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화》는 아무래도 앞서 개봉했던 장쯔이 주연의《야연》과 비교가 불가피한데,《야연》이 색채의 화려함이 주는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줬다면《황후화》는 방대한 공간의 스케일이 스크린을 장악하는 느낌이 확연하다. 
예전에 북경 여행을 갔을 때 대륙의 웅장함이라고 할까,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었는데 이 영화는 그 때 느꼈던 그 웅장한 분위기가 제대로 전달된다.  

무엇보다 장이모우의 예전 영화들에 비해 이번 영화는 엄청난 물량공세를 투입한 기색이 역력하다. 가끔 자본에 감독의 역량이 밀리는 영화를 보는데 이 영화는 감독이 영화에 투입된 자본을 십분 잘 활용했구나, 생각이 든다. 앞선《영웅》의 라스트신에서 보여주었던 내공이 이번 영화에서 절정에 달했다는 생각도 들고. 결론은《황후화》는 극장에서 넓은 스크린으로 봐야 할 영화다. 웅장함도 웅장함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중국 황실 의식주의 섬세한 디테일은 작은 화면으로 축소되면 아무래도 스크린이 주는 것보다 감탄이 확 줄어든다.
화려한 볼거리에 비하면 내용은 평이하다.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의 그늘이 있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가 있고 그 권력을 꺾으려는 자가 있다. 남녀의 정과 부자(父子)의 정은 권력 앞에서 물처럼 연기처럼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덧없이 흩어진다. 엇나간 애정의 비극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색채와 비감이 잘 어우러진 느낌.   

'황실비극'까지는 아니지만 황실을 배경으로 권력이란 한바탕 꿈을 꾼 듯 몽롱하고 덧없는 인생의 그림자임을 보여주는 쑤퉁의『나, 제왕의 생애』는 놓치면 아까운 소설이다.

 

  

 

장이모우 감독은 사회주의 체제하의 중화권의 감독치고는 ‘치정’에 남다른 철학이 있는 듯 보인다.《영웅》의 연장선에서 보면, 정점에 선 권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냉소적인 것 같은데《집으로 가는 길》《홍등》《국두》등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남녀 간의 사랑을 보는 시각은 상당히 로맨틱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흥미로운 인물이다. 

《국두》의 원작소설「푸시푸시」수록. 

《홍등》의 원작 소설「처첩성군」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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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것은 대학 도서관의 자료실에서였다.
뭘 볼까... 하다가 그냥 낯익은 제목이라는 이유로 참 심심하게 골랐던 영화. 하지만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블레이드 러너>는 더 이상 그냥 '영화'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많은 은유와 상징이 보석처럼 채워져있는 <블레이드 러너>는 지적인 충만감, 화면을 읽는 즐거움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TEXT적인 영화다.
지금은 너무 흔해져버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라는 사이버펑크 세계의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옥상 씬에서 로이(룻거 하우어)의 대사인 "Time to die"에서는 바보같이 울어버렸다. 이후 director's cut도 봤는데 나는 둘 다 좋았다.
- 편집본이 감독판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이 허다하다. 때로 객관적인 판단이 더 정확할 때도 있는 법. 

마지막 장면을 편집해 버림으로써 데커드의 정체가 애매해졌다고 하지만 사실 내용을 유심히 보면 이미 영화 전반에 걸쳐 데커드의 정체성에 대한 힌트를 충분히 주고 있다.
필립 K.딕의 원저의 제목인『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너무나 잘 대변한다. 전기양 꿈을 꾸는 안드로이드라니, 제목만으로 가슴이 설레었던 몇 안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덧붙여 반젤리스의 음악도 좋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도 흠잡을 데 없이 좋다.
이런 영화가 시대의 외면을 받았다니, 이런 작품을 만들고도 상 하나 못받다니... 참고로 당시 대세는 E.T였다고 한다. 

좋은 작품은 다음 작품에게 영감을 준다.《블레이드 러너》도 마찬가지.《블레이드 러너》는《공각기동대》로, 《공각기동대》는《매트릭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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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여자와 남자의 TV시청 패턴을 분석한 다큐를 봤는데, 여자는 드라마를, 남자는 스포츠를 볼 때 즐거움을 느낀다는 얘기였다. 그럼 왜 이런 성향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여자는 과정을, 남자는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영화《브레이크 업》에서처럼, 연인들의 싸움은 대개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여자 : (사실) 레몬이 몇 개인가는 중요하지 않아.
남자 : 중요하지 않다면서 도대체 왜 화를 내는 거야?

