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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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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직까지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한 정확한 실마리는 잡히지 않는다. 그의 출세작이라 할만한 '굳빠이 이상'이라던지,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내가 아직 아이었을때'도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사라이라니, 선영아'는 김연수라는 작가의 장점은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 혹은 김연수라는 작가가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어떻게 투영시키고 있는지도. 영화에 빗대자면, 김연수의 시선은 지극히 홍상수적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물론 '선영아 사랑해'라는 포털 사이트 슬로건의 패러디이기도 하지만. '사랑해'라는 문장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을 반영하고 있기도 한다. 소설뒤에 덧붙여진 평론에서도 지적했듯이, 여러가지 몽타주 식으로 사용되는 자료들은 모두 그의 '냉소적 사랑론'을 돋보이게 하는데 종사하고 있다. 때문에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을 좀 더 다채로운 소스들을 활용하여 소설화시킨 느낌이 들게 한다.(물론 홍상수처럼 섹스코드가 진하게 풍겨나지는 않지만) '생활의 발견'이 그렇듯이 에피소드들의 재미를 높이는 것은 남여,혹은 개개인마다 드러나는 기억의 차이이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사랑을 끊임없이 외치며,불확실한 기억에 얽매이는 군상들.. 어찌보면 그것은 우리 현실 일반에 대한 매우 냉소적인 풍경화일지도 모르건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사랑이라니,...'는 유쾌하다. 물론 그 유쾌함까지 유쾌한지는 또 모를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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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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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은 강유원의 문필가로서의 면모와 본래 전공인 철학을 바탕으로한 탄탄한 논리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서평집이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선뜻 밝히지 않았지만 주로 서평을 할때 다루는 논리의 근거, 대안을 찾을때 헤겔과 마르크스에 기댄다는 것,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념적 편향을 지적하며 좌파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점에서(사실 이건 고른 이념 스펙트럼을 바라는 일부 자유주의자들도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좌파'라고 보더라도 무방할 듯 하다. 비단 그러한 논리나 글의 구성으로 파악되는 것말고도, 강유원은 좌파가 지니고 있는 일종의 '꼬장꼬장함'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김규항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쓴 에세이에서 느껴졌던, 혹은 서준식의 글속에서 느껴졌던 그런 꼬장꼬장함 말이다.(좀더 멀리나가자면 진중권에서도 언뜻언뜻 발견되는) 그런 '꼬장꼬장함'은 강유원 특유의 문체의 간결함에서 비롯되는 것 같기도 하고,그가 비판을 가할시에 어떠한 이념,나이,국가를 초월해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꼬장꼬장함의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나는 알수가 없다. 다만 그 태도는 그의 글을 보다 날카롭고 차갑게 만들어 준다. 그가 서평을 쓰는 이유는 책의 가치를 분별해주는 것이라 언급했고, 그 분별을 가능케하는 것은 감성이 아닌 이성이니 강유원의 문체나 분위기는 서평집의 목적에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 틀림없다.

...어설픈 좌파를 자칭하면서, 아니 그렇기에 그러한 '꼬장꼬장함'을 지니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그러한 태도가 부러우면서도 조금 부담스럽다. 예전에 고종석이 그의 에세이에서 수구세력과 강준만과 박원순과 같은 개혁세력에 대한 김규항의 비판의 정도가 비슷한 것에 대해 버거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나도 그와 비슷한 부담을 강유원의 서평에서 느끼는 것 같다. 이를테면 조한혜정이나 홍신자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상과 행동의 불일치를 강한 어조로 비판할때 그 나는 그 비판의 정도가 부담스럽다. 물론 지식인이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일치를 보여야 한다는 강유원의 발언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그도 언급했듯이, 그 생각과 행동의 일치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조한혜정이나 홍신자의 발언들이 설령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공감하는 편이다. 그 발언은 설령 비현실적이더라도 이 나라의 진보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사람들의 닫힌 의식을 깨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그러한 '말하는 행위'조차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위치(교수라는 안정된 직장, 명망있는 예술가)에 안주하고 아무 발언도 안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직무유기라고 난 판단한다. 물론 강유원은 그들이 그렇게 된다면 지식인이라는 명함을 내밀 자격도 없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내 안의 자유주의자적 기질에서 오는 불편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강유원의 글쓰기,그의 작업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실상, 오늘날 좌파들이 지닌 문제점들은 '꼬장꼬장함'의 과다보다는 지나친 타협(다른 말로 하면 지나친 리버럴함)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창'에서의 에세이, 그리고 문화일보의 '서평' 그외에도 선보이는 철학작업을 통해 그는 점차 자신의 '꼬장꼬장함'을 보다 폭넓게 그리고 자유롭게 선보이는 것 같다. 그러한 태도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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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신호등 -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성찰의 거울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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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책을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90년대 중반 , 소위 교양인이라면 필독서로 읽었을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거충거충 읽었고, 마찬가지로 꽤나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던 '쎄느강...'이나 '악역을...' 역시 대충읽기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홍세화의 메시지나 그의 사상을 아주 몰랐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가 몇몇 칼럼니스트들과 연대를 이루어 '아웃사이더'를 창간한 이후로 줄곧 그것을 즐겨봤으며 그를 모델로 하여 쓰여진듯한 고종석의 '서유기'라던가 '아빠와 크레파스'같은 소설을 통해 홍세화란 인물의 또 다른 면에 대해 몇가지 단상을 해보기도 했으니까.

