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도시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시크.데이비드 마추켈리 글.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97년도인가, 프랑스인 교수님이 <뉴욕 3부작>을 '강추'하셨었다. 영어로 된 <뉴욕 3부작>을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빌려주곤 하셨는데, 책을 읽고야 안 일이지만 폴 오스터는 (프랑스에서 번역을 하며 지냈던 삶의 영향이 약간은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폴 오스터 붐이 한국에서 일기 전, 프랑스인 교수님을 통해 안 폴 오스터는 전혀 쉬운 작가가 아니었다. 폴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도시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 길을 잃곤 했다.

그래픽 노블 <유리의 도시>는 <뉴욕 3부작> 중 첫번째 에피소드인 <유리의 도시>를 형식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이야기만 두고 보면 원작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글이 하던 것을 그림이 나누어 맡는 식이다. 선 하나가 구불거리고 뻗어가 뉴욕의 마천루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말이 없어도, 설명이 없어도, 뉴욕 안에서 점차 미궁으로 걸어들어가는 퀸의 내면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종래는 나 역시 길을 읽고 만다.  '나'를 '나'로 규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원작을 읽고 그래픽 노블을 읽으니 새로운 맛이 있어서 좋았다. 인물의 혼란을 그림으로 그려내면서 단순하고 괴이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은, 원작의 힘도 있겠지만 역시 각색자들의 창조력과 관련있을 것이다. 가끔은 제2의 창작이 아닌 듯한 느낌마저 드니까.

책장을 넘겨감에 따라, 폴 오스터의 비교적 최근작인 <환상의 책>이 떠올랐다. 존재와 존재의 증명, 존재의 소멸. 그리고 필립 말로와 LA가 떠올랐다(폴 오스터가 <유리의 도시>를 쓰면서 챈들러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설정에 있어서 특히). 이 사색적인 작가들에게 있어 도시는 언제나 매력적인 탐색의 공간이고, 그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은 군중에 파묻히기 일쑤이며, 도시와 사람들의 뒤를 캐야 하는 탐정은 스스로에 대해 자문하는 순간 무너지기 쉬운, 깨지기 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현대의 전설은 바로 그 도시에서 태어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 한나 스웬슨 시리즈 1
조앤 플루크 지음, 박영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에 잠이 안 와서 새벽 2시에 벌떡 일어나 읽기 시작했는데, 4시 반쯤에 다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추리물의 하위장르마다 소비되는 방식이 다를텐데, 결과적으로는 다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빠른 시간 내에 집중해 읽을 수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 <흑사관 살인사건>같이 지적 우월함으로 밀고 나가는 작품이 아니면 금새 흥미를 가지고 빠져드는 편이다.


코지 미스터리물의 매력은 수다에 있다. 일상성에도 있고. -ㅅ- 아줌마 작가들이 활개칠 수 있는 장르. 글로 수다를 떤다. 실제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에 뛰어들고 해결해가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략과 전술이 있기 보다는 약간의 무모함과 설레발, 오지랖 넓음으로 산만하게 사건으로 뛰어들어가는 형국이다.


너무 사소하게 시작하다보니, 처음에는 좀 답답하다. (답답하다아아아아!) 누가 아침에 어디 가서 누구랑 수다를 떨고, 누가 어째서 짜증나고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건이 일어나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단 그 부산스러움에 적응이 되면 빠져들기는 쉽다. 이를테면, 동네 목욕탕 아줌마들의 수다를 들으면서 "아, 시끄러" 하다가 어느 순간 아줌마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그래봐야 어느 집 누가 어떻게 되었다더라- 는 얘기들, 게다가 나는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 일 뿐이지만)에 빠져들어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식이다. 실제로 사건도 그렇게 접근해간다!


