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기초 - 수와 인류의 3000년 과학철학사 Philos 시리즈 21
데이비드 니런버그.리카도 L . 니런버그 지음, 이승희 옮김, 김민형 해제 / arte(아르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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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무수한 별들이 빛나는 하늘을 관리하는 힘과 인간 내면의 삶을 움직이는 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우주에 대한 지식과 인간 정신에 대한 지식, 즉 물리학과 심리학, (비교 대상을 확장한다면)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식의 기초, 데이비드 니런버그&리카도 니런버그, 15쪽

[지식의 기초]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묵직한 제목 아래 '수와 인류의 3000년 과학철학사'라는 무시무시한 부제가 붙어 있다. 수, 수학, 수학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써서 논술로 대학을 간 전형적인 수포자가 이 책을 읽어도 될까...두려움 속에서 펼친 책은 보르헤스의 단편으로 시작하며 나를 안심시킨다.



이 책은 수학과 과학에 대한 책이기보다, 수학과 과학을 포함한 인류 지식학 전체의 역사를 아우르는 책이다. 범위가 훨씬 넓다. 그렇기에 아주 무겁진 않다. 책의 핵심 키워드 두 개만 머릿속에 박고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동일성과 차이.



인류는 3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아야 할 지식과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동일성'과 '차이'라는 두 의견으로 나뉘어 충돌하고 분열되었다. 동일성이란 이성, 과학, 불변의 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특성-그리스어로 '아패틱'이라 이름붙인-을 말한다. 쉬운 예로 2+2의 결과가 4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차이는 혼돈, 감성, 인간의 심리, 변화하고 전환되기 쉬운 것-패틱-을 말한다. 차이의 관점에서 2+2는 4가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니까 초콜릿을 먹으면 반드시 기분이 좋아진다, 2(우울한 마음)에 2(초콜릿)를 더하면 4(행복한 마음)가 변함없이 도출될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 수(여기서 수는 공리에 기초한 전체 수학을 의미한다)는 아패틱을 요구한다.

- 절대적으로 패틱하거나 아패틱한 것은 없다. 우연에 따라 패틱하거나 아패틱해질 뿐이다.

같은 책, 259쪽

현대의 우리는 절대 불변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양자역학만 하더라도 인간의 관측에 따라 입자 혹은 파동으로 바뀌는 세계를 설명한다. 모든 지식은 동일성 혹은 차이를 향한 우리의 의지에 좌우된다(260쪽) 중요한 건 우리의 의지,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선택이다.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동일성에만 치우쳐 절대적인 진리에 목을 메는 태도는 독단적인 폐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2+2는 4일 수밖에 없어! 라는 세계는 마치 인간을 MBTI결과에 따라 직업을 정해 주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예외를 가차없이 제거하는 파괴적인 곳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2+2는 5이기도 하고 10이기도 하니까 다 정답으로 체택하자!는 세계는 집을 지을 때 왼쪽 벽과 오른쪽 벽 높이를 제멋대로 측량해 결국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 없는 혼돈과 비이성의 결과만 존재하는 곳이 될 수 있다. 2+2가 4라는 암묵적인 규칙을 모두 인정하는 태도는 분명 필요하다.



필연적인 동일성이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지식의 완전히 안정된 기초는 없다. 일자와 다자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 주는 공리도, 사유법칙도, 수학적 유추도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책, 404쪽

책의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틀도, 대신 선택해 주는 신도, 진리도 없다. 우리 자신 안에 동일성과 차이라는 동시적 신비를 키우려고 노력하기.(406쪽) 나라는 존재의 변화무쌍함을 인정하면서도 '나'라는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틀을 발견하기. 성격유형검사로 나라는 인간을 파악하면서 나 자신의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마음 같은 것.



