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
신주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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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미래를 위해 저당 잡혀 있는 9의 삶. 그러니까 내게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위안, 아니 복수의 방법은 죽음뿐이었어요.

허들 P68


주제작 「허들」은 유서를 쓰는 '나'의 이야기이다. 남동생의 유학 비용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복수(?) 하고 싶은 마음에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자신도 유학을 가고 싶다는 '나'에게 엄마는 <견디는 삶>을 반복하라고 이야기한다. 가끔 희생을 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드라마나 글을 보면 엄마도 딸이었던 때가 있었을 텐데 왜 같은 삶을 강요하는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암담하지 몸소 겪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과 같은 인생을 딸에게 견디라고 하는 강요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딸이 없어서일까?


<엄마, 엄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라며 돌아가신 엄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이에게 질문하는 '나'는 잠 못 드는 밤에 <양 네 마리, 양 여섯 마리, 양 아홉 마리>를 센다. 밤에서 새벽으로 변해가는 시간, 날이 밝으면 다시 삶은 계속 되어 진다. 멈치지 않고 계속 될 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으로 정했을까?

「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에서 영도는 탈북민이다. 살고 싶어서 탈북을 하고 3년을 해외에서 떠돌다 한국에 온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나게 된 지하방에서 사는 작가 지망생은 영도에게 험하게 살았겠다며 밥도 굶고, 먹을 게 없어 사람도 먹고 그러다면서요라고 말한다. 영도는 굶지 않고 살아있으며 그런 것은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불쌍하다. 나보다 더한 인간들이니까 등의 말 중 무엇이 영도를 화나게 했을까? 다른 이들처럼 밥을 먹고 잘 살아가는 평범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한 것일까? 타인을 보는 시선앞에 가득한 장애물들을 치우고 싶다. 죽을 위기의 메콩강을 건너 다른 세계로 왔지만 이곳도 이전 세계와 다를 게 없으며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이곳은 공평한 세상이고 건너야 할 다른 세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영도가 꿈꾸는 또 다른 세계는 존재할까?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평범이라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단어일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럽게 다가왔다.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들이 과연 평범한 것일까? 지구의 80억 인구가 모두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데 평범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회 통념이 정한 평범에 맞추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실패한 인생인가? 누구나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을 특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의 전반에 흐르는 느낌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발버둥과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견디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찾아가는 이들에게 기대를 하게 한다. <너무 뛰지 않기로 했다.>는 작가의 말대로 때로는 내 앞의 장애물을 뛰어넘는 대신 기권을 선택하거나 돌아가는, 전력 질주의 삶에 여유로움을 한편에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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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우샤오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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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독 성폭력 피해자는 이러이런한 모습일 거라는 <틀>을 정해놓고 그것을 벗어난 행동이나 말을 하면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이 아니냐, 그런 일을 당할 빌미를 준 것이 아니냐 비난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상황, 환경 등 모든 상황이 무시되는데 그것을 제3자인 타인들이 알 수 있을까? 모든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왜 비난을 하는 것일까?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인가? 그들의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둘이 좋아서 한 일이고, 설령 화이구가 강제로 했더라도 신핑이가 잘못이 없는 건 아니라구요. 짧은 치마를 입고 남의 집에 가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으니까요.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P295


성폭력 기사에서 많이 보던 댓글이다. <그러게 왜 밤늦게 다니냐, 왜 술을 취할 만큼 마셨냐. 옷차림이 야하니 당한 거다>등 2차 가해가 이루어진다. 피해자와 같은 동성의 사람들. 여성이 여성을 남성이 남성을 비난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댓글과 비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가끔 수사를 하여 잡고 보면 평범한 직장인, 주부, 학생들, 심지어 중학생들이 있을 때도 있다. 길거리를 지나며 무심히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들의 말이 2차 가해가 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대상 없이 쌓은 분노를 먹잇감을 찾은 양 퍼붓는다. 다른 이에게 짓밣혔으니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것일까?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피해자 다움>은 어떤 모습일까? 우울하고 슬픔에 빠져 울어야 하는 것인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원망을 퍼부어야 하는 것일까? 피해자는 웃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아야 하는 것일까? 직접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이들은 알지 못하기에 그들을 모습을 상상하고 그 상상대로 움직이면 동정하고 위로를 하고 상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비난을 한다. 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말 없는 행동의 의미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인지,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더 힘이 있어 보여서일까? 그들의 입장이 되어 자신도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희열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인지. 책장 한구석에 꽂힌 예전에 공부했던 심리학 책을 꺼내고 싶어졌다.