 

레몬이 딸기잼으로 바뀌기는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도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여자 : 고작 딸기잼이 없다고 열심히 준비한 내 아침을 망쳐? 니가 감히 내 성의를 무시해?
남자 : 난 그냥 딸기잼이 먹고 싶다는 것 뿐이라니까
 

 

실제로 서로 의견이 대립될 때 대개 여자는 미시적 전개를, 남자는 거시적 논리를 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여자 : 내 부탁을 잊었단 말이지? 넌 늘 그랬어. (과거가 주루룩 펼쳐진다. 여자가 필요로 할 때 여자의 기억력은 괴력을 발휘한다)
남자 :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 때의 남자는 정말로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여자 : 결국 넌 애정이 식은 거야! (말하자면 여자는 위로받고 싶다)
남자 : 그냥 잊어버렸을 뿐인데, 건망증이 애정하고 무슨 상관? (겨우 그런 걸로 유난을 떨었던 말이냐? 피곤하기만 한 남자)

이런 식으로 서로 동문서답을 반복하고 감정적 낭비를 거듭하며 끝없이 싸운다. 결국 그 차이를 극복 못한 연인들은 파국으로, 차이를 '일시적으로' 극복한 연인들은 위 장면의 네버엔딩월드로...
이렇게 보면 주로 여자는 과거지향적이고 남자는 현실순응적이라고 봐야 하나?

이 영화가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같은 의미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영화 속 '함께 사는' 남녀의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어서일 것이다. 

- 연애심리가 궁금하다면 읽어볼만한 몇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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왑샷 가문 연대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2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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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는 기성 작가들이 '책을 말하는 책'에서 언급하는 걸 가끔 본 적은 있으나 그때마다 아, 이런 작가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을 뿐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프랑스를 제외하면 작가의 국적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그래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미국 작가의 소설은 '틈이 나면 읽어야지' 쪽이다. 그러니까 '틈을 내서 읽어야지'는 아닌 것인데 덧붙이면 나는 대체로 영국이나 독일, 동구권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났을 때 깊은 감흥을 받는다. 그러니 그동안 치버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가 미국 작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의 문학'이라고도 하는 미국 문학은 읽다 보면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곧잘 받는데 이런 느낌은 20세기 초-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고 물론 치버도 그렇다. 거기다 존 치버의 소설은 거의 풍속소설에 가깝다.
'교외의 체호프'라고 불리운다는 존 치버는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장편소설은 겨우 다섯 편에 불과하다.
치버의 최초 장편소설『왑샷가문 연대기』를 읽은 감상은 체호프보다는 피츠제럴드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다. 구체적으로 풍경 등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1, 2부는 피츠제럴드를, 내용의 어조와 상관없이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순간 순간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았던 3부는 나보코프를 읽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소설 초반은 눈으로 문장 사이 사이에 '/'를 그어 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겹치고 겹치는 복문이 성가시기도 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
『왑샷가문 연대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풍경 묘사인데 말 그대로 사진 한 장을 앞에 놓고 보는 듯 하다. 읽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이 더 제격인 치버의 묘사는 시간과 공간, 사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그려넣는 식인데 이를테면 이렇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트래버틴에서부터 이미 그 기차에 올라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코벌리가 나와서 형과 함께 은 식기 공장을 지나고, "동물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라는 전설적인 문구가 쓰여 있는 라킨 씨의 낡은 헛간을 지나고, 렘센스의 밭과 '선원의 집'을 지나고, 얼음 연못과 양모제 공장을 지나고, 틀림블 부인의 세탁소를 지나고, 9시 18분 기차가 덜컹거리며 창가를 지나갈 때 민스파이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먹는 브라운 씨의 집을 지나고, 하워드의 집과 타운센드의 집과 건널목과 공동묘지와 줄로 톱날을 세우던 노인의 집을 지나갔다. 노인의 집이 마을의 맨 마지막 집이었다. - p.142 

'연대기'라는 거창한 제목에 자칫 겁을 먹을만도 하나 가계도가 필수였던 마르께스의『백년동안의 고독』에 비하면 왑샷 가문의 가계는 아주 단촐하다. 게다가 전체 등장인물의 수는 수적으로는 많지만 모두 주변인물일 뿐, 실제 이야기는 리앤더의 두 아들 모지스와 코벌리를 쫓아가기 때문에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형인 모지스는 의지나 노력에 비해 일이 잘 풀리는, 운이 좋은 인물인 반면 치버 자신이 모델이기도 한 둘째 코벌리는 뭘 해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결국 풀리긴 하나 쉽게 갈 길도 어렵게 가는, 인물이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간 두 형제의 족적을 따라가는 중간 중간에 아버지 리앤더의 일기가 삽입되는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은 사건보다는 일상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 즉 사건을 통해 인물이 드러나고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런 양식이 익숙하지 않으면 시종일관 건조하고 객관적인 작가의 어조가 자칫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심만 유지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두꺼운 페이지 수가 얇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다음은 소설을 읽던 중에 웃고 말았던 한 대목.

