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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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던가?'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94쪽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유명한 파스칼 메르시어의 최신 소설의 제목은 제목부터 묵직한 [언어의 무게]. 사실 이 두 소설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언어에 예민한 주인공,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는 고전문헌학 교사, [언어의 무게]의 레이랜드는 번역가이자 '지중해를 둘러싼 나라의 언어를 전부 배우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히 살아 온 인물이다. 이들은 언어라는 종교의 성자들이다.


이 성자들과 마주한 소설 속 주변인물들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선의를 베풀며 숭배의 감정을 느낀다.


소설의 중심 사건이자 갈등의 주 요소는 우연히 삶을 뒤바뀐 사건,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포르투갈 여성과 마주쳐 학교를 무단결근하고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한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를 읽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충동적으로 오른다.


레이랜드는 편두통으로 쓰러졌다가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고 운영하던 출판사를 파는 등 주변 정리를 하다 오진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극적으로 삶을 되찾는다.


'나'라고 확신하던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우연한 사건들, 혼란 속에서 나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그레고리우스와 레이랜드에겐 언어였다. 얇은 삶을 문진과 같이 지그시 누르는 언어의 무게.


[언어의 무게]가 [리스본행 야간열차]보다 심화 버전이라 할 수 있는 건 앞의 소설보다 더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되고(아마데우의 삶이 극적이고 훨씬 열정적인 부분이 있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덩달아 뜨거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고전 언어의 해석자로 남았으나 레이랜드는 소설 끝에 가서 자신만의 소설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던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언어를 사용해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경건해지는 마음.


그리고 한창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파스칼 메르시어, 본명 피터 비에리로 철학자이자 작가분이 6월 말 타계하셨다는 뉴스를 접했다. 신작 소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선생님, 귀국을 환영합니다."


내가 나였던 게 얼마나 오래전인지 떠올려 보면 정말 기이해. 내가 여전히 그때의 나라는 사실도 무척 놀라워. 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서 오늘날의 나까지 왔다는 것도 깊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내가 당시에 내 스스로에게 있다고 느끼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니면 결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나? 그 어디에도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나온 건가? 말하자면 내 안의 중간 틈새에 있으면서, 어딘가에는 존재해야 하니 나 자신에게 있다고 부정확하게 착각한 걸까? 혹시 언제나 이런 건가? 자기 안에서 그저 중간 틈새에만 살 뿐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않고, 그저 그 틈새에서 커지기만 하는 걸까?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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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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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소설이 어울릴까?


세계 책의 날은 4월 16일 봄이고, 가을은 자타공인 독서의 계절이고, 겨울은 귤 한박스와 두툼한 러시아 소설을 챙겨 칩거하기 좋은 계절이다.

여름...뜨거운 태양 아래 비오듯 쏟아지는 땀과 진짜 비가 쏟아지면서 눅눅해지는 책장, 여름과 소설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집의 제목은 '여름'이다.


김연수 작가님이 2021년 제주도에서 개최된 낭독회에서 얻은 깨달음 이후, 방금 쓰인 따끈한 짧은 분량의 소설을 읽는 낭독회 릴레이를 시작했고 그 소설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5분에서 10분이면 한 편을 낭독할 수 있는 짧은 소설이다. 


보통의 단편소설 길이보다 당연히 짧고, 소설의 구성 요소는 충실히 갖춘 소설들. 한 편 읽고 잠시 쉬었다가 다음 편 읽고 수박 좀 먹다 와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길이의 소설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의 짤막한 이야기들이, 그들이 찰나에 깨달은 순간이, 젖은 이마에 문득 스쳐간 한 줄기 바람처럼 우리를 통과하는 소설이라면 여름에도, 아니 여름이야말로 읽기 좋은 이야기들이 아닌가.


한 편 읽고 잠시 수영을 하고 더위를 식하고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은 뒤 다음 한 편을 읽다 보면, 우리 안엔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 대해 고찰하느라 더위를 생각할 틈도 없지 않을까.


비유하자면 소설가는 마르고 젖은 존재인 셈이죠. 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발밑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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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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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읽기 좋은 소설
한 편씩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더위가 물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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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입문 -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서 메이야수, 하먼, 라뤼엘까지 인생을 바꾸는 철학 Philos 시리즈 19
지바 마사야 지음, 김상운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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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놀라운 점은 '현대사상 입문'이라는 거침없는 제목을 달았다는 것이고, 더 놀라운 점은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입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을 한 번 읽은 것만으로도 복잡하기로 유명한 데리다를 이해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다. 들뢰즈를 직접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마성까지 지닌 책이다. 정직한 제목과 정직한 내용.


