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 대역본> 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대역 (영문판 + 한글판 + MP3 CD)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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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는 자연이고, 가장 좋은 교육자 역시 자연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나 어렸을 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배경은 아무래도 어린 시절 상당한 기간을 시골 외가에서 보낸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나를 주체로, 세상을 객체로 인식하기 시작할 즈음인 여섯, 일곱 살의 대부분을 시골 외가에서 보낸 것은 내 정서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시골에서 보냈던 유년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한데 이를테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개구리를 잡으러 논두렁을 헤집고 다니던 거나, 어느 여름 장맛비에 내 키만큼 범람한 강물에 떠내려가던 돼지가 마냥 신기하기만 하던 것, 상여를 쫓아 길게 이어지던 행렬이 어린 마음에도 아련했던 것 등등 내 유년은 도시의 아이들은 경험하기 힘든 재미있고 특이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여담이지만 그중에는 닭과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 그러니까 국내 영화 <귀신이 산다>에서 배우 차승원이 닭을 무서워하는 장면을 보면서 진심으로 공감했던 나는 말하자면 '닭 포비아(phobia)'다, 사연은 이러하다. 집 앞 개울가에 빨래를 하러 가기 전 이모가 막 쪄낸 고구마를 내 손에 쥐어주었는데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내 고구마가 절반이나 사라지고 말았다. 도둑의 정체는 닭이었다. 뻔뻔한 닭은 내 고구마를 절반이나 먹어 치우고도 도망가기는커녕 정체불명의 머리통을 전후좌우로 까딱이면서 나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는데 당시 여섯 살이었던 내가 다음에 했던 행동은 뻔하다. 쪼그만 몸 어디에 그런 소리가 숨어 있었는지 나는 목청껏 울어 젖혔고 근처 개울가에 빨래를 하던 이모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원제가 '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이고 번역 제목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인 이 소설의 화자는 '작은 나무'(Little Tree)다. 부모님을 갓 여의고 조부를 따라 산으로 온 다섯 살 소년 '작은 나무'의 성장소설인 이 소설이 특별해지는 지점은 '산을 내려오다'(p.526)와 이어지는 '집으로 돌아오다'(p.618) 챕터이다. 공권력의 판단에 의해 작은 나무가 조부모와 산을 떠나 고아원으로 옮겨 가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보여줌으로써 흔히 제도권과 주류로 분류되는 사회의 가치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만 보이는 소소한 일상의 가치를 또렷하게 변별할 수 있게 한다.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공생하는 것을 배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묘사(p.193)를 통해 자연의 생장과 인간의 생장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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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종료] 6기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마리우스 세라 지음 / 푸른숲

나 또한 그 틀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면서도 타인의 생로병사를 보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는 것처럼 언제나 불편하다. 그래서 내겐 영상을 포함 소설이든 에세이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무조건 피하고 안 보는 버릇이 있는데 아무래도 '강 건너 불구경'식이 될 수밖에 없는,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생리적인 거부감이 든다.
슬픔은 슬픔이고, 비극은 비극이다. 남의 고통을 함부로 얘기해서도 안 되며, 함부로 들여다봐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고통이 한낱 이야깃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평소 생각하는바, 사정이 이렇고 보니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를 받았을 때,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면역이 약한 나는 좀 과장하면 아찔했다. 그러나 과정은 이렇듯 좀 거칠었으나 중요한 결론은 읽기를 잘 했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서술자와 서술자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되새겼는데 유유의 아빠이면서 책의 서술자이기도 한 저자의 담담한 서술이 특히 인상적이다. '다를 뿐 틀리지 않다'는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들 중 하나인데, 인생을 설계하면서 꿈에서조차 계획에 넣지 않았을 '날벼락'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유유 가족의 낙관성이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확인하게 한다.
 


-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생후 5주인 자신의 아이에게서 선천성 뇌질환을 발견했을 때, "왜 하필 내 아이에게(우리에게)"는 숱한 상처와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 아이가 내 아이, 내가 이 아이의 부모"가 된다. 그리고 이즈음에 이르면 부모는 이미 강해져 있다.