모지스는 역까지 그녀의 가방들을 들고 가서 클리블랜드행 기차에 실어 주었다. 비어트리스가 그에게 우아하게 작별 키스를 하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모지스, 내가 끔찍한 짓을 했어. 당신한테 꼭 말해야 할 것 같아. 그 사람들이 항상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누구한테나 당신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것 말이야. 어느 날 오후에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한참 동안 얘기를 늘어놓았어. 당신이 날 이용했고,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내 돈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날 부도덕한 여자로 생각했을 테니까. 미안해. 당신한테 나쁜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 이윽고 차장이 모두 승차했다고 외치자 기차가 클리블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 p.261 

내용의 뒷부분을 부연하면,
불쌍한 모지스는 비어트리스의 깜찍한 거짓말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된다. 하지만 얼마 뒤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니 모지스로서는 이 해프닝이 그리 비극도 그렇다고 그리 희극도 아니게 된 셈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이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이겠거니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현실과 많이 겹치는데 소설이 현실보다 덜 세속적인 것은 아마도 그의 심성 일면이 그러해서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읽으면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고, 읽고 나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 어떤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재미를 못 느끼다 한참이나 지나서 문득 "그 소설 재미있었는데" 하기도 한다.『왑샷가문 연대기』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다 읽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었어' 만족했던 소설이었다.

- 덧. 이 소설을 읽고난 후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 그대로 '교외의 체호프'가 딱 어울린다고 공감하게 되었다. 한편,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뒤로 펼쳐진 모든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치버의 서술을 읽으면서 장편이 딱인 것 같은 이 작가가 왜 대표적인 단편 작가가 된 것일까, 들었던 의문도 해소되었다. 단편소설로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이력이 충분히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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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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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몰란드 양, 당신이 품어온 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겁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이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영국 사람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인이지요. 제발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똑바로 보고 이해하고 판단해주세요. 그런 잔혹 행위를 해도 된다고 교육받은 적이 있습니까? 법이 그런 것을 묵인해 주고 있나요? 사람들간에 직접적인 왕래와 서신 교환이 잦은 이 나라에서, 남의 눈을 피할 길 없는 이 나라에서, 도로와 신문 덕분에 세상에 비밀이란 남아 있지 않게 된 이 나라에서 그런 잔혹 행위가 비밀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몰란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그들은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는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제인 오스틴,『노생거 수도원』중에서


위 문장은 소설『속죄』의 첫 머리에 작가가 인용한 제인 오스틴 소설의 한 대목이다.
책 읽는 걸 싫어하는 M군이 영화《어톤먼트:Atonement》를 본 직후 원작소설에 관한 것 그러니까 "실화인가" 등을 물어왔다. 영화의 결말이 아마 열린 구조였던 듯...
얘기를 듣다 보니 호기심이 생기고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가능한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순서를 선호하기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을 놔두고 소설『속죄』를 주문했다.

띠지의 포스터가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인게이지먼트 : A very long engagement》를 떠올리게 하는『속죄』는 어린 소녀 브리오니의 사소한 오해로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의 인생이 뒤틀려버리는 1부, 1부에서 인생이 꼬여버린 로비가 전쟁에서 겪는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좇아가는 2부,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속죄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입학을 포기하고 세실리아의 뒤를 이어 간호사의 길을 선택한 브리오니의 3부, 마지막으로 59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인「1999년 런던」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를테면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에필로그는 브리오니의 1인칭 서술로 시점이 바뀐다.
소설의 제목『속죄』는 어린 시절 자신이 한 거짓 증언 때문에 인생이 뒤틀려버린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브리오니가 속죄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기인한다.