우샤오러는 몇 번이나 "그들에게 자기 얼굴을 되찾아 주고 싶다."고 언급했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P 443


<우리는 한 사람을 보호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을 어리석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꾸밉니다. 그들이 동정을 얻기 싶도록 말이지요. 동시에 그 사람의 개성을 빼앗습니다. P443>라고 한다. 보호받는다는 것은 약하다. 그렇게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연민을 느끼고 그리고 자신이 보호 대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반복되어 순응하면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휘두르기 시작한다. 그들의 모습이 지워지며 폭력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엔아이써가 물건으로 보일 때면 걷어차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화가 나면 책상을 차는 것처럼 말이야. P430,431>라는 판옌중의 말이 우샤오러의 인터뷰를 보고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또한 그 사건을 통해 '문 안에서'행해지는 폭력은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도 배웠다. 그렇다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가정 내 폭력을 성토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런 사건들의 유사성을 해결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P305


'문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다른 이들은 상관하지 말라는 말은 가해자들의 레퍼토리이다. 맞는 말일까? 가정 내에서 일어는 일에 타인이나 사회가 끼어들 수 없는 것일까? 책임이 없는 것인가? <「우리에게 비밀은 없다」는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고, 그렇게 시작된 대화가 어렵고 민감한 지점에 다다라도 끝까지 마주 보기를 택한다.>라는 정세랑 소설가의 추천사에 눈길이 머물렀다. 우리는 불편한 주제인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끝까지 마주한 적이 있을까?


만약 쏭화이구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다면 어떤 결과가 되었을까?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변명에 사람들이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있을지...


전형적이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를 사회는 어떻게 대하는가?

피해자 사이의 연대는 순하고 아름답기만 할까?

- 정세랑 소설가


이 책은 문학이 왜 위대한 언어인지를 증명하면서 문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식론이다. 스릴러 장르로서 우리의 심박수를 높이지만, 평화를 준다.

정희진 여성학자, 「아주 친밀한 폭력」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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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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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죽지 않을 거다.

내가 죽을 리 없다.

나만큼은······.

귀중하니까.

핀처 마틴 P17


'배가 난파당해서 바위섬에 올라 살아남았다'라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 책의 몇십 페이지에 걸쳐서 나온다.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 손의 선을 따라서 다시 방수복의 한쪽 소매, 한쪽 어깨가 시작되는 곳까지 좇아갔다. P31>처럼 핀처 마틴의 시선과 생각, 감정들이 세밀하고 치밀하게 촘촘히 그려진다. 심리, 풍경, 상황, 행동 등이 마치 관객이 존재하는 연극의 한편을 보는 시나리오처럼 디테일하였다. 실제로 윌리엄 골딩은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핀처 마틴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묘사이지만 우리 주위에도 현시대에도 있는 군상의 모습이다. 사람은 누구나 삶에 대해 강력한 집착을 가진다. <난 살아남을 거야! P93>라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마틴의 모습을 독자는 보게 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 이입이 되어 간절해지기도 한다. <나는 지성적이다. P41>이라 생각을 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상황을 파악해 나가던 마틴은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롭다고! P200>라며 점점 미쳐간다. 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조차 망망대해 바다에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추체험인 것일까?


학생 : "핀처 마틴이 죽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골딩 : "영원히 걸립니다."

학생 : "아니 실제 시간으로는 얼마나 걸리나요?"

골딩 : "영원히 걸립니다."

핀처 마틴 P288


골딩은 서식스의 강연에서 한 학생에게 핀처 마틴이 죽기까지의 시간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그의 대답은 <영원히>였다. 마틴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는 것일까? 물리적 시간은 유한하지만 상대적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일까? 사람이 죽기 전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이 시간은 누군가에는 찰나라 느낄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원처럼 길 수도 있다. 그러나 마틴의 길고 긴 이야기를 주마등이라는 단어로 묶어두기에는 너무 깊지 않을까? 죽음 앞에 나의 주마등은 어떤 장면들일지...


핀처 마틴 1956년에 발표되었다. 전쟁 중인 함대에서 해군으로 근무하는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의 이야기이다. 제목의 핀처 마틴의 핀처(Pincher)는 해군에서의 별명이며 <꼬집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핀처의 육체적인 욕망을 뜻한다. 별명처럼 원하는 모든 것들을 탐욕스럽게 꼬집는다. 그리고 그의 성인 마틴은 <화성(Mars)이라는 뜻으로 호전적인 성격을 상징한다. 크리스토퍼(Christopher)라는 그의 진짜 이름의 의미는 <십자가를 지는 자>라는 뜻이다. 핀처의 영혼을 상징한다.