책을 읽으면서 동일성과 차이라는 개념만 확실히 파악해도 두 개념을 통한 지식 추구의 방법을 깨닫는 것이 훨씬 안전해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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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션 1
정보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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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의 초기작 [호]는 순식간에 읽힌다. 이야기가 쉽거나 단순하다는 말이 아니다. 여우에 홀리듯 이야기에 홀려 읽게 된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 이야기의 현대 소설판, 이야기의 속도감과 사건이 휘몰아치는 구성 등이 웹소설 느낌이 난다 했더니, 2008년 디지털문학상 수상작이다. 웹소설의 원조격이라 하면 될까.


줄거리는 예상 가능하다. 여우 지은에게 홀린 주인공 기준은 그녀와 결혼까지 결심한 순간 할머니의 방해로 헤어지고 여우와 함께했던 기억을 잃는다. 할머니가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기준은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여우와 재회하나 그에겐 여우와 함께했던 기억이 없는데...(더 보기)


결국 기준과 지은은 영원히 헤어지고 그는 혼자 남게 된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라고 평할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소설이 매혹과 몰입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주인공은 지은에게 몰입했던 경험을 비록 기억하진 못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녀와 보냈던 시간의 기억을 나는 대부분 잃었지만, 그 맹목적인 몰입이 주던 행복감은 기억한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립다.(205쪽)


지은을 우연히 만나기 전까지 기준은 적당히 중간 정도 가는 삶을 살아 왔던 인물이었다. 어느 날 버스 추락 사고에서 지은과 만난 기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한 사람에게 온전히 몰입한다는 경험은 귀하다. 물론 지나친 몰입은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 할머니로 대표되는 어른의 지혜가 그것이다. 몰입의 경험은 귀하지만 선을 넘지 말 것. 여우와 개(할머니)의 대립과 싸움과 일련의 사건들이 마무리되고 기준은 지은을 잃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주어진 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207쪽)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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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기담 : 매운맛 여름기담
백민석 외 지음 / 읻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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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기담-매운맛]을 받아들면 처음 드는 생각은, 표지 디자인이 대단하다!


펼쳐들고 읽다 보면, 이게 '매운맛'이라고..?


첫 작품 백민석의 <나는 나무다>, 시작부터 '나는 나무다. 사람들이 내 발밑에 와서 시체를 묻고 간다.'로 강렬하게 시작되는 이야기. 수많은 시체를 발 아래, 아니 뿌리 아래 두고 있는 오래된 나무의 서늘한 시점은 서술의 직접적인 측면에서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단편이다.


한은형의 <절담>, 과거 구천사의 암매암에서 화자인 내가 '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내 기억을 확신할 수 있는가? 가장 난해한 작품.


성해령의 <마구간에서 하룻밤>, 마굿간을 별장으로 개조한 곳에서 지내는 주인공 문진은 친구 순연의 방문과, 팔려고 내놓은 별장을 보러 왔다며 찾아온 노부부의 방문으로 혼란에 빠진다. 저들은 왜 주인인 나를 은연중에 무시하며 이곳을 제집마냥 지내고 있는가? 이야기의 끝에 가면 어떤 깨달음이 온다. 뒷맛이 좋지 않은.


성해나 <아미고>, AI가 일상이 된 세계 속 로봇이 액션배우 자리를 차지하고 유일한 인간 액션 배우로 남은 나, 그런 나에게 로봇은 위험한 스턴트 액션을 대신 받아내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당신은...무사할 거야, 아미고.' 그 로봇은 왜 그런 말을 인간인 내게 남겼을까?


이게 왜 매운맛이지? 의아한 상태로 계속해서 읽다 보면 서서히 올라온다. 혀끝이 마비되며 끈질기게 불편한 아린 뒷맛이 느껴진다. 이 이야기들은 천천히 음미하며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어야 그 매운맛을 느낄 수 있다. 캡사이신의 불타는 매운맛이 아닌 혀를 굳게 하는 아린 매운맛.


