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과 음악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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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요한 요한슨의 <오르페>를 들으며 천천히 읽는 새벽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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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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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쪽, 영화 혹은 예술이 그들의 상상과 덜 비슷할수록, 출발점과 도달점 사이의 길이 더 길고 변덕스러울수록, 결과가 그들을 더 놀라게 할수록, 더 만족한다. 중요한 것은 여행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초기암 트룽파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이 곧 목적'인 것이다. 요가에 대한 기분 좋으면서도 세련된 책을 쓰겠다는 내 애초의 계획과 벨일의 호텔방에서 내가 타이핑 연습을 구실 삼아 짜 맞추기 시작한 것 사이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 끔찍하기까지 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 6개월이 지났고, 책은 완성되었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열린책들


이것은 요가에 대한 책이다. 요가-명상에 대한 수십 가지의 정의가 등장한다. '나'는 요가를 한다. 몇십 년 동안 요가와 태극권과 각종 명상법을 섭렵하고 오랜 기간 수련해 온 숙련자다.


이것은 요가에 대한 책이 아닐 수도 있다.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양극성 장애로 인한 정신병원 입원, 그리스 섬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아이들에게 글쓰기 가르치기, 여자들, 요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라울 뒤피의 그림으로 형상화된 지옥 밑바닥으로 '나'를 등떠민다.


'나'는 작가 에마뉘엘 카레르 본인이다.


에마뉘엘 카레르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에 흥미를 느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소설이고 소설이 아니기도 한 매력적인 책들. [나 아닌 다른 삶]과 [왕국], [리모노프]와 [러시아 소설]은 읽는 중이다. 모두 작가가 등장하여 내가 겪은 사건, 느낌, 감정, 생각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솔직하게 밝힌다.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라면 그의 책은 소설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진실을 형상화하는 이야기라면 이건 소설이 맞다.


-215쪽, 나는 문학에 대해, 그러니까 내가 실행하는 문학에 대해 하나의 확신이, 오직 하나의 확신이 있으니, 이곳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이 소설, 혹은 문학, 한 권의 책을 즐기는 방법은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련된 요가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시작된 야심 가득한 프로젝트가 어떤 풍랑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온갖 고생스러운 모험 끝에 닿게 된 미지의 섬이 어떤 모습인지 여정 전체를 감상해 보기. 지옥의 밑바닥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 죽지 않게 되는지 끝까지 함께하기. 결국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기.


어쩌면 요가로 대표되는 명상 수행 역시 명상을 통해 어떤 인간으로 바뀔지 기대하기보다 요가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우리의 삶이 살아가는 과정이 삶의 끝보다 훨씬 중요하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죽지 않고, 죽지 않는 과정 자체가 삶이고, 삶이 나 자신이다.


이것은 요가에 관한 책이 맞다.


-447쪽, 우리는 계속해서 죽지 않는다.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계속 죽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여기에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자신의 신용 한도를 다 써버렸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무언가가 일어난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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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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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트랑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책을 많이 챙기지 않았다. 얇고 가벼운 전자책 리더가 하나를 챙겼다. 밀리의 서재 앱에 을유문화사에서 최근 재출간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5부작'이 있어 미리 다운받아 두었다. 리플리 증후군으로 익숙한 리플리라는 캐릭터가 궁금했다. 시리즈 첫 권인 [재능 있는 리플리]를 읽기 시작했다.


호텔 침대에서, 수영장 썬배드에서, 책을 쉽게 내려놓기 어려웠다. 사기꾼이자 두 명이나 죽인 살인자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지 되물으며 끝까지 읽었다. 어느새 톰 리플리를 응원하는 나 자신이 웃겼다. 그만큼 리플리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창조한 하이스미스의 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지만.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하는 리플리 증후군이 이 소설에서 유래했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인정받는 증상은 아니라 한다. 심지어 원작의 리플리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는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인지한다.


