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학 작품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다(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상황은 맥락 및 환경, 이야기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
스즈키 이즈미는 일본의 70-80년대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작가이자 배우, 예술가였다. 그를 둘러싼 '상황'은 일본 버블 붕괴 직전 경제 급성장기로 들끓던 시대였다. 돈과 물자가 넘쳐나고 사람들은 무언가에 취해 있던 흥청망청의 시대. 그 속에서 여자는 '여자아이는 귀여워야만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스즈키 이즈미, 메마른 폭력의 거리, 같은 책, 374쪽). 순종적인 여성상이 강요되는 세상이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이 세계가 강요하는 여성상에 도무지 맞출 수가 없다. 연기한다. 여자를 연기하는 나를 느끼며 괴로워한다. 왜 여자는 남자와 달리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인가? 혹시 나는 잘못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나는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 아닐까? 아니면 이 세계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스즈키 이즈미는 자아와 세계의 불일치, 그 어긋남을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SF의 형식을 가지고 온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정통 SF는 아니다. 그에게 SF는 이야기를 담기 위한 하나의 그릇이다. 나라는 존재의 이질감을 이야기하거나, 세계의 낯섦을 형상화한 단편소설들.
인간을 연기하는 괴물(밤 소풍)
나는 사실 외계인이다(계약)
그가 사실 외계인이다(달콤한 이야기)
자원이 고갈되고 여자가 주도하게 된 세계(여자와 여자의 세상)
인구 폭등으로 무작위 추첨을 통해 인간을 냉동하고 그의 정신은 다른 인간에게 전이하는 세계(유 메이 드림)
진짜 사랑이 존재하는지 탐구하는 두 작품까지(페퍼민트 러브 스토리, 무조건 지루해)
그는 소설을 통해 나는 진짜 인간이 아니고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단순한 공상을 넘어 구체적인 작품으로 구현해 낸다.
여자는 여자를 연기해야 한다. 긴 머리와 하이힐, 레이스 달린 원피스, 순종적인 태도, 화장품과 보석을 좋아하는 척 하고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종족이 여자라고 한다. 진짜 나와 여자로서의 나 사이의 거리감이 괴로워 고뇌하고 연기하며 글을 쓰다 끝내 생물학적인 자기 자신을 물리적으로 스스로 끝마친 30여 년 전의 스즈키 이즈미라는 한 인간은 지구인이 아닌 것처럼 글을 썼다. 이 글은 외계 행성에서 날아온 오래된 편지다.
'사실 너도 우리와 같은 종족이야'
멸망을 앞둔 세계, 무기력한 청춘, 도처에 즐비한 폭력,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세계의 형상 속에서 우리는 비틀거리며 편지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