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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 이래저래 회색빛 나날을 살고 있다. 제주도에 태풍이 올라오고 하루에 300밀리가 넘는 비가 쏟아지고.... 서울 하늘에도 다시금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주민투표, 헌정사상 최초로 주민들의 청원에 의해 발의된 직접민주주의의 한 제도적 형태를 보면서 사실은 사건이 됨으로서 그 본래의 의미를 갖추게 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래 저래, 이번 여름은 꽤나 눅눅하고 오히려 이열치열이랄까 왠지 묵직한 책들에게 눈이 갔다. 

2. 

첫번째 책과 두번째 책은 좀 무겁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선택' 될 수 있는 생물학적 기간이 짧을 것이기 때문에 마치 종 보호에 나서는 환경운동가와 같은 마음으로 찜해 둔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우리는 이상한 고전의 복귀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칼 슈미트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누가봐도 민주주의적 법사상과 거리가 먼, 그의 독재관과 대의민주주의관에서 무언가 계기를 찾겠다며 나서는 사상가들의 무당파성이라니... 

그런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기대어 근대의 법체계 역사를 되짚어보는 블로흐의 저작은 충분히 '카운터 헤게모니'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우리에겐 유토피아의 철학자로 알려진 그가 과거에서부터 당대까지의 주요한 법철학을 살펴봄으로써, 법을 통해서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한계지워진 것인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법 이전/이후에 존재하는 인간 자체의 도덕률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리링의 논어, 세번 찟다]  

 

고전이 무색 무취의 경전이 되면, 그 자체로 역사적 폭력성을 갖게 된다. 예수라는 이방인이 100년 전만 해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았던 이 땅에 각종 '땅 밟기'라는 형태의 무속형 신앙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공자가 스스로를 칭하며 말했던 상가집 개라는 표현을, 그대로 논어 자체에게 돌려주었다는 이유로 논쟁이 된 이 책은 '살아있는 고전'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교본이다. 종으로 횡으로 논어를 찟어내면서 중국사회의 '고전열풍'이 보여주는 역설을 짚어내는 그의 필력이 궁금하다. 

 

3. 

다음은 책의 내용을 넘어서는, 희귀종의 보호 차원에서다. 이런 시도는 충분히 높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인데 엄숙한 분위기 탓인지 조금만 '사짜' 냄새가 나도 진정성을 의심한다.  유쾌하지 않는 철학이 세상에 스며들 수가 있겠는가. 

 

[도올의 중용한글역주] 

 

어쩌면, 금세기에 일가를 이룰 수 있는 토종 사상가 중 한명이 도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생각을, 당대에 함께 생존하면서 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까지는 아니어도 다행스러운 경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마지막으로는 저항이라는 키워드다. 약간은 이상한 조합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조합이 지금 이 시점에서 택할 수 있는 저항의 두 측면이라고 본다. 

 

[박홍규의 이반 일리히 평전]   

   

아마 서구 사상가나 이론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영남대 법과 교수인 박홍규는 참 비범한 사람이다. 초기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번역하더니, 윌리암 모리스에 대한 글을 써내고 아렌트니 토크빌이니 하는 책을 내더니 뜬금없이 멈포드 평전을 써내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꾸준하게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는 아마도 이반 일리히일 것이다. 저자가 추구한 교육의 가치와 아니키즘적인 사회사상은 일리히의 가치관과 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이반 일리히에 대한 평전이 나온다면 당연히 박홍규일 것이라 생각했고, 당연히 그 이기에 이 평전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환의 세기에 이반 일리히를 불러낸 저자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낼 것인가. 벌써 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제국주의와 국제정치경제] 

 

이 사람은 꽤나 한국 방문이 잦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함께 하는 국제 사회운동 조직의 한국지부가 매년 행사를 주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의 방문에 맞춰 신간이 소개되었다. 