 

 

경계는 우리의 의식과 생활, 우리가 누리는 물질세계, 정신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그것의 속성이 워낙 모호하고 희미하여 미처 못 느낄 뿐,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의 간섭을 받으면서 산다. 그러므로 경계의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흥미를 가지고 책을 펼친다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를 소설 『소현』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세자가 인질의 신분으로 보냈던 심양에서의 9년, 그 중에서도 마지막 2년에 집중한다. 또한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것도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다. 그리하여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독백은 이 소설을 역사의 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으로 읽히게 한다.
 

삶을 긍정하고 낙관하는 힘은 누구도, 무엇도 아닌 바로 '나(자신)'에게서 나온다. 가끔, 인간의 고민은 너무 많이 가진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을 채워야 할 밑 빠진 독이 아니라 비워야 할 화수분으로 응시한다면 삶이 한층 가볍고 유쾌해질 텐데... 

 

중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차이는 뚜렷하다. 중국문학은 확실히 대륙의 특징인 확장성이 느껴지고 일본문학은 섬 특유의 오밀조밀 섬세한 느낌이 든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어느 제왕(이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가 선잠에 들어 꾼 꿈이라면 『딩씨 마을의 꿈』은 깜깜한 새벽에 꾸는 악몽 같다고 할까.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아이가 들려주는 매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 마을의 비극이 몽환적이고 기괴한 한편 현실적으로 다가와 더욱 섬뜩하다.

 

- 신간평가단 도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전기도 안 들어오는 깊은 오지에 홀로 사시는 스님을 뵌 적이 있어요. 그때 스님께서 붓글씨로 담락(湛樂)이라고 쓰셨는데 평화롭고 담담하게 즐긴다는 이 뜻이 가슴에 와 닿았죠. 스님처럼 살 수는 없더라도 인생을 이런 마음으로 살면 좋겠구나 하는 작은 깨침을 얻은 자리였어요. 얼마 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법륜 스님 법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스님께서 두려움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실체도 없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겁먹고 사는 거라고." - p.033,『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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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0-07-10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인삼 밭에 그 아낙네님. 마지막 글 잘 읽었습니다. 조곤조곤 야무지게 마지막 설명 써주신 거 보면서, 제가 신간 평가단 분들은 하여간 참 탁월하게 뽑았다는 자만심이 몰려옵니다. (응?) 고맙습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7-12 15:59   좋아요 0 | URL
늘 좋은 책을 보내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장마 전이라 그런지 습도도 높고 엄청 덥습니다. 올 여름도 시원하게 나시길 바랍니다~ ^^
 
<젊은 날의 깨달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젊은 날의 깨달음 -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혜민 (慧敏)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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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주변에 나무도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으면, 소리가 날까?"(p.27,『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나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한동안 교회에 열심히 나가셨는데 그러다 또 한동안은 절에 다니셨다. 지금은 어느 한 종교에 적을 두지 않고 다만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불교에 (아주)조금 더 친밀감을 느끼시는 듯 한데, 제사가 이유라면 아버지의 종교는 '유교'여야 되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매번 종교를 향한 아버지의 방향 전환은 매끄러웠다. 반면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엄마는 종교 없이 이십대를 보내고, 우리를 낳은 뒤로 (개신)교회에 열심히 나가시더니 지금은 카톨릭 교회에서 영세를 받고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서 미사를 올리는 카톨릭교인이시다. 부모님의 종교 역사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말하자면 종교에 관한한 비교적 유연하셨던 부모님 덕에 나 역시 종교간 경계에 비교적 자유로운 잣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 내 mp3 목록에는 CCM과 반야심경, 천수경 등이 사이좋게 함께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던 중에 특히 눈에 띄었던 구절이 다음 구절이다.

