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특별하지 않은 청춘들의,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밴쿠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쩌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사흘을 보내게 되었는데 혼자가 되는 그 순간부터 숙박지였던 홀리데이인은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감옥처럼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는 하릴없이 호텔 밖 산책을 하는 대신 호텔 방에 틀어박혔다. 낯선 곳을 헤매는 것보다 낯선 곳에 웅크리는 편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밤. 난생 처음 낯선 곳에 남겨진 첫날 밤,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누웠는데 자꾸만 무서웠다. 그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낀 고독의 실체였다.
이튿날은 무작정 나가서 걸어 다녔는데 10월의 밴쿠버는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금방 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새까맣게 하늘을 덮는가 하면 어느새 거짓말처럼 햇살이 정박 중인 요트 위로 짱짱하게 내리 쬐었다. 그리하여 철 지난 관광지 같은 그곳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그저 집으로 갈 생각만 했었다. 나중에야 내가 묵었던 홀리데이인의 정문을 나가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서울 시내와 똑같이 사람들과 각종 상점으로 번잡한 곳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내가 사흘 내내 정문의 왼쪽으로만 걸어나갈 게 아니라 한번쯤 오른쪽으로 방향을 정했더라면 내 밴쿠버에서의 사흘은 훨씬 덜 외로웠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내 생을 통틀어 밴쿠버에서 보낸 그 사흘이 내 삶에 대해, 존재에 대해 가장 깊이 고민하고 사색한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상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망감과 외로움도 그때뿐, 지금은 그때의 감정을 기억조차 못한다. 다만 그때 그랬었지, 하는 정서적인 흔적만 남아 있다. 물론 그 흔적과 이어진 밴쿠버라는 도시에 대한 기억도 함께 남았다. 

밴쿠버가 우울한 기억으로 남은 공간이라면 신주쿠는 유쾌한 기억을 안겨 준 공간이다.

2002. 6. 신주쿠에서 마주친 표지판
[쓰레기 회수일 이외에 버리지 마시오]

벌써 8년 전이다. 도쿄 신주쿠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눈에 쏘옥 들어온 표지판인데 처음엔 한글을 보면서도 한글이라는 것을 얼른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다 뒤늦게 한글을 알아 보고 표지판 앞에서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었다. 겁을 줘야 할 경고문이 삐뚤삐뚤 글씨로 인해 친숙감마저 든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또 봐도 역시 재밌다. 아래쪽 잘 보이지 않는 글씨의 내용은 신주쿠署의 연락처다.

신주쿠내 쇼쿠안도리 구역에 가면 마치 서울에 있는 듯 착각을 하게 된다. 한국 PC방에, 은행에(외환/국민) 온통 한국말에 한국어 간판에 한국말로 손님을 호객하는 상인들까지. 특히 2002년 6월 월드컵 때 쇼쿠안도리의 한국 갈비집 앞마당은 모여든 한국 사람들이 외치는 "대- 한!민!국!"으로 장관이었다.  