국제사회주의자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이기도 하고 영국 요크대 교수였다가 지금은 킹스칼리지로 옮긴 사회학자이기도 한 캘리니코스가 그 사람이다. 통상 맑스주의 학자라고 하면, 맑스의 인용에서 시작해서 맑스의 인용으로 끝을 낼 것 같은 훈고학자 이미지이지만, 캘리니코스는 우파 전통에도 해박할 뿐만 아니라 앤소니 기든스와 같은 중도파 학자들과도 교분을 과시하는 전방위적 학자다. 

또한 영국적 전통에서 네그리류의 자율주의적 사회운동에 대항하는 정통파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사람의 해법이 어떤 것이든 고루할 것이라거나 근거없이 편향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저작 중 대다수가 국내에 번역되어 왔다는 것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5. 

이제 다음 달 신간 소개를 쓰면, 가을 바람이 소솔하게 불어올 것이다. 한 계절의 중간에 다음 계절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된다는 것.. 왠지 나이들었다는 뜻인것 같아 쓸쓸하다. 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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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업하기 어렵다고 하죠? 에잉, 무슨 그런 말씀을. 한국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어디있다구요. 일례를 들어볼까요? 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수많은 기업들이 부정과 부패로 도산했지만 지금까지 감옥에 계신 CEO가 있으신가요? 없죠?  

97년 외환위기 때문에 세금으로 쏟아부은 공적자금이 150조가 넘는데, 그 중 환수된 것은 100조도 안된다는 것도 알고 계시나요? 게다가 정부는 매년 50조원 가까이를 공적자금 이자를 갚는데 쓰고 있다구요! 

기업이 잘 될때는 다 CEO가 경영을 잘해서고, 잘 안될때는 다 국제경기 탓이니 우리나라 CEO는 정말 천하무적인가봐요. CEO라는 것이 사실은, 회사의 소유자가 아니라 운영의 대행자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애들만 성적이 나쁘면 나머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CEO도 경영을 잘못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구요. 그게 상식이잖아요.  

그래서 말이죠,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통큰 독서'를 제안드려요. 반기업정서니 하면서 마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올 여름엔 도대체 '기업을 운영하는 목표는 무엇이고, 기업은 어떻게 생존하는가'를 잘 생각하시길 바래요.

  

 이 책은, '삼성'의 회장님께 드립니다. 비자금에, 불법상속에, 중소기업 특허권 편취에, 노동조합 탄압에, 노동자 산재 사망 무시에... 그러면서도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시는 그 분껜, 일단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은숟가락을 물고 태어났으면, 최소한 말이라도 '은값어치'는 나가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상식이 담긴 책을 권하는 것이에요.

   

 이 책은 기업이 '시장'의 유일한 행위자라고 믿는 자칭, 시장주의자 CEO께 권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시장이란 결국은 인간이 이루는 사회적 장치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 자체로는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바래요. 

특히 통큰 '정 회장'님께, 아르바이트생으로 통닭을 만들어 싸게 파는 것과 일가족의 생계를 걸고 통닭을 파는 것에 대해, 단순히 '가격'만 가지고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왜 요즘 젊은이들의 얼굴이 어두울까요? 회사를 둘러보면, 신입 사원들의 얼굴에서 피곤과 함께 절망감도 발견하시나요? 

그렇다면 이 책 한번 권합니다. 우리는 너무 착한 양과 같은 국민을 원합니다. CEO 분들은 착한 양과 같은 사원들을 원하겠죠. 하지만 분노하지 않으면 가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CEO님이 계시는 회사가 단순히 물건을 팔아 버티는 그저 그런 회사가 아니라면, 이 시대의 '분노코드'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 기네요. 하지만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어요. 환경책 하면 너무 좋은 말만 하고 그래서, '이런 비관론자들'하거나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라며 투덜대셨죠? 

