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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아열대 지방의 추억은 그 공기에 그대로 녹아 있어서 원하는대로 새로 주조해낼 수 있었다. 현실이 어디 그저 있는대로의 객관적 현실이었던가, 우리는 악마가 불어넣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듣되 목소리만 못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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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체감하고 있는 이 현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거든요. 뇌가 그 재량에 의해 선택한 정보로 재구성된 것이지요. 따라서 부분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요소가 있는 경우, 당사자는 전혀 지각할 수 없어요. 기억은 갖고 있어도 의식은 무대에 올라오지 않으니까요.
아아- 우리들이 보고 듣는 것은 모두 가상현실인 셈이로군. 그것이 진짜 현실인지 아닌지 본인은 구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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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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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형형 색색의 건물과 더운 젊음의 열기, 뜻을 알 수 없는 그림 같은 간판들은 내게 타국에서 보냈던 옛 기억을 불러일으키게끔 작용했다. 함께 있어 두렵지 않았던 습기찬 새벽,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것을 배웠다고 하던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던 순간, 우리의 미래가 엇갈리는 게 참을 수 없이 비극적이었던 그 날까지.
도망치다시피 간 그 곳에서 나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사람은 외길에서도 고민한다 말했다고 누군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사람은 꿈 속에서도 꿈을 꾼다. 고 혼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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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열대 기후에 녹아 있는 추억도 잠시, 맛집을 찾다 길을 잃어도, 택시를 타도, 나는 길거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거리. 거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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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일에 정신을 쏟다 보면 소중한 시간들이 뭉텅뭉텅 낭비되고, 여행객들은 조토 작품의 뛰어난 질감이나교황 제도의 타락상을 알아보려고 이탈리아를 찾았다가 그저 푸른 하늘과 그 아래 사는 남녀들만을 기억한 채 돌아가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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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좋은 방]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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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에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는 도박을 즐겨하는 나는 예전 [바리데기]에 이어 또 한번 [전망 좋은 방]을 고르는 잭팟을 터뜨렸다. 작가는 조토 작품이나 베데커 여행 안내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그저 푸른 하늘과 그 아래 사는 남녀들이며, 소중한 시간들이 뭉텅뭉텅 낭비하는 것이 결고 낭비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기선이며 길거리의 행상인들, 알파벳으로 쓰여있지만 뜻을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간판, 알록달록한 자동차들이 달리는 도로에게 정신을 팔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두시간을 걷고 묻고 걸으며 맛집을 찾는 것은 더운 날씨에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는 택시만 타면 다 데려다준다고 말하던데, 나는 그 시간만큼 기억에 남는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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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날 줘요. 그걸 루시가 들고 다니면 안돼요. 그냥 이리저리 헤매 다녀 보는거예요."
그래서 둘은 끝없이 펼쳐진 회갈색 거리들을 헤매고 다녔다. 널찍함이나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그런 골목은 도시의 동쪽 지역에 차고 넘쳤다. 루시는 곧 루이자 아무개 부인이 뭐가 불만이었는지에 관심을 잃고, 대신 스스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홀연히 이탈리아가 황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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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파는 기타가 신기하고, 태국에서 타고다니던 '뚝뚝'이 이곳, 필리핀에도 있어서 또 신기했다. 신기한 꽃이나 자동차,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사소한 물건들에게 정신이 팔려있으면, 갑자기 어딘가에서 나타나 내 팔을 잡아채고 가던 길로 다시 끌어주던 누군가가 아주 조금 필요하기도 했지만, 너무 늦지 않게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슨 파스타와 립요리. 식당을 찾아갈 때 너무 돌아돌아서 간 나머지, 집에 돌아가자마자 약도를 상세히 그려서 블로그에 올려두겠다고 한지 벌써 한달이 넘게 지나버려서 길은 커녕, 식당 이름; 요리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 식당이라 그런지 종업원에게 팁을 주니 2pm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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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이라고요? 아, 전망! 전망이 좋으면 기쁜 일이지요!"
(중략)
피렌체에서 깨어나는 일, 햇살 비쳐 드는 객실에서 눈을 뜨는 일은 유쾌했다. 붉은 타일이 깔린 객실 바닥은 실제와는 달리 겉으로는 깨끗해보였다.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서는 분홍색 그리핀과 파란색 아모리니들이 노란색 바이올린과 바순의 숲에서 노닐고 있었다. 거기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 익숙하지 않은 걸쇠를푸는 일도, 햇빛속으로 몸을 내밀고 맞은 편의 아름다운 언덕과 나무와 대리석 교회들, 또 저만치 앞쪽에서 아르노 강이 강둑에 부딪히며 흘러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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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M. 포스터가 그린 이탈리아의 전망 좋은 방과 아주 유사하진 않아도 그 느낌은 꽤나 비슷하다. 필리핀의 고급 리조트의 넓은 침대에서 깨어나는 일, 햇살 비쳐드는 객실에서 눈을 뜨는 일은 유쾌함을 넘어서 감동적이었다. 다시는 배낭여행을 하며 햇빛도 안드는 우중충한 도미토리에서 깨어나는 일 따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 혼자 넓은 풀장을 독차지하고 맘껏 물장구 쳐도 좋을 만큼 풀장은 여러개였고, 마음에 안들면 조금 걸어나가서 프라이빗 비치에서 야자수 그늘 아래 누워 책을 읽거나 수영을 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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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저녁과 아침에서
열두 바람이 부는 하늘에서
나를 이루는 생명의 재료가
불어왔네, 나 여기 있네.
"조지도 나도 이 사실을 잘 알아요. 그런데 그렇다고왜 괴로워해야 하는거요? 우리가 바람에서 왔고, 그래서 바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잘 알아요. 인생이란 영원한 평탄 속에 불거진 매듭, 얽힘, 흠집이라는 것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게 왜 불행의 이유가 되야 하는거요? 그저 서로 사랑하고 일하고 즐거워해야 하지 않소? 나는 이런 세상 한탄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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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의 분위기에 겨우 적응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기간(일주일 정도로 본다)도 못채우고 부랴부랴 돌아와야 했다. 책 한권도 모두 읽지 못했던 일정이었으니, 에머슨 노인의 말에 공감하며 낯선 공기를 내것으로 만들 새도 없었다.
남은 건 7D 건망고 몇봉지와 캐리어 안에서 터져버린 산미구엘 캔 뿐이었나. 싶을 만큼 아쉬움이 컸다.
길거리 음식도 먹어보지 못했고, 시내 골목골목을 후비며 다니지 못했고, 시장에도 가보지 못했고, 다른 여행객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놀지도 못했다. 너무 급격히 개발되서 여행객의 뜻하지 않은 소소한 재미보다는 관광객의 편의에 모든 자본이 집중되어 있었고, 외국인 남자들은 현지 여성들을 장식품처럼 달고 껄껄댔으며, 더운 밤에 거리로 몰려나와 길 잃은 듯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의 갈 곳이 불투명해 보였다. 눈 닫고 귀 닫고, 쓴 돈만큼 편히 쉬었으면 되었다는 생각만 할 수 있었다면 에머슨 노인의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