책을 읽다가 진짜 웃겼던 건 뭐냐면, 내가 어느 순간부터 한나의 극성스런 중매쟁이 엄마의 시점에서 동일시를 하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아아, 어째서!) 그래서 한나에게 남자가 나타나면 "잡아!" 라던가 "사귀라구!"라던가 "자!"라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나 할까. 아하하;;; 아줌마 수다라고는 했지만 한나는 아직 미혼이고, 그녀의 결혼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은 엄마를 두고 있다. 당연히, 책은 한나의 로맨스 라인에도 관심을 갖는다. (코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층과도 관련이 있는 설정일 것이다) 엄마가 맺어주려고 했던 치과 의사 노먼을 (일단 무작정) 싫어하던 한나는, 무려 노먼이 드릴로 이빨을 뚫어버리는 식의 악몽까지 꾸는데, 알고 보니 노먼이 꽤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머 감각도 있고 말이지. 그런데 중반에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난다. 아하하하하;;;; 잘 안 풀리던 혼기 지난 여자(그렇다고 나이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다)에게 갑자기,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 둘이 떡하니 나타난다는 설정은 정말- 너무 판타지스럽지 아니한가. 작가 Q&A를 보니까, 시리즈가 꽤 진행되도록 한나는 두 남자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듯. 노먼은 모범적으로 매력적인 타입이고, 마이크는 사연 많지만 나이스한 섹시남 스타일이라- 둘 다 좋아하는 걸 이해할 수 밖에 없을 듯.


추리소설로 보면, 아마추어 탐정이 좌충우돌하며 사건으로 다가가는 과정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천재적 두뇌 따위와 관련이 없으니 애초에 우왕좌왕하는 것. 생명이 위험한 줄도 모르고 설레발치는 것도 있고, TV 속 과학수사 따라한다고 얼빵한 짓 하는 것도 있고. 시리즈 후속 책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조앤 플루크는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한나 스벤슨 시리즈를 꾸준히 써서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 주인공 한나가 '쿠키단지'라는 쿠키가게를 운영하는데, 그래서 온갖 쿠키 메뉴가 시리즈의 제목이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살인사건> <블루베리 머핀 살인사건> <레몬 머렝게 파이 살인사건> 하는 식으로. 작가 홈페이지를 보면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홈페이지 주소가 murder she baked 닷컴으로, murder she wrote의 패러디인데, 그 또한 어울리지 않는가. 아하하하;;;

미국판 표지.



일본판 표지

헝가리어판 표지

 


태국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06-04-1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판 표지가 이쁘네요.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marina🦊 2006-04-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비연 님 덕분에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사실을 알았네요.
미국판 표지들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예쁘더라구요. ^^ cozy 한 매력이 있어요.

상복의랑데뷰 2006-04-1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여기서 또 뵙는군요. 축하드립니다. ^^

marina🦊 2006-04-1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안녕하세요 ^^ 감사합니다아~
 
안녕 뉴욕 - 영화와 함께한 뉴욕에서의 408일
백은하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왜 뉴욕을 좋아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그냥 어깨를 으쓱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말로 하면 장황해질게 뻔하고, 애정을 충분히 표현하지도 못할 것도 분명하니까. 처음 밟았던 뉴욕 땅은 이상하게도 아무 것도 낯설지 않았다(파리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는 풍경 투성이었다. 여기 <세렌디피티>가 있고, 저기 <맨해튼 미스터리>가 있고, 그곳에 <섹스 앤 시티>가 있었다. 큰 건물만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뒷골목이나 카페마저 그러했다.


<안녕 뉴욕>은 그때 그 기분을 상기시키는 책이다. 그때 그 기분 말이다. 끝도 없는 기시감으로 가득한 도시 뉴욕을 뒤지고 다니던 시간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부러웠다. 이런 영화들을, 공연을, 사람들을, 나도 만나고 싶다. 서울에서 폐지처럼 잔뜩 구겨져 살아가고싶지 않단 말이다. 어쨌건.