공포는 현실에, 이 사회에, 소설의 바깥에 있다. 우리는 어쩌면 그 같은 진짜 공포에서 도망치기 위해 책에서, 영화에서 공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름기담-매운맛] 41쪽


위의 말대로 우리는 현실의 매운맛을 잊기 위해 이런 [여름 기담]과 같은 이야기들로 가끔씩 혀를 마비시켜 놓는 것이 필요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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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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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 특유의 믿을 수 없는 화자를 감안하고 읽다 보면, 프닌을 희화화하는 태도의 문제점을 자각하게 된다, 반전이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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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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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시를 하잖아!" 하겐이 외쳤다. "그게 비극이라는 거야! 예를 들어 저 사람"-환한 표정의 프닌을 가리키며-"누가 저 사람의 개성을 원할까? 아무도 원하지 않아! 세상은 티모페이의 원더풀한 개성 따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내팽개치겠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프닌, 248쪽

프닌과 같은 사람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우리가 학생일 때 만났던 선생님 중 한두 명, 반에서 재능 많은 친구가 성대모사를 시도해 박장대소를 유발하는-그의 제스처, 특유의 버릇, 말투의 재현도가 높을수록 높아지는 찬사-특이한 선생님의 기억. 러시아에서 탈출해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교수 프닌은 '프닌 연기'가 파티의 흥을 돋구는 역할을 할 만큼 특유의 개성과 습관을 가진 사람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그의 어색한 영어(그의 러시아어가 음악이었다면, 그의 영어는 살인이었다-98쪽), 번역으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서툰 영어는 나보코프 특유의 언어유희와 결합되어 프닌어를 형상화한다.

프닌은 우스꽝스러운 희극적인 캐릭터라고, 소설의 화자 '나'가-그의 정체는 소설 마지막 장에 가서야 밝혀진다-앞장서서 그를 놀리는 데 진심으로 임한다. 소설 도입부에서 기차를 잘못 탄 줄도 모르고 행복해 하는 프닌의 외모를 놀리고 프닌의 정형화된 여행 짐 목록을 세세히 열거하며 놀리고 프닌이 기계와 상성이 맞지 않다며 놀리고 프닌의 모든 것을 웃음거리로 알뜰하게 써먹는다.

프닌은 웃음거리의 소재가 될 인물인가? 그는 풍자의 대상이 될 만한 큰 잘못을 지었나? 소설을 읽으며 화자 '나'의 프닌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웃으며 따라가다 어느 순간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잘못 탄 기차에서 내려 심장 통증을 느끼며 과거 러시아의 기억을 떠올리는 프닌, 첫 결혼에 실패하고 전 아내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울음을 터뜨리는 프닌, 러시아에서 어긋났던 약혼과 그 약혼자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된 뒤 세상에 대한 실망에 짓눌리는 프닌, 그를 존중하지 않는 학교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프닌, 그의 고통과 슬픔과 고독과 외로움은 정당하다. 프닌은 함부로 웃음의 소재로 쓰일 인간이 아니다.

잊어야 했던 이유는, 자기기만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미라가 그렇게 죽는 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 안에서는 그 어떤 양심도, 따라서 그 어떤 의식도 계속 유지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같은 책, 202쪽

"사람들이 자기의 은밀한 슬픔을 그냥 좀 가지고 있게 내버려둘 것이지, 안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진짜로 소유한 것이 슬픔 말고 뭐가 있습니까?"

같은 책, 76쪽

슬픔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진정 문제적인 존재는 화자 '나', 그가 프닌을 대하는 불합리한 태도가 문제다. '나'는 작가 나보코프 자신이자 나보코프 특유의 '믿을 수 없는 화자'이다. 소설을 끝까지 읽은 뒤 우리는 프닌을 희화화하는 '나'의 목소리를 문제삼을 수 있게 된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특이한 버릇이 있다는 이유로, 언어가 서툴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웃음의 소재로 사용하는 태도를 경계하게 만든다. 한 인간을 웃음거리로 만들 때 그가 가진 슬픔을 생각해 보라, 누구도 함부로 웃음의 소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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