읽는 동안 아마 서너 번쯤 소설을 팽개쳤던 것 같다.『속죄』는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그것이 픽션인 걸 알면서도, 지면을 벗어나 읽는 사람의 정서를 움켜쥐고 뒤흔드는 불편한 소설이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 M군과 나눈 몇 마디 대화와 책을 주문할 때 잠깐 읽어 본 서평으로 소설의 방향을 미리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 세 사람의 인생이 뒤틀리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안의 감정선이 픽션을 픽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설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결국 중반까지 읽었을 때, 책을 내려놓았다. 소설을 끝까지 무사히 완독하려면 아무래도 '브리오니' 이 멍청하고 바보같은 여자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브리오니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정에 빠져있는 13세의 소녀다. 아직은 삶에 이면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모르는 어린 브리오니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에 더 익숙하고, 선악의 경계는 완벽하게 분명해야 하며, 자신이 쓴 동화 속 질서가 그러한 것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권선징악적 구조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런 브리오니가 어느 날 어떤 장면을 목격한다.
소리가 사라진 영상은 어떤 의미일까. 예전에 모 통신사 광고가 소리를 제거한 영상을 먼저 보여준 다음, 다시 소리를 입힌 영상을 보여주는 CF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브리오니가 듣지는 못하고 보기만 한 장면들은 이렇다.

장면 1. 분수대 옆에 사랑하는 언니 세실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후원하고 있는 파출부의 아들 로비가 서 있다. 세실리아는 속옷만 남긴 채 옷을 모두 벗고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젖은 모습으로 나오고 이 광경을 로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파렴치하게 지켜보고 있다. 물론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모욕했다고 믿는다.
장면 2. 로비가 실수로 잘못 보낸, 세실리아에게 사과하는 편지에는 음란한 단어와 음란한 내용이 적혀있다. 이 편지를 훔쳐 본 직후 브리오니는 어두운 서재에서 로비에게 붙잡혀 신음하고 있는 세실리아를 목격한다. 물론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추행하는 것이라 믿는다.
장면 3. 경찰에게 연행되는 로비에게 달려가는 세실리아. 세실리아는 수갑에 채워진 로비의 손을 만지기도 하고, 로비의 옷깃을 잡고 흔들기도 한다. 물론 브리오니는 세실리아가 로비를 용서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의연한 세실리아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브리오니가 지켜본 위의 장면은 모두 소리는 거세되고 영상만 남은 장면이다. 하지만 영상에 소리가 입혀지면 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브리오니는 그녀가 본 것만 믿을 뿐 그 이면을 들여다 볼만큼의 통찰력은 없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의 세계는 주어와 동사만 존재하는 직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보는 세상의 질서는 그렇듯 간단하다. 잘못하면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브리오니의 눈에 로비는 악당이고 그래서 브리오니의 주변에 벌어진 흉악한 범죄의 죄인은 악당인 로비여야 한다. 이것이 13세 소녀의 논리다.
어른이 아이와 다른 점은 어른은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 세계의 축소판인 집, 인간, 자동차 등의 장난감으로 어른들의 흉내를 내지만 그것은 언제든 재생산이 가능한, 불행이 없는 모방의 세계다. 이러한 모방의 세계에 익숙한 아이는 어른과 달리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썼던 동화 속에서 주인공이 역경과 고난을 딛고 마침내 행복해지고, 악당은 벌을 받은 것처럼 그녀의 현실 세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속죄』는 소설 본연으로서의 재미도 재미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가 바라보는 '작가'에 대한 시선이 흥미롭다.
브리오니가 그들 세 사람에게 일어난 상황을 실제와 다르게 구성해서 출판사에 투고했을 때, 출판사 편집장이 원고를 되돌려 보내면서 밝히는 거절 사유가 무척 인상적이다.

소녀가 자기 앞에 펼쳐진 이 이상한 장면을 완전히 오해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것이 젊은 남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을 맺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여자의 부모님에게 폭로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부모는 분명 맏딸이 파출부의 아들과 사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젊은 남녀가 소녀를 연락원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p.438, 3부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면 3부까지만 읽기를 권함.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도 소설은 스토리 텔링이 뛰어나고 흡인력이 강해서 쉽게, 잘 읽힌다.
작가의 사실주의를 느낀 부분은 3부의 뒷 부분. 이전까지의 끈질기고 집요한 문체 대신 서두르는 듯 호흡이 들쑥날쑥한 문체가 등장한다. - 이러한 문체의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중간 중간, 전혀 졸음이 올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금씩 졸았는데 거의 100여 페이지나 읽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졸았던 문단은 여지없이 내가 뜨악해하는 의식 흐름의 기법이 쓰였다.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이러한 문체는 버니지아 울프나 프로스트처럼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체라기 보다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느낌이 있다. 물론 읽는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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