현대사상을 배우면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단순화할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을 전보다 '높은 해상도'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 입문, 12쪽


저자가 알기 쉽게 정리하는 현대 사상-프랑스 철학, 특히 포스트구조주의 중심-의 핵심은 '복잡한 세계를 복잡하게 대하기'라고 할 수 있다. 통일된 규칙과 엄격한 질서를 휘둘러 세계를 매끈하고 단순하게 지배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거품처럼 정신없고 소란스러우며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특히 팬데믹 이후 중앙집권적인 통제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남들과 다른 '차이'에 유독 예민해지고(저 사람이 기침을 하잖아! 당장 격리시켜!) 혐오가 일상화되고 있다. '현대사상은 질서를 강화하는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질서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즉 '차이'에 주목합니다(14쪽)' 저자는 데리다와 들뢰즈, 푸코를 중심으로 세 철학자의 앞뒤로 이름이 새겨진 철학자들의 사상을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이들의 철학이 난해할지언정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우선,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라고 하는 데리다의 논법에 익숙해집시다.

그것을 모든 존재로 확대해 "컵은 컵, 고양이는 고양이,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는 나"라는 구별을 넘어서, 사물은 역동적으로 횡단적인 연결을 전개하고 있다는 들뢰즈적인 비전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도처에 무관계도 있으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헷갈려서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다수처럼 거품이 나는 세계라는 이미지. 이것이 존재의 탈구축입니다.

이로부터 사회문제의 구체성으로 논의를 옮겨 갑니다. "저것은 제대로 된 삶의 방식이 아니다, 일탈이다"라며 배제하는 권력관계를 먼저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강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의 불안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체제라고 인식합니다.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관리, 통제 사회 비판이 사회의 탈구축입니다. 이항대립의 어느 한쪽으로 갈라치지 않고 잡다한 삶의 방식을 '헤엄치게 두는' 애매함에 타자성을 존중하는 윤리가 있습니다.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 입문, 110쪽


복잡한 세상을 복잡한 그대로 바라보기, 그 속에서 '왜 사는가?'같은 답이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질문에 집착하다 좌절하기보다, 오늘 저녁 메뉴를 고르고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해진 작업들을 처리하는 인생의 작은 과제들을 처리하며 성취감을 누리기.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현대사상 입문]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뜻밖의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작가가 부록으로 달아 둔 '현대사상 읽기' 방법을 적용해 최신 철학자들의 저작들을 읽어 보도록 하자^^!


*위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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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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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힘이다-

존재-자체가-

더 유능해지지 않아도-

충분히-전지전능하다-

살아 있고-의지만 있으면 된다!

우리가-유한한 존재이더라도-

창조주인-신만큼-

유능하다!

에밀리 디킨슨, 677(디킨슨의 시는 제목이 없어 번호로 대신함)

집 안에 스스로를 가둔 '흰 옷을 입은 시인'의 이미지였던 에밀리 디킨슨, 그에게 처음 관심이 갔던 계기는 2년 전 읽었던 마리아 포포바의 책 [진리의 발견]이었다. 책의 내용과 서술 방식과 책이 소개하는 인물들 모두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이름은 시인 에밀리 디킨슨. 다만 그때는 그의 시보다는 생애 중심으로 읽었고 그의 시를 본격적으로 읽은 건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이다.

한국어 문장에 익숙지 않은 줄표'-'가 화살처럼 쏟아지는 그의 시는 짧고 강력하다. 디킨슨의 시 속에서 인간의 유한한 생명은 단숨에 신의 무한한 전지전능함과 동등해진다. 은둔과 죽음의 시인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의 시는 여름의 열기로 맥동하고, 시행 사이로 뜨거운 사랑이 흘러넘치며, 삶 그 자체로 가득 차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으면 시인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 라는 정의를 내리고 싶어진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다해 삶을 사랑하고 시를 쓰기 위해 스스로를 가둔 능동적인 사람이었다. '명성은 곧 치울 접시에 담긴/잘 상하는 음식(1659'이라는 싯구와 같이 명성의 접시를 거절하고 세간의 영광에 흔들리지 않으며 스스로의 삶을 써서 남겼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1800여편의 시 중 몇 편을 고른 선집만 읽고 에밀리 디킨슨을 전부 안다고 할 순 없다. 그가 남긴 '생명의 빛(883)'에 나 자신을 잠시 비추고 갈 뿐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시의 빛.

내가 죽음에게 들를 수가 없어-

친절하게 그가 내게 들렀다-

마차에는 우리 둘-

그리고 불멸뿐.

우리는 천천히 달렸다-그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공손히 청하는 바람에

나는 하던 일과 휴가까지,

제쳐 두고 떠났다-

우리는 학교를 지났다-

노는 시간이라 아이들이-옹기종기 모여-놀고 있었다-

우리는 곡물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들판을 지나쳤다-

우리는 지는 해를 지나쳤다-

아니 오히려-지는 해가 우리를 지나쳤다-

차가운 이슬방울이 떨렸다-

나는 얇은 드레스에-

망사-목도리만 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불룩한 둔덕처럼

보이는 집 앞에 멈췄다-

지붕은 거의 보이지 않고-

처마는-땅속에-묻혀 있었다-

그로부터-수백 년이 흘렀다-그런데

처음에 말의 머리가

영원을 향하고 있을 거라 추측한

그날 하루보다 더 짧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에밀리 디킨슨, 712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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