(…전략)교리에만 집착하면 종교 간의 건널 수 없는 차이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실제 실천 수행으로 들어가면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을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발표했다. - p. 119

언제부터인가 종교의 의미와 역할보다 종교인의 의미와 역할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내 종교는 정교요, 네 종교는 이단이라 목소리를 높이고 손가락질 하는 양태를 심심찮게 본다. 사회가 분화하고 다변화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의 한 단면이려니 이해하면서도 가끔 본질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껍데기가 설치는 세상이 되었나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혜민 스님은 이번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의 약력을 먼저 읽고 책을 펼치면서 한 때 내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물론 저자가 아닌 내가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나 책을 읽어가는 동안 다만 한 가지,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절대적인 무엇. 그것이 종교를 통한 구원이든, 절대자에게 복종하는 믿음이든, 자신의 내면을 향한 정진이든... 세상의 복잡한 욕심과 번뇌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나려는 한 출가인의 기꺼운 그 걸음이 부러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이후는 아포리즘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 책 전반이 그러하다. 책을 읽는 내내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는 편안한 기분이 든다. 
百人百色이라고 했다. 행복의 추구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적인 면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러니 누구의 선택, 누구의 방법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자리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도움을 줄 때 우리들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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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물이 많은데 정말로 잘 울고, 많이 운다. 
그런데 몇 년 전, 막상 안과에서 안구 건조증으로 눈물샘 검사를 했을 때 내 눈물샘은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랄 정도로 바짝 메말라 있었다. 눈물이 많으면 눈물샘이 건조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눈물과 눈물샘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신파’라고 해서 무조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것처럼.

눈물이 많은 나를 가장 많이 울린 영화는, 단연 <간첩 리철진>이다. 순진하고 착한 간첩 리철진이 너무나 불쌍해서 얼마나 심하게 울었던지, 어떻게 울었는고 하니 그야말로 대성통곡하듯 엉엉엉 목놓아 울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떻게 된 것이 리철진을 연기했던 배우 유오성 씨만 보면 울고 있는 것이다.
유오성 씨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난 한 놈만 패!’ 할 때도 울었고, 모CF에서 남들이 모두 예, 할 때 혼자만 ‘아니오!’ 할 때도 울고, <별>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 때는 간첩 리철진이 생각나서 또다시 통곡하면서 울고... 하여튼 좀 과장해서 유오성 씨 그림자만 나와도 울었다.
그러니 아예, ‘손수건, 휴지 옆에 갖다 놓고 마음껏 우십시오.’라고 신파를 대놓고 부추기는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는 일부러라도 안 봤다.
- 예전 일이지만 오빠의 소개로 어느 유명 영화 동호회에 가입하려고 설문지를 작성할 때 일이다. 그 때 질문란에 ‘제일 좋아하는 국내 배우’란이 있었는데 내가 유오성이라고 정성스럽게 써넣자, 오빠가 장난하냐고 해서 내가 발끈한 적이 있었다. 당시 유오성 씨는 ‘난 한 놈만 패!’로 한창 떴을 때였다.

서론이 길어진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 ‘신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딸 부잣집 둘째로 태어난 엄마 덕분에 나는 이모들이 많은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이모들이 주루룩 여고생, 여대생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큰 언니들 같기도 했다.
어려서 외가에 가면 바로 그 이모들 방에 틀어박혀서 이모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때 읽었던 것들 중, 신달자 씨의『물 위를 걷는 여자』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국내 여류작가들의 소설에 등장하는 신파를 싫어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 바로 이『물 위를 걷는 여자』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우희와 난희라는, 환경은 극과 극을 달리지만 친한 친구인 두 여자가 나온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우희는 개인의 성공을 위해 완벽하게 멋있는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유학을 떠나고, 이 남자는 난희와 결혼한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몰랐던 그 시절에도 우희가 불행해지는 걸로 결말을 맺는 이 소설을 읽고 어린 마음에도 화나고 불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책 한 권이 청소년기에 미치는 영향이란 이렇게 대단하다.