윌리엄 골딩은 자신의 1954년 발표한 파리대왕으로 198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오늘날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1956년 핀처 마틴을 발표하는데 세간에서는 그의 문제작으로 평하기도 한다. 골딩은 옥스퍼드 대학교를 다녔고 연극계에서 배우로도 활동했으며 2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다. 이는 핀처 마틴도 비슷하다. 골딩 자신이 경험을 작품 안에 어우러지게 한 것이다.


<방수 장화>에 대한 부분이 여러 번 나오기는 하였지만 별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처음으로 돌아가 방수 장화라는 단어를 다시 찾아보았다. 방수 장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것을 선택했을까? 바다라는 공간이 의미가 있나? 파리대왕만 큰 어려운 책에 윌리엄 골딩이 전하고 한 의미를 반에 반도 이해는 하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쿡쿡 찌른 것의 정체를 알게 되면 조금은 알 수 있을까? 백지민 번역가의 작품해설의 <다시 읽어 본다면 핀처 마틴이 작품 내내 마치 바늘로 눈을 찌르는 듯한 예리한 깨달음들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P310>라는 글을 믿고 다시 한번 정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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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인간혐오자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5
몰리에르 지음, 김혜영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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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전 희곡을 대표하는 몰리에르의 「인간 혐오자」는 당시 사교계의 민낯과 인간에 대한 위선과 환멸이 가득하다. 1666년 6월 초연되지만 종교계의 거센 반발로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중단된 몰리에르의 작품으로는 1664년 발표된 「타르퓌르」도 있다. 이 작품은 성직자들의 위선적인 이중적인 생활 모습을 풍자하여 당시 성직자의 항의로 무대에서 내려졌다. 그러다 타르퓌르는 1669년 다시 무대에 오르며 큰 호응을 얻게 된다.


17세기 당시 희극은 오락거리로 취급되며 비극보다 하위 장르에 속했다. 몰리에르는 웃음을 유도하면서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희극의 위치를 비극과 동등하게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궁정은 물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격과 논란을 일으켰다.


「인간 혐오자」의 주인공 알세스트는 인간을 <비열한 아첨과 부당한 행위, 배신, 교활함뿐 P15>이라 평한다. 그래서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는 사람들이 솔직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명예를 중시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만 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셀리맨이다. 그녀의 살롱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 중 오롱트는 알세스트를 존경하여 그에게 자신의 시를 들려주지만 알세스트는 형편없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이의 화가 난 오롱트는 알세스트를 고발한다. 오롱트는 셀리맨에게 구애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인간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정직함, 선량한 헌신, 정의, 명예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 중략 -

이 음흉한 것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어!

인간 혐오자 P120


오롱트가 자신을 법원에 고발했지만 시에 대해 평가한 것뿐이라 판결에서 이길 거라 생각했지만 패소한다. 이에 알세스트는 세상과 법원에 소리쳐 분노한다. 그리고 법원의 결정에 <다들 나의 정당한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걸 너무 잘 알거든. 이번 일이 오히려 화제가 되어서 우리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에 대한 특별한 증거로 후대에 남았으면 좋겠어. P121>라며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지노에가 건넨 편지로 화가 난 알세스트는 셀리맨에게 자신인지 오롱트인지 선택을 하라 강요한다.


<사랑을 결정짓는 것은 이성이 아니잖아. P24>라는 알세스트에게 다른 이들을 대하는 셀리맨의 모습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알세스트에게 사랑은 <전부>인 것일까? 자신을 온전히 전부 주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일까?


서평을 쓰려 옮길 부분을 찾다 보니 어떤 곳은 페이지 전체를 옮기고 싶어지는 곳들이 있었다. <예외는 없어. 모두가 혐오스러워. P16> 이후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은 4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존재한다. 이런한 것들이 고전을 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네는 사회적 통념에 너무 날을 세우고 있어. P18>로 시작하는 팔랭트의 대답 또한 페이지 전부를 옮겨 놓고 싶다. 알세이트가 나열한 인간을 혐오하는 이유에 대한 팔랭트의 대답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답이 아닐까?


