

 

 

 

새롭게 번역된 지젝의 책. 지젝이 '지젝지젝'거리며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싶다. 게다가 지젝의 사진을 대문으로 삼은 로쟈의 번역이라니. 지젝보다 더 궁금하다. 

 

 

 

 

 

 

 

 

  

 

분명 진화론은 모든 것의 이론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진화해왔고, 인간과 관계된 것들은 진화해왔다. 어떤 면에서 모든 변화가 곧 진화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진화해왔다면 어떤 길로 왔고 어떤 길로 갈지 궁금하기는 하다.

 

 

 

 

 

 

 

 

헉헉~~~ 40미터 달리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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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mos 2011-12-0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이 땅! 자기 반성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논리와 사고의 출발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요이~~ 이거 일본식이라는 것 알고는 계신가요? 일제의 썩은 잔재를 즐어움으로 간직하고 게신 분께, 아직도 그러고도 윤봉창 열사 앞에 서있습니까?

냥이관리인 2011-12-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몰랐습니다. 고치도록 할께요^^ 감사합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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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테면, 이 책은 '세겹의 페스츄리'가 가득한 빵 봉지 같다. 시와 시에 대한 이야기가 한편, 이와 조응하는 철학 한 자락, 그리고 시와 철학의 종합... 마지막으로 읽을거리 목록. 

그리고 강신주라는 사람, 참 다작이다. 바로 앞선 책이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이었고, 지금은 12권짜리 제자백가 시대의 이야기를 낸단다. 얼마전엔 최근에 나온 책 중 가장 두꺼운 철학책을 내놓기도 했다. 정말 꾸준히를 넘어서는, 열심히 쓰는 작가다. 

2. 

 이를테면, 김정환과 마르크스를 비교한 한 장을 보자.  

   
 

스텐카라친 -김정환- 

그것은 먼 나라보다 가가운 젊은 날의 

방황, 다만 속절없이 거대하게 

출렁거리는 무엇이 거대하게 

무너지고 그곳에 우리의 길이 

세상보다 더 거대하게 열리는가 

앞으로 우리들의 생애가 

창백하고 친근한 동안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은 수천만 명이 

피를 흘리던 시간의, 젊은 날의 영화 

다만 거대하게 

탕진되는 무엇이 거대하게 무너지고 

그곳에 끔찍하지 않은 세상이 

둥지를 틀고 잠을 잘 것인가 보라 

역사를 강물로 비유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세월도 

보라 옳은 것은, 사실 옳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역사 속에 

남은 자의 몫일 뿐이다 

남은 자의 기억은 옳지 않았다 

피비린 기억보다는 더 많은 것이 이룩되었다.

 
   

 작가는 당대에 청년들을 들끓게 만들었던 포이어바흐를 뒤집은 마르크스의 테제를 등장시킵니다. 즉, "대상의 압력에 저항하며 대상이 움직이는 방향을 거스르는 능동적인 작용"(203쪽)이라는 대상적 활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즉, 인간은 세상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방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놓은 인간의 조건 하에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승자들은 자유를 위한 인간의 투쟁이 실패했다는 기억을 우리에게 각인시키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역사에 패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더 좋은 조건을 남겨놓고 떠났다는 것을 말입니다.(206쪽)  
   

3. 

이와 같은 시와 철학의 성찬이 14개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괴로움'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전작인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과 비교해 보아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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