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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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었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조금 얇다고 느꼈던 총 234페이지의 이 산문집은 그러나 칠순이 훌쩍 넘은 작가의 진중한 삶의 무게로 인해 두께와 상관없이 풍성하고 곡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집 근처가 호수이기도 하고 내가 유난히 극성인 탓도 있지만) '비오는 날은 모기가 없다'는 항간의 설만 믿고 창을 다 열어두었더니 집안 곳곳으로 장마를 앞두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서늘한 바람이 참 시원하게도 밀려 들어온다. 덕분에 기분도 좋고 하여 오랜만에 오디오에 바흐의 CD를 걸고 분위기를 제대로 만든 다음『두부』를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았는데 중간쯤 읽었을 때 그만 독서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산문의 첫 문장이 '가을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였던 것. 앞서「가을의 예감」이라는 제목의 산문도 아무렇지 않게 읽어놓고선 저 한 문장엔 가슴이 덜컹한 것이다.

아직 여름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을이라니... 이 한 문장을 보는 순간 괜스레 뜨악해져버렸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해당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고 책을 얌전히 덮었다.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던 이 책은 아무래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야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심리는 매시간, 매분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죄책감에서 기인한다.
읽기를 중단하기 직전에 읽었던 챕터에 등장하는 꽃에 관한 얘기는 노작가의 꽃을 향한 절절한 열정과 애정이 느껴지는데 작가의 꽃 묘사는 정말이지 감탄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무릎팍 도사 - 엄홍길 대장편>에서 엄 대장이 8000미터 고도의 빙벽에 매달려서 듣는 바람소리를 '짐승울음소리 같은 바람소리'라고 표현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적절한 비유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얼마나 웅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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