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드라마를 봤다. 하기 싫은 택스 관련 일을 하느라 골을 싸매던 주인공의 집에 전도사들이 찾아와 "예수를 믿으십니까?" 라고 묻자 주인공은 마구 환영하며 떨떠름해하는 전도사들을 집으로 맞이한다. 회계일만 아니라면 교회쟁이도 좋고 청소도 재밌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마치 시험기간에 안보던 뉴스와 다큐멘터리가 재미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구 웃을 수만은 없었던게 나도 내일 토익을 봐야 하는데 그동안 미루던 [안나 카레니나]의 리뷰가 갑자기 너무너무 쓰고 싶어져버린 거다. 토익 뭐.. 기본이 된다고 마음을 놓기엔 모의고사 성적이 개판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리뷰가 더 쓰고 싶다.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읽었던 것은 아마도 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렸을 적 읽은 러시아 작품들은 외울 수 없는 이름들 때문인지 줄거리를 모두 뒤섞어 기억하고 있는데 그 중 [죄와벌]과 [안나 카레니나]의 결말만은 기억하고 있다. 사실은 결말만 기억하고 있다가 작품의 제목과 짜맞춘 것은 최근이다. 여튼 이 책의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어서인지, 안나가 나와 비슷해서였는지, 어쩌면 완전히 달라서였는지 그녀의 스토리에는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러브스토리에 공감을 잘 못하는 체질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그들 각자의 사정도 사정이지만, 프랑스 혁명에 더 관심을 두고 읽었듯이, 이번 역시 안나보다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에 더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마리앙투와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그려지는 프랑스귀족의 생활과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그려지는 영국귀족의 생활과도 확연히 달랐다. 사치와 쾌락과 허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도 특유의 절제가 러시아의 귀족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브론스키가 유럽의 어느 왕자를 시중드는 모습이라던가, 바람을 피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모습,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연줄을 찾아다니며 전전긍긍하는 모습, 농사를 짓는다던가, 땅을 두고 장사치들과 거래를 하며 손해를 본다던가, 빚을 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 등 세속적인 모습들이 어쩐지 건전해 보였다. 속세에서 벗어나 돈 걱정 없이 타락을 향유하며 사는 유럽의 귀족들과 다른 이유가 작가의 성향, 시대, 귀족의 계급차 등 여러가지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상이나 경제의 차이인지 러시아 귀족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절제미가 있었던 것처럼 보여 인상적이었다. 

안나의 이야기에 공감을 못했다고 해서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안나가 어떻게 될지 알고 읽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내내, 심지어 그녀가 행복으로 빛나는 순간조차도 답답하고 절망적이기만 했다. 고통이 뭔지 모르던, 아름답다는 찬사만을 받던 그녀가 사랑받고 있지 않다고 느꼈을 때의 기분은 어떤걸까. 세상에 나를 기쁘게 해줄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면? 나때문에 인생을 망쳐버린 브론스키는 내가 없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그녀는 그 생각한 시간이 받아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사춘기 소녀처럼 경솔한 선택을 해버린다.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나? 

그녀는 사랑하는 대상에 그 목적을 두었었고, 나는 사랑을 하는 내 자신에 목적을 두었기에 그녀를 감히 경솔하다 말한다. 사랑을 하는 나 자신만 있다면, 그런 자신만 사랑한다면, 나는 브론스키나 아들을 잃어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안나처럼 브론스키와 아들에게 자아를 모두 내던진다면 살아갈 힘이 소진될 수밖에 없다. 나는 '자기가 후회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과오이다'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동의하는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이지만, 그녀는 아마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보다 그녀에게 이기적이라며 비난할테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보다 상대방을 사랑했던 오히려 이타적인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수려한 문장이 가장 빛났던 부분은 브론스키가 말을 달리는 장면, 레빈이 풀을 베는 장면, 키티가 출산을 할 때 레빈의 감정 변화 묘사, 세 부분이다. 이런 장면들에는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혀서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문장에 빨려들어가 잡아먹히는 것만 같았는데, 이런 책을 만난 것도 행운이지만 이만큼 느낄 수 있는 나의 감수성에게도 감사했다. 수많은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마음을 많이 주고 공감도 많이 했던 캐릭터는 레빈인데, 아마 작가 역시 그에게 신경을 많이 쓴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의견이 레빈을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여러모로 행복한 독서였지만 책을 덮을 때의 감동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았다. 굉장히 맛있고 화려한 정찬으로 한 끼 먹어서 좋지만 이걸 매일 먹을 수는 없으니 아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하지만 한 번 먹어봤으니 그런대로 만족이라고 하면 될까. 사람냄새가 덜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불우한 백수에게 단비와도 같은 책 선물해주신 다락방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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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7-0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재미없게 읽었던 책이라 그동안 방치했었는데 님의 리뷰를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Forgettable. 2011-07-04 20:42   좋아요 0 | URL
오 최고의 칭찬 ^^ ㅋㅋ
시간을 두고 찬찬히 다시 읽어보세용 ㅋㅋ 하지만 짐작하기엔 읽은 책 다시 읽기엔 안읽은 재미있는 책들이 무지 많죠 ㅠ

lazydevil 2011-07-1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piy님 댓글에 공감해봅니다^^

2011-07-14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11-07-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중일배주라. 운치가 있죠.
참, 깜빡했네요, 추천^^

버벌 2011-07-24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책장에서 익어가고 있어요. 안나는 저와 아직까지도 대면대면 합니다. 좀 친해져야 할텐데......

Forgettable. 2011-07-26 15:49   좋아요 0 | URL
책장에서 익어가고 있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읽은 책도 다시 읽어야 하는 책거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