그래서 이 책을 권합니다. <성장의 한계>라는 환경분야 명저를 대중용으로 쉽게 써놓은 책인데요, 새로운 생각의 방법이나 사업구상을 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정책 툴이 제시됩니다. 

어짜피 우리 기업도 지구위의 '지장물'에 불과하다면, 지구를 치료하는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죠?

 

   

요즘, 희망버스 때문에 짜증나세요? 사람 짜르는 것 무서우면 기업 못한다고요?  

그래서 이 책을 권합니다. CEO분들이 보는 보고서에 숫자로 밖에는 나오지 않는 노동자의 이야기입니다. 숫자를 줄이기 이전에 숫자 뒤의 사람을 보시길 바라는 마음에 권해드리는 책으로, CEO분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희망버스 촉매자, 고공 크레인의 김진숙 지도위원이 쓴 것이에요. 

같이 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같이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CEO의 최고 덕목이 되면 안될까요? 솔직히 인간적으로 말이죠. 

 

써놓은 글을 보니, 참 무리한 부탁들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경영의 기본은 원칙과 유연함 아니겠어요? 소태와 같이 쓴 말도 씹어서 삼킬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수백, 수천명의 운명을 좌우하는 CEO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 정도는 되야 우리 CEO 앞에 '존경'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지 않겠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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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불안의 시대다. 그것은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느끼고 있다. 오히려 불안이 만성화되서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리고 있어, 불안하지 않았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말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제로섬의 미래: 불안의 시대에 미국 파워'라는 원제를 '불안의 시대'로 번역하여 붙인 것이나, '우리가 낙관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부제는 호구력이 높은 표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우리'가 굳이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와 한울타리에 있는 것인가가 헤깔리기는 한다. 그렇기 때문이 이 책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불안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대략 80년간의 제국을 이끌어온 아메리카니즘의 불안감을 분석한 책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모두가 공감하더라도 그 해법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1991년까지의 전환의 시대, 1991년부터 2008년까지의 확신의 시대, 2008년 이후의 불안의 시대라는 저자의 구분법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저자는 이 세 시기를 관통하는 정치사상으로 민주적 평화라는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기술이 동시에 발전한다"(11쪽)는 것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민주적 평화라는 정치사상의 붕괴가 2008년 이후, 즉 불안의 시대의 출발점이라는 것인데, 이런 시각은 저자 특유의 아메리카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각 시기의 주요한 행위자로 사실상, 중국, EU, 미국을 제시하는데 이런 거대 세력 중심의 균형이론은 미국의 국제정치를 이끄는 현실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1979년 영국의 대처리즘, 1991년 소련의 붕괴, 1991년 미국에 의한 걸프전, 1999년 시애틀의 반세계화 시위, 2001년 911테러라는 주요한 연표상의 특이점을 중심으로 하는 서술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세력 균형을 근거로 하는 국제 정치경제의 이해방식에는 선뜻 동의가 안된다. 

이 책의 원제인 제로섬의 미래라는 것은 결국, 과거 확신의 시대가 보여주었던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장치로 이해된다. 그래서 길고긴 여정 끝에 도착하는 24장의 제목이 '세계를 구원하라'이며, 이 책의 가장 마지막에 저자가 오바마 대통령에서 품는 희망의 말을 듣는 순간 아득한 메시아주의가 떠오른다. [끝]

   
 

 대공황이 일어난 지 80년이 지났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다.(374쪽)

 
   

 PS: 결정적인 악덕에도 불구하고, 마치 꼴라주 처럼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엮는 저자의 수려한 구성은 매우 설득력 있다. 또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저자 약력이 보여주듯이 쉽게 읽히는 글의 매력 또한 만만치 않다. 다만, 서구 중심의 주류 경제지 기자출신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인식적 한계는, 오히려 불룸버그의 보도를 신주단지 모시듯하는 우리의 금융 전문가들을 떠올린다면 그리 낯선 풍경만은 아니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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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1. '그라마톨로지'도 안 읽고 평전을 읽다 

이 책의 저자는 영미권 학자이면서, 데리다의 입장에서 그를 둘러싼 논란을 적극 해명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표현이 바로 '그라마톨로지' 등 데리다 저작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데리다의 철학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 역시 데리다의 저작은 후기 저작으로 분류되는 '마르크스의 유령등' 이후의 몇 권이 고작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초기부터 후기까지 '해체'의 일관된 철학적 전략에 충실했던 데리다의 여정에 끝 부분만 훔쳐본 셈이다. 그런데, 평전이라니...  