최근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얼굴을 마주할 일이 줄어들었다. 안부는 전화나 카톡으로 하고 있다. 진심을 숨기기가 쉬워진 것이다.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찬찬히 되돌아보면 짚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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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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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원문을 읽지 못하는 영알못에게는 출판사의 번역에 의존한다. 책의 말미에 있는 <빗속의 고양이>의 기존 작품 번역과 비교 번역문을 보며 수많은 명작이 쓰인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오지만 게으름의 끝판왕이 해낼 수 있을지... 인친님 중 한 분이 올해는 원서 읽기에 도전한다는데 동참해 볼까 고민을 해 봐야겠다.


노인과 바다로 너무나 유명한 헤밍웨이의 단편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단편들은 문체가 짧고 간결해서 읽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의 글은 <빙산 이론>으로 함축되어 있는 작품들이라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면 작품을 읽고 나서 '뭐지?'하고 갸웃한다.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은 <나는 늘 빙산의 원칙에 따라 글을 쓰려고 노력해요. 우리 눈에 보이는 부분마다 물밑으로는 8분의 7이 있죠. 아는 건 뭐든 없앨 수 있어요. 그럴수록 빙산은 더욱 단단해지죠. 그게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 헤밍웨이의 말/ 마음산책>에서 나왔다. 그는 내용의 8분의 1만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단편들을 읽고 나니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다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식당을 찾아왔다 그냥 간 킬러 이야기, 여름 날 기차역에 앉아 흰 코끼리를 닮은 산등성이를 보면 술을 마시는 두 남녀, 시골 대장간의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 이탈리아에 피난 온 헝가리의 어린 혁명가, 창밖의 빗속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여자와 남편 등의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단편들은 쉽게 읽혀지만 헤밍웨이가 빙산 아래 숨겨둔 생각을 읽어내기에는 어려웠다.


그래. 이제 그는 죽음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한 가지 그가 항상 두려워했던 것은 고통이었다. -중략 - 지금은 지독한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느꼈을 즈음, 그 고통은 멈추었다. P53


주제작인 킬리만자로의 눈은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을 찾아 여행을 가다 다리를 다친 남자와 그를 간호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작가 해리는 가볍게 다친 다리를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다리가 썩어간다. 이 주일이 넘게 고립된 곳에서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공포라는 단어와 한 쌍처럼 따라다닌다. 그런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본 킬리만자로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실제일까? 허상일까? 환영일까? 무엇이 진짜일까? 비극과 희극을 교묘히 교차해놓아 헷갈린다. 글의 구조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결말이 있어 우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읽고 나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작품은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였다. 옮긴이의 작품 해설이 따로 없어 한참을 고민하였다. 몇 번을 읽어보며 몇몇의 단어들을 조합해 보기는 했지만 역시 작품 해설이 필요했다. 검색을 하여 몇몇 글을 읽어보서야 아! 하는 깨우침의 탄성이 나왔다.(바보 같은 표정이었을 듯)


"만약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꼭 할 필요는 없어.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당신 정말로 원하는 거야?"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당신이 정말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길 바라."

킬리만자로의 눈 중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 P90>


몇 번 반복하다 찾아낸 단어는 <수술>이었다 두 남녀는 마드리드로 수술을 하러 가는 길인듯 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원하지 않으면 (수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런 남자에게 여자는 (수술) 하는 것을 정말 원하는지 물어본다. 남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여자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여행 가방에 모든 호텔에 라벨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여행을 하며 지내는 사람들 같다. 그런 이들에게 어쩌면 아이는 구속일 수도 있다.


이 글은 <"당신 기분이 나아진 건가?" -중략- " 내게 나쁠 건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좋아." P95>라고 끝이 난다. (많이 공개되어 인용함) 수술을 하여도 나를 사랑하는냐고 물었던 여자는 어떤 선택을 하였기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서평을 쓰려 검색을 하다 마음산책에서 펴낸 <헤밍웨이의 말>에 대한 리뷰를 읽게 되었다.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 그의 문체, 삶 등을 알 수 있는 그의 말들이 담겨있다. 그가 왜 마지막에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져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 이정서는 <번역은 직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직역의 의미는 '작가가 쓴 문장의 서술 구조를 살려주는 번역'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번역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작품의 의미는 전달이 된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비교 번역문을 보니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봄 출판사에 이정서 번역가의 작품이 더 있어 찾아 읽어봐야겠다. 특히 좋아하는 <어린 왕자>의 번역본도 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책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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