드라마와 영화에 나온 장소들에 가는 법을 알려주고, 뉴욕에서 열리는 영화제 소개를 곁들인 이 책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없는 뉴욕 여행 동반자다. 이 책이 쓰여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나도 고민이 많았고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그래서, 이 책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여행에 관한 것도 아니고 이국의 문물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에 관한 이야기고 서른 즈음에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ㅅ- 위험하다잖아요. 책의 부제인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라는 말은 이 책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책은 서구의 회화 속에 나타난 책을 읽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독서 방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려주는데, 미술 관련 일반 교양서적에서 흔히 보게 되는 그림들이 아닌, 꽤 새로운 그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앙투안 보두앵의 '책 읽는 여자'라는 그림만 해도 그렇습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의 귀부인이 읽다 만 책을 왼손 아래로 떨구고 있는데, 그녀의 오른손은 의미심장하게도 치마 아래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그림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지요. 그리고 줄이어 책을 읽는 여자들을 그린 회화 작품이나 조각 작품들 삽화와 함께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가 도덕 설교자들의 혹평을 듣게 된 이유부터 말입니다.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를 그린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에서 마리아는 놀랍게도 책을 들고 있으며 깜짝 놀란 표정입니다(성령의 충만함에 취한 표정이 아니라). 저자는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그림의 마리아처럼 열심히 책에 몰두하던 사람은 다른 이의 방해를 받게 되면 놀란다"라는 재치있는 코멘트를 날립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부분들은 각 장의 서두를 장식하는 서문들입니다. 각 장에서 할 이야기를 요약적으로 잘 들려주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여인에게 하는 청혼'이라는 그림도 수록되어 있는데, 여인은 갈매기처럼 펼쳐진 책장을 향해서만 볼을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을 뿐입니다. 여인이 책을 펴 든 손을 잡고 간절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인상적인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대해 필자는 "여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관심을 즐기기는 하지만, 독서에 몰두함으로서 혹은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함으로써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장 에티엔 리오타르의'마담 아델라이드'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색감과 편안함, 책과 독자의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터키 풍의 의복이 풍기는 이국적인 분위기도 한몫 하는 건 분명합니다.
 
책읽기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 역시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책장은 술술 넘어가지만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납치된 공주
카렌 두베 지음, 안성찬 옮김 / 들녘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받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사서 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들녘이라는 출판사가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펴낸 곳이기 때문이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으며 마지막에 얼마나 울어댔던가!) 내게 들녘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꽤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을 의욕적으로 소개한다는 인상이 강한 상태. 특히 독일산 판타지물을. <납치된 공주>는 마법사와 용, 난쟁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다. 추운 북쪽나라에 사는 아름다운 공주님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운 동화.

책 뒷표지에 적힌 줄거리는 상당히 충실하다. 사실 문제는 그것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많은 이야기들은, 좀 긴 동화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카렌 두베는 다행히도 글을 잘 쓰는 작가인지라, 표현이 풍성하고 아름답다.  "북쪽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왕국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여행을 그리 많이 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라는 묘사만으로 북쪽나라와 이 이야깃속의 나라에 대해 눈 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지 않은가. 정말 동화답게도, 이 이야기에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용맹하고 잘생긴 남자들이 나오고, 괴물들이 등장하며, 오딧세우스의 그것과 같은 기나긴 여행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납치하고(혹은 되고), 사랑에 빠지고, 질투를 한다. 아마 내 마음이 조금 더 순수했으면 이 이야기를 훨씬 더 즐겼을 것이다.

인물들은 사랑스럽고, 마지막의 해피엔딩은 모두에게 돌아간다. 리스바나 공주가 누구를 택할까 하는 문제는 사실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그 없이 못 산다는 사랑이라 해도, 잃고 나서 잘만 살아지는 법이고, 순수한 사랑의 관념은 사실 수명이 짧은 것이니까- 사랑을 꼭 여기서 이루지 않은 자라 해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잃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