이 평전은 인물에 대한 스케치가 아니라, 저작의 통사를 중심에 놓은 '데리다 철학사'에 가깝다. 인물은 지적 행보에 가려지고, 남는 것은 무시무시한 지적인 여행기인 셈이다. 

2. 데리다는 '무엇'인가 

   
 

 그러나 앞선 철학적 조류에 맞추어 넣는 방식으로는 데리다의 독특한 읽기를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 그때 그들은 데리다의 윤리학, 순수함과 최상의 것을 향한 그의 열망, 또는 미래나 존재자들의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관심이나 그가 과거와 맺었던 관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24쪽)

 
   

 저자는 그동안 '데리다'에 대한 영미권 학자들의 읽었던 데리다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평전을 쓰는데, 그것은 위에 인용한 글의 정반대를 실현함으로서 그렇다. 그래서, 연대기적으로 데리다가 작성한 문헌들을 따라가며 이를 씨줄과 날줄 삼아 데리다라는 하나의 철학적 초상을 직조해낸다. 

그런데, 이런 저자의 데리다 읽기는 이 땅에서 나는 나에게 '낯선 대상'에 대한 '사용 설명서'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나름의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느나 그것을 전혀 자각할 수 없었던 자로서 데리다는 그저 정체불명의 '물건'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2중, 3중의 복잡한 문턱을 가지고 있다.  

3. 불필요한 변명과 충실한 문헌조사 

이 책에서 드러나는 데리다는 냉정한 해체의 마법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고정된 것들의 진동을 드러내는 윤리적 교사의 모습이다. 정신분석학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평생의 주제인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은 모두 열려있어 보이는 것의 닫힘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데리다가 '원하는 방식'이었을 뿐 그것이 데리다 철학의 원본인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데리다 철학이 해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문학이론가들에게 열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일이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거부하는 신수정주의적 경향의 근원에 해체주의가 영향을 미친 것과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에코는 해체가 일종의 잡종적 산물(218쪽)이라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나 유럽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던 데리다 철학이 잡종 문화의 상징인 미국에서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체주의 경향의 이론가인 폴 드만이 사실상 반유대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필화사건'에서 데리다가 드 만을 옹호한 것,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강연에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옹호한 일 등은 데리다 철학의 이론적 자장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의 미국 문화에 대한 편향은 분명히 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의 상관성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부분적으로 220쪽에 이런 측면이 나와있기는 하다). 

그런데, 저자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좀더 완벽한 데리다의 초상인 듯하다. 즉, 상반된 지향으로 기워진 알록달록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의 색깔이 채도를 달리하는 그림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너무 강했다. 그런 점이 못내 앞서 언급한 데리다의 정치적 태도에 대한 저자의 이해관계가 껄끄로웠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이런 좁은 의미에서의 개인사적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제한적으로 알려진 데리다 철학의 문헌사적 치밀함에 있다. 솔직히 처음 듣는 책이나 논문의 제목과 그 내용의 요약을 읽는 것은 참 지루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의 80년대 대표작인 '우편 엽서'가 일본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를 통해 역수출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비추어 보면, 이런 치밀한 평전의 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4. 기준제작자로서 철학자 