이후로 국내 여류작가의 소설에 대한 불신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공지영 씨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나『착한 여자』에 등장하는 청승의 대표주자처럼 보이는 여자들의 얘기에 ‘한국형 페미니즘’이라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었다. 결국『인간에 대한 예의』가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이 작가의 소설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다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나와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행.시는 너무 괜찮았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책을 주문하고, 이틀 뒤에 받아들고 그리고 읽었다. 원래 눈물이 많으니 울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눈물 없이는 못 읽는다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거의 안 울었다. 그 흔한 내 눈물이 인색했던 것은 소설 외적인 것에 대한 반발심이라거나, 소설에 감정이입이 덜 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소심한 이유가 아니다. 사형수를 통해 ‘용서’를 얘기하고 있는 이 소설의 주제를, 몇 달 전 모 방송국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픽션이 아닌 논픽션으로 이미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평하지 못하게도, 허구인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내게서 신파를 끌어낼 힘을 잃었던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는, 실제로 사형을 선고받은 여러 명의 사형수들이 나왔다. 어떤 피해자의 가족은 죄를 짓고서라도 감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가해자 사형수를 죽여버리겠다고 절규했고, 또 어떤 피해자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혼자 남겨진 존재의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아프고 안타까웠던 얘기는 6년 째 복역중인 사형수와 그 사형수를 용서한 피해자의 아버지가 나왔을 때였다. 그는 목사님이었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가해자를 용서했다. 하지만 용서받은 사형수도, 용서한 아버지도 날마다 고통 받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 소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날이 시큰해졌던 부분이 바로 ‘용서’ 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크게 두 곳이다.

수녀님 내가 나쁜 짓 하려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시간이 더 가서 나라에서 그놈을 덜컥 죽여버리기 전에 만나고 싶다구요. 이 늙은이가 배운 것도 없구, 하는 게 하나 없는데…… 가서 내가, 이놈아 네가 죽인 그 여자 에미다! 하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놈을 용서해주고 싶어요……. - p.103

용서할 수 없었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용서하기…… 싫어! 그 인간보다 더 용서할 수 없었던 엄마를…… 그런데 오늘…… 용서, 해보려구 온 거야! - p.280

각각, 사형수인 윤수의 일당에게 딸을 잃은 할머니와 가장 필요할 때 정작 자신을 외면해 버린 엄마를 향한 여자주인공 유정의 대사인데 책을 읽다가 가슴이 찌르르 아프면서 내가 훌쩍였던 부분이다.

어렸을 때 누군가가 내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아. 이 상투성이란...) 라고 물으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을 읽은 대다수는 보통 라스콜리니코프가 광장 한 복판에서 바닥에 입을 맞추고 ‘나는 살인자입니다’라고 외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고 하는데(이 부분은『우.행.시』에도 나온다) 나는 그가 전당포 노파를 살인하기로 계획을 세울 때 ‘모두가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았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뒤에 다시 깨닫게 되는 ‘세상에 죽어도 마땅한 자는 없다’라던 부분에 이르면 죄지은 자라고 해서 과연 누가 그를 단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형폐지론자다.
가해자를 사형 집행하는 이유가,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피해자를 대신한 사회의 복수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공공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사형이 아니라 무기형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건 '그'를 우리 사회에서 쫓아내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죽여서 안 보든, 격리시켜 안 보든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어차피 죽잖아. 그래봤자 살려놓아봤자, 기껏 오십 년도 안 돼서 다 죽잖아…… 오빠는 사는 게 그렇게 좋아? 그래서 살려주는 게 그렇게 배 아파? - p.234

그러나 누군가가 내게 ‘네가 피해자여도 그렇게 말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오면 나 역시 ‘그래’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었던 부분도 ‘용서’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기 희생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다 읽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차라리 늙은 수녀님이랑 사이코패스 사형수의 얘기였다면 작가가 주장하는(사형폐지) 주제가 설득력을 더 가졌을 텐데” 라고 투덜거리자 친구, “그럼 재미가 없잖아” 라고 했다.