...굳이 변명하자면 난 그가 프랑스에서 그의 책들을 썼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책들이 많은 부분 우리나라사회에 대한 비판에 할애되었다는 것에 대해 기질적인 반감이 들었던 것 같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자가(그것이 설령 망명객일지라도) 이 후진국에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내세운 다는 것이 당시의 내 미감을 거슬렀던 것이다. 그 미감은 적잖이 속단이었고, 또 경솔한 것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망명객의 위치에 대해 좀더 신경을 기울였더라면, 그리고 그런 선진국의 공기에 매혹되어 자신이 쫓겨난 나라를 저주하는 것이 아닌 애정어린 비판을 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알았더라면 나는 그의 전작들을 좀더 세밀하게 읽었을것이며 좀더 많은 애정을 가졌을 것이다.

...'빨간 신호등'은 99년부터 2003년 까지 한겨레 신문에 쓰여진 칼럼들을 실은 모음집이다. 4년이라는 시간은 당대에 대해 끊임없는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에게 있어 꽤나 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일정하다. 그는 그의 망명생활을 통해 경험했던 프랑스 개인주의의 미덕, 그리고 사민주의의 기반을 활용하여 이 나라의 각 사안들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일반적으로 칼럼이 잡문적 성격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칼럼니스트들의 관심사안에 종속되어 생각외로 여러 사안을 다루지 못하는 반면에, 홍세화의 칼럼들은 이 사회의 다양한 면들을 파헤친다. 국가보안법 문제부터, 표현의 자유문제까지, 노동자 파업부터 교육정책까지 비판의 칼날은 닿는데,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지식인상에 홍세화가 얼마나 충실한지를 엿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그의 비판에 대해 대체로 공감하며 특히나 교육분야에 관한 그의 의견에는 거의 완전히 동의했다. 대학의 평준화없이는 이 나라의 사교육비 절감이라던지, 정상적인 교육체계의 성립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견해에 나는 적극적인 공감을 표하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변질될 이 나라의 교육체계에 언제까지나 유효한 메시지일꺼라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의 비판이 이 나라 교육정책에 얼만큼 반영될지는 미지수이지만(솔직히 비관적이지만). 교육에 관한 그의 글들은 그가 제한된 사회주의자가 아닌 온전한 사회주의자임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글들이기도 하다. 그의 글들은 예전에 고종석이 지적했듯이, 부분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리버럴함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 리버럴함이 홍세화화 이념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 무수한 문제점을 지닌 이 사회의 추악함을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하기위한 하나의 도구임을 그의 교육관련 칼럼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보니 그러한 리버럴함과 사회주의적 신념을 '한목소리'로 녹여낼 수 있다는 것도 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이 홍세화를 '노쇠한 좌파,친불주의자'가 아닌 '기품있는 전사'로 남아있게 하는 하나의 자양분인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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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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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이 자기 색깔을 갖추어갔던게 어느 때부터 였을까. 많은 전기물이 출판되어왔었지만, 그것은 객관을 '가장'한 인물찬양이었지 진정한 한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물은 아니었다. 물론 전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작가가 해당인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애정이 없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작업이니 어느정도 인간적인 행위라고 봐줄만하지만...

내 기억으로 평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조갑제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박정희에 대한 용비어천가책을 낸 이후부터 였던 것 같다.(개념의 등장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전이라는 개념이 일반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된 시기는) 물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책이 본격적인 의미의 평전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책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박정희에 대한 본격적인 평전들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박상천이 썼던 '알몸 박정희', 탁석산의 '한국인의 정체성'과 더불어 책세상문고를 세상에 알렸던 전재호의'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같이 그의 일생이나, 업적만의 나열만으로 어떤 메시지를 이끌어낼 수 없는 인물을 다룰 경우 그에 대한 저자의 평가,행위에 대한 해석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기물보다는 평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게 훨씬 더 수월했으리라.

...글의 방향이 조금 어긋났는데, 어쨋든.. 그러한 평전이라는 개념의 일반화와는 무관하게, 평전작업에 열중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박홍규이다. 그는 생태주의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 모리스에 대한 평전을 낸 것을 시작으로, 에리히 프롬, 루쉰, 베토벤, 고호, 까뮈, 카프카, 오노레 도미에같은 인물에 대한 평전을 써냈다. 얼핏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지만 박홍규는 그 인물들의 삶속에서 자신이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생각과의 공통점을 발견해 낸다. 그 키워드는 시대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아나키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내에서 흔치 않은 아나키스트인 박홍규는 일반적으로 평가가 거의 확정되었다고 보여지는 위인들의 삶속에서 그런 일반적인 평가들이 미처 끄집어내지 못했던 아나키즘적 면모들을 끄집어 낸다. 그것은 내가 읽은 조지오웰의 평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그의 평전의 방향은 두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그 인물에게 내려진 일반적 평가의 오류들을 짚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인물의 삶이 지닌 아나키즘적 가치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이책에서는 그러한 방향성이 좀더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에서 조지오웰에 대한 평가가 '반공주의 소설가'로 거의 확실히 굳어져왔기 때문이고, 그로인해 조지오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이 열릴 공간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평전을 통해 조지오웰의 아나키스트적 면모를 강조하고, 그 관점에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동물농장'과 '1984'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의도에 비해 평전의 분량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지만 대체로 내용은 그 의도에 충실하며, 비판의 논리도 날이 서있다.

...어느새 박홍규의 작업은 세간에 알려져 이제는 '한국의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이 평가는 그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지만, 부분적으로는 그의 작업을 오독하는 것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와는 달리 박홍규는 자신의 사상을 분명히 명시하면서 평전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츠바이크가 보여주었던 것이 한 개개인의 아름다윤 초상화라면, 박홍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일종의 개개인들이 사상의 바탕위에 점점이 박혀있는 인물들을 끄집어내고 그리는 벽화이다. 그의 다른 평전들도 읽어봐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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