   
  '철학자'는 우리의 철학적 유산들이 아직까지 우세한 사법적이고 정치적인 체계의 구조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너무나 명백히 변화를 겪고 있는 이 관계에 대해 분석하고 그리하여 실용적이고 실효성 있는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일 것이다. '철학자'는 '이해하기'와 '정당화'를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455쪽 재인용)  
   

 어쩌면 이 책은 데리다의 철학하기에 대한 주석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이해에 구애받을 필요가 과연 있을까 싶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된 데리다의 철학자에 대한 정의는 왠지 매력적이다. 이해하기와 정당화를 구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해체의 윤리학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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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이... 어찌 할 수 없는 자신감이라니..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자신의 책에, 1문형의 제목을 다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런데, 이택광이란 사람 꽤나 용감하다. 물론 이런 저런 신문지면에 실린 글을 보거나 조정환과 가진 촛불논쟁을 기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박수를 쳐줄만한 자신감이라 생각한다. 

대중연예물에 대한 가쉽성 글이 문화평론이라고 칭해지며 쏟아지는 요즘, 저자는 문화비평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게 될까.

 

 

 

 

 2. 새로운 사회를 원하는가, 그럼 혁신하라 <사회혁신이란 무엇인가, 제프 멀건>

 

  

저자는 영국의 사회재단인 영파운데이션의 설립자이다. 그리고 '데모스'라는 싱크탱크를  창립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희망제작소와 아름다운재단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모델과 유사하다.  

사회혁신의 한계를 짚기엔 아직 섣부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엔 내놓고 비판할 만한 사회혁신의 사례조차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회혁신의 메뉴얼은 곱씹어 보고 실험해볼 것을 권한다.  

(희망제작소가 비리로 구속된 박주원 안산시장의 '실용적 지방자치론'을 발간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될만한 사건이지만 말이다)

 

  3. 바보야, 문제는 자본주의야! <휴버먼의 자본론, 레오 휴버먼> 

 

 조금만 바꾸면 괜잖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성장과 후퇴가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모든 것이 돈으로 결정되는 자본주의는 잠깐 고장이 났을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휴버먼의 생각은 다르다. 위기는 바로 자본주의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해는 언제나 약자들이 본다고 지적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순식간에 수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한 대우그룹의 김우중씨는 여전히 해외 곳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고, 한보그룹의 정태수씨도 여전히 떵떵 거린다.  

문제는 자본주의인 셈인데, 바꿀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라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휴버먼의 자본론은 어찌되었던 우리 삶을 가로지르는 자본주의의 속사정을 속 시원히 말해 줄 것도 같다.

 

   4. 회색조의 근대풍경이 선명해진다 <이상과 모던뽀이들, 장석주> 

 

 많은 책과 글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우리의 근대를 다룬 책들을 보면 설렌다. 여전히 20세기 초반은 서구의 연표로 기억되고, 우리의 근대는 그렇게 회색조다. 

장석주 선생이야 워낙 글쟁이로 문명이 높고, 이상을 둘러싼 군상들의 풍경이 그려진다니 모처럼 경성을 주름잡던 모던뽀이의 세계를 들여다 볼까나.

 

 

 

  

5. 나와 영심이 사이.... 때론 그녀가 우월하다 <동물과 인간사이, 프리데리케 랑게> 

 

개를 키운다. 조그만 마르티즈 한마디. 그녀를 나는 영심이라 부른다. 그녀는 누군가 오는 소리를 나보다 먼저 듣고, 나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 아부를 떨 줄 알며 무엇보다 별 영양가 없는 나같은 이를 멸시할 줄 안다.  

물론 이 책은 이런 애완견 키우기따위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동물로서 인간은 어째서 인간다운가라는 질문이 궁금하다면 볼 만하다고 본다. 즉 동물은 동물로서의 경로를 가지고 발전해온 것이며,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경로를 가지고 발전해온 것이다.  

실험으로서 이런 점들을 규명했다고 하니, 우리 영심이를 이해하는데 도움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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