(중략) 고모 내가 젤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그건 진부한 거야…… 그 자식이 조금 더 진부하지 않게 여잘 버렸다면, 진부하지 않은 의도로 나랑 결혼하려고 했다면 내가 그래도 눈 딱 감고 봐주려고 했는데…… 정말이라구. 난 그 자식이 진부하게 구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 그게 다야! 고모는 내 말을 믿어야 돼. 이 이야긴 첨 하는 거니까. 엄마도 오빠들도 식구들…… 이 이야긴 아무도 몰라. 그 사람들은 그저 내 변덕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도 그게 편해. 그래야 조금이라도 서로 덜 마주 보잖아. - p. 26 

진부함과 신파는, 아마 사촌쯤 되지 않을까?

정리하면, 

여기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유년 시절을 지나온, 아직 앳되고 예쁘장한 청년이 있다. 청년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형수다. 이 청년을 용서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형을 집행해야 할까?

청년은 죄를 짓지 않았다. 누명을 썼다. 도대체 이 청년의 뭘 용서한다는 걸까.
'사형 제도'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작가에게 왜 '윤수'여야 했는가, 묻지 않을 수가 싶다. 소설의 주인공이 '미모의 여교수와 억울한 청년 사형수'가 아니라 '칠순의 늙은 수녀님과 중년의 간악한 살인마'였다면 작가가 주제를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주제가 부각되는 사회소설이 아니라  슬픈 연애 소설을 한 편 읽은 것 같은 찌꺼기가 남는다. 작가의 어설픈 부르조아 근성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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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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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중, 하 세 권으로 이루어진, 조용한 베스트셀러라고 일컬어지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오랜만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읽은 소설이다.

- (上편) 비밀노트
읽기 시작한 직후부터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말 그대로 당혹스럽다. 세상의 금기가 천연덕스럽게, 태연하게 펼쳐진다. 윤리는 무너지고 도덕은 부재한다. 아고타의 문체는 독특하다. 건조하고 시니컬하다. 이러한 문체가 소설에서 받는 충격을 완화시켜 준다.「비밀노트」를 읽으면서 내내 영화 「금지된 장난」의 흑백 영상이 머리 한 쪽에서 떠나지 않았다.

- (中편) 타인의 증거
시리즈 중 단연 이 중편을 가장 사랑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읽은 여타의 소설들 중 특히 아끼는 목록에 포함시킬 것이 틀림없다. 4분의 3쯤. 아마 그 쯤에서였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울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중편을 읽는 동안은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다 하(下)편을 읽는 도중에 내가 울고 싶었던 이유가 소설이 너무 아름다워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문체는 여전히 건조하고 딱딱한 흑백톤이지만 나는 어느새 국경 근처 작은 시골 마을에 깊숙이 감정이 몰입되어 버렸고 루카스와 마티아스를 사랑하고 만 것이다.

- (下편) 50년 간의 고독
중편의 기억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탓이었을까. 상편의 긴장과 중편의 즐거움은 하편에 와서 김이 빠져 버렸다. 텅 빈 하늘로 끝도 없이 날아오르다 뚝- 끊어진 연을 보는 기분... 나는 그랬다.
'우리'였다가(상편) '루카스 혹은 클라우스'였다가(중편), 이제 확실히 분리된 '나'가 등장하는 하편은, 없었으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하고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마치 루카스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클라우스처럼.
하편이 시리즈를 완결 짓는 중요한 부분인 건 틀림없다. 하편에서는 상편에 나타난 두 아이들의 잔혹한 일상의 밑그림이 펼쳐진다. 하편에 이르러 이 시리즈가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모두 다 채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때로 비워놓고 남겨놓는 것도 괜찮은데... 하지만 이 것도 중편을 너무도 사랑하게 돼버린 내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의...』에서 작가의 모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에 당장은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어느 날, 어느 때 그녀의 다른 소설을 들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때가 지금은 아니다.
끝으로 이 소설을 발굴하고 번역을 낸 출판사의 안목에는 감사하지만 10여 년 동안 절판되었다가 재출판을 결정했을 때, 이왕이면 좀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곳곳에서 눈에 띄는 오타와, 세련되지 못한 편집이 읽는 내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출판업계의 번역 양태를 보면 이것도 배부른 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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