과거의 사진을 정리할 때면 늘 깨닫는 것이 있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순간, 내가 움직이고 의식하는 순간... 그 어느 순간에도 나는 공간 속에 존재했고 그 공간을 통해 바깥과 소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 여행길에 챙겨서 온『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단 책의 제목이 좋다. '다만', '누구나의 삶' 이라니, 사적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창구인 공간을 얘기하는 이 책의 제목으로 참 적절하다. 
책은 누군가 나를 대신해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의 다양한 삶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를 들려준다. 읽으면서 즐거웠던 이유는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혹은 삶과 잇닿은 그들만의 공간 위로 과거 어느 순간 내게 어떤 의미로 절실했던 공간이 겹치는 경험이 잦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략)얼마 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법륜 스님 법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스님께서 두려움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실체도 없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겁먹고 사는 거라고."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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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니나 슈미트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고등학생 시절 나는 독일 문학과 전혜린에 한창 빠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내겐 청소년기를 함께 했던 독일 문학에 대한 일종의 '의리'같은 것이 있다. 독일문학이라면, 일단, 무조건, 호감부터 가지고 보는 일종의 부채의식이랄까. 그런데 오랜만에 읽은 독일 현대 소설『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의 인상은 뭐랄까, 표지 내지에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아, 요즘 독일에선 이런 소설이 인기가 있구나, 싶었다.
여러모로 낯이 익은 제목은 내용면에서도 비슷한 제목의 여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이 있고, 연인의 옛 연인이 같은 도시로 이사 오고, 사랑의 고전 테마인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삼각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양념인 질투로 인해 비롯되는 갖가지 해프닝들이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는 말하자면 독일 칙릿인데, 우리 기준으로 노처녀에 해당하는 34세인 안토니아의 유쾌한 성격과 그 성격이 빚어내는 좌충우돌 해프닝이 여러모로 선배 격인 '브리짓 존스'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안토니아가 하는 고민은 '노처녀'라는 꼬리표와 상관없이 연애를 시작한 모든 여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고민이다.
여자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그리하여 사실상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의 연애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연애의 시작이 남자에겐 사랑을 확인하는 종착역인 반면 여자에겐 사랑을 확인하는 출발역이라는 것이다. 주위에 연애를 하는 여자친구가 있어 본 사람은 다 안다. (남자친구와 이별하기 직전까지)그녀들을 무한반복으로 괴롭히는 고민은 "아무래도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걸.

안토니아의 좀 독특한 친구 카타는 '2년 위기설'로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연애에 위기를 맞은 안토니아의 불안을 더욱 부추기는데 카타의 주장처럼 연애가 호르몬만으로 정의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이론대로 되는 것이라면 인류사의 가장 오랜 이벤트일 '연애'가 얼마나 간단해지겠는가.

소설을 통해 나를 가장 웃겼던 인물은 바로 '흥분한 청소 닭' 카타다. 물론 안토니아의 시니컬한 혼잣말도 재미있다. 서사보다는 사건 중심이고, 화자가 1인칭이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한바탕 재미있는 수다를 듣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원제가 궁금해서 확인하니 '누구 하나 울 때까지'다. 원래 제목이 훨씬 좋은데 왜 제목을 바꿨을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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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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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정과 사회(직장)에서 안정된 위치에 있는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말기 폐암 진단과 함께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연명치료를 받을 것인가의 기로에 선 남자는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충실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여기에서 남자가 '충실하게'의 방점을 찍는 곳은 살아오는 동안 자신이 빚을 진 상대를 찾아 그 빚을 청산하리라는 결심이다. 그리하여 제일 처음 남자가 찾은 이는 제대로 고백 한 번 못 해보고 끝난 첫 사랑이다. 다음은 사소한 말다툼 끝에 30년 남짓 절교 상태로 있는 단짝 친구... 이렇게 남자는 조금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해나간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만약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왕이면 아프지 않고, 더 젊게, 더 오래 살고 싶은 소망의 끝에 있는 것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죽음이 슬픈 것은 누군가의 부재가 남겨진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떠나는 사람에게 남은 사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내는 사람 역시 떠나는 사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콧날이 찡했던 부분은 남자가 형과 대면한 자리에서 "내가 죽은 다음에..."라고 죽음에 관한 직접적인 표현을 했을 때였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남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그것이 남자로서는 불가항력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처연하게 다가온다.

