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난 백년만에 소개팅을 했다. 주선자는 남자가 구려도 욕을 하지 말고, 대신 괜찮으면 고마워하라는 이기적인 부탁을 했다. 신기하게도 남자는 주선자를 닮아 있었다. 주선자는 나를 예뻐라하는 언닌데, 남자를 닮았다고 해서 미안하지만 정말로 눈매가 닮았다. 자길 닮아서 이 남자를 좋아하는건가? 란 생각을 잠시 했다.
곱창을 먹었다. 맛있었다. 맛집이라고 했다. 난 소맥을 마셨다. 남자는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소주를 마셨다. 난 조언이랍시고 원래 여자랑 처음 만나면 곱창집엘 오는게 아니라고 했다. 남자는 나니까 온거라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난 소맥을 계속 마셨다. 이자까야로 자리를 옮겼다. 복튀김과 낫또오믈렛을 시켰다. 따뜻하고 좋았다. 주선자가 취하지 말라고 했다며 술을 자제하던 남자는 내가 취하는 기미가 보이자 안심했는지 소맥을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어느덧 나는 고민상담을 하고 있었다. 술집 안은 조용했지만 나와 남자의 말들이 무척 시끄러웠다. 그래서 난 내 말도, 남자의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친한 오빠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가 말을 했던가 모르겠다.
요즘 부쩍 우울해하는 난 남자가 부추기자 약간 울기까지 했던 것 같다. 배려심이 많은 남자는 아니었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자만심이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취하니 귀여워 보이긴 했다. 정치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회의감을 얘기했다가 대단히 혼났다. 우리나라를 바꾸려하는 의지가 꼭 있어야만 하는걸까? 그냥 외국나가 살면 안되나?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멍청한 여자 취급을 받았다. 난 딴 건 몰라도 멍청한 취급 받는 걸 너무 싫어한다. 하지만 남자는 '난 잘났는데.. 이런 생각 하죠?' 라며 비아냥거려서 기분이 나빴다. 멍청한 취급도 싫지만 내 자만을 비웃는 것도 싫었다. 지도 오만한 주제에.
점점 취해가며 기분이 좋다가, 나쁘다가 했다. 스트레스가 많아서인지 요즘은 술마시면 감정이 컨트롤이 안되는데 그 기복도 굉장히 심하다. 남자의 빈정거리는 눈빛에 점차 내 자신이 병신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눈빛이 빈정거렸던 것은 나의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남자의 진심이었을까? 남자의 마지막 한마디, 성격은 좋네요. 에서 '은'이란 조사타령을 했던가? 그 이후로 눈 떠보니 4개 역이나 지나쳐버린 지하철 안이었다.
난 주선자에게 왕자병쉐키. 란 문자를 보냈나보다. 그러곤 바로 아니라고 정정을 했더라. 아침에 문자를 보고 웃었다. 소개팅에서 개만취를 해버리다니. 술때문에 연애를 못하는 거라고 페북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맞다. 다 술 때문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 술이 문제야.
가방을 챙기는데 가방에 남자가 헤어질 때 준 핫팩이 들어있었다. 봉지를 뜯지 않아도 마음이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