읽기가 힘든 소설이었다.
작가의 진지한 문장도, 행간에 깃든 조용한 성찰도 좋았으나 그럼에도 읽기가 힘들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취향 탓이다. 잡식성 취향이지만 그럼에도 기피하는 장르는 있다. 바로 메디컬 류다. 드라마든 다큐멘터리든 소재나 배경이 메디컬 쪽이면 설령 그것이 코믹 장르라고 해도 의도적으로 채널을 돌려 버린다. 그래서 이제껏 내가 본 메디컬 드라마는 다섯 손가락도 못 채운다. 이는 영상을 볼 때 감정이입을 심하게 하는 기질 탓이 큰데 내 정서가 화면 속 메디컬 특유의 정서를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말 그대로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흑백을 구분하듯 구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남성인 것을 의식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나(주인공 후지야마)와 나의 여인들의 관계가 그렇다. 나에겐 아내 외에도 5년간 연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열다섯 살 연하의 에쓰코가 있는데 냉소적이고 쿨(cool)한 여성 에쓰코는 그렇다고 치고, 말기 폐암 진단을 받은 후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재회한 두 여인이 후지야마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거야말로 남자의 로망'이라고 작가의 성별을 확인하게 한다. 물론 버려지다시피 남자로부터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당한 여자들이 모두 옛 남자에게 원한을 품고 살지는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오랜 세월을 자기를 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며 사는 여자들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남자들의 판타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박범신의 신작『은교』에는 독일인 작가 실러의 '시간의 세 가지 걸음' 인용이 나온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고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에 관한 것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틀 전 엄마랑 통화할 때 엄마가 "오늘이 선물"이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물론 현재를 감사하고 현재에 충실 하라는 의미로, 최근 고민이 생긴 딸에게 엄마 나름대로 격려를 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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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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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었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조금 얇다고 느꼈던 총 234페이지의 이 산문집은 그러나 칠순이 훌쩍 넘은 작가의 진중한 삶의 무게로 인해 두께와 상관없이 풍성하고 곡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집 근처가 호수이기도 하고 내가 유난히 극성인 탓도 있지만) '비오는 날은 모기가 없다'는 항간의 설만 믿고 창을 다 열어두었더니 집안 곳곳으로 장마를 앞두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서늘한 바람이 참 시원하게도 밀려 들어온다. 덕분에 기분도 좋고 하여 오랜만에 오디오에 바흐의 CD를 걸고 분위기를 제대로 만든 다음『두부』를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았는데 중간쯤 읽었을 때 그만 독서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산문의 첫 문장이 '가을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였던 것. 앞서「가을의 예감」이라는 제목의 산문도 아무렇지 않게 읽어놓고선 저 한 문장엔 가슴이 덜컹한 것이다.

아직 여름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을이라니... 이 한 문장을 보는 순간 괜스레 뜨악해져버렸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해당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고 책을 얌전히 덮었다.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던 이 책은 아무래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야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심리는 매시간, 매분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죄책감에서 기인한다.
읽기를 중단하기 직전에 읽었던 챕터에 등장하는 꽃에 관한 얘기는 노작가의 꽃을 향한 절절한 열정과 애정이 느껴지는데 작가의 꽃 묘사는 정말이지 감탄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무릎팍 도사 - 엄홍길 대장편>에서 엄 대장이 8000미터 고도의 빙벽에 매달려서 듣는 바람소리를 '짐승울음소리 같은 바람소리'라고 표현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적절한 비유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얼마나 웅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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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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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나른한 오후의 아랫배를 머리로 들이받으며 내천(川)자가 들어간 도시의 이름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p.118 

국어 문법에서 '은유법' 은 독소항목인가 의심케만드는 다섯번째 단편「영원한 화자」는 이런 지독한 은유외에도 의미가 분절되어 도무지 앞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래서 금방 읽고도 뭘 읽었는지 도통 의미 파악이 안 되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다른 단편「종이물고기」에 등장하는 '실패한 농담들의 쓰레기장' 포스트잇을 위 단편에 붙여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총 아홉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달려라, 아비』에는「종이물고기」,「노크하지 않는 집」과 같은 괜찮은 단편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괜찮은'과 '안 괜찮은'의 간극이 너무 크다.
한 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 볼 수 있는 반면 그럴 듯한 겉모습에 끌려서 집어 먹었다가 괜히 배만 채우게 되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뷔페와 단편소설집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김애란의 소설집를 읽고 난 소감은 뭐라고 한 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다. 그녀가 너무 앞서갔거나 내가 너무 뒤처졌거나, 범인(凡人)인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는 문단의 음모이거나, 문학의 위기라고 부르짖는 평단의 위기이거나... 뭐, 아무려면 어떠한가.
그럼에도 기어이 하고 싶은 말은 여덟번째 단편을 읽기 시작한 직후,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등장하는 그 놈의 '아버지' 타령에 "아, 이젠 정말 지겹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것.
국내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이제 겨우 3년 남짓. 읽으면 읽을 수록 난감하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몇 몇 작가들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다. 재능의 가치란 그것의 희소성에 있다는 점에서 세상은 공평하다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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