리플리는 리플리 증후군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뛰어난 연기자이자 타인의 필체나 목소리 흉내에 능하여 이를 통해 여러 사기 행각을 벌인다. 가장 큰 사건은 부유한 집안 아들인 디키를 살해한 뒤 디키 흉내를 내며 그의 돈을 갈취한 행위다. 디키를 연기하며 디키의 서명을 위조해 수표를 현금으로 받아 펑펑 쓰며 유럽 여행을 즐기는 리플리는 자신이 톰 리플리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그는 물건을 소유하는 게 좋았다. 잔뜩 소유해서 좋은 게 아니라, 엄선해서 고른 몇 가지를 쭉 쓴다는 게 좋았다. 그런 물건들이 그의 자존심을 채워 주었다. 과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엄선된 물건의 품질이, 그리고 그 품질을 고이 간직하려는 애정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덕분에 톰은 자기 존재를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그렇다면 자기 존재를 즐긴다는 게 뭔가 가치 있는 일 아닐까? 톰이라는 존재는 존재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존재를 즐길 줄 아는 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돈만 많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 확실한 담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 존재를 즐기는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재능 있는 리플리



톰 리플리가 그저 그런 사기꾼이자 파렴치한 살인자를 넘어 그 이상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캐릭터인 이유가 '존재를 즐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미국 하류 인생을 전전하던 이가 우연과 살인과 사건을 겪고 돈을 얻게 되자 세련된 미적 감각을 돋보이며 지금 봐도 더 없이 알찬 유럽 여행을 누린다. 리플리는 리플리 본인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말대로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나는 리플리의 범죄 행각을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법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한편으론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는지 궁금하고 따라가게 된다. 그를 옹호하거나 응원하지는 않겠다. 리플리라는 캐릭터를 '즐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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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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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30년 전 글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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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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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먼 별에서 온 인간이야. 몇천 년 전 얘긴데, 그 별이 망하려고 해서 구세주가 구하려고 한 거야. 난 먼 별에서 다른 별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다양한 주문을 받았고, 그 결과 내 몸은 죽은 것과 다름없어졌어. 그래서 이 지구에 지금 다시 태어나게 된 거야."

스즈키 이즈미, <계약>, [여자와 여자의 세상] 81쪽


모든 문학 작품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다(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상황은 맥락 및 환경, 이야기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


스즈키 이즈미는 일본의 70-80년대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작가이자 배우, 예술가였다. 그를 둘러싼 '상황'은 일본 버블 붕괴 직전 경제 급성장기로 들끓던 시대였다. 돈과 물자가 넘쳐나고 사람들은 무언가에 취해 있던 흥청망청의 시대. 그 속에서 여자는 '여자아이는 귀여워야만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스즈키 이즈미, 메마른 폭력의 거리, 같은 책, 374쪽). 순종적인 여성상이 강요되는 세상이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이 세계가 강요하는 여성상에 도무지 맞출 수가 없다. 연기한다. 여자를 연기하는 나를 느끼며 괴로워한다. 왜 여자는 남자와 달리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인가? 혹시 나는 잘못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나는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 아닐까? 아니면 이 세계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스즈키 이즈미는 자아와 세계의 불일치, 그 어긋남을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SF의 형식을 가지고 온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정통 SF는 아니다. 그에게 SF는 이야기를 담기 위한 하나의 그릇이다. 나라는 존재의 이질감을 이야기하거나, 세계의 낯섦을 형상화한 단편소설들.


인간을 연기하는 괴물(밤 소풍)

나는 사실 외계인이다(계약)

그가 사실 외계인이다(달콤한 이야기)

자원이 고갈되고 여자가 주도하게 된 세계(여자와 여자의 세상)

인구 폭등으로 무작위 추첨을 통해 인간을 냉동하고 그의 정신은 다른 인간에게 전이하는 세계(유 메이 드림)

진짜 사랑이 존재하는지 탐구하는 두 작품까지(페퍼민트 러브 스토리, 무조건 지루해)


그는 소설을 통해 나는 진짜 인간이 아니고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단순한 공상을 넘어 구체적인 작품으로 구현해 낸다.


여자는 여자를 연기해야 한다. 긴 머리와 하이힐, 레이스 달린 원피스, 순종적인 태도, 화장품과 보석을 좋아하는 척 하고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종족이 여자라고 한다. 진짜 나와 여자로서의 나 사이의 거리감이 괴로워 고뇌하고 연기하며 글을 쓰다 끝내 생물학적인 자기 자신을 물리적으로 스스로 끝마친 30여 년 전의 스즈키 이즈미라는 한 인간은 지구인이 아닌 것처럼 글을 썼다. 이 글은 외계 행성에서 날아온 오래된 편지다.


'사실 너도 우리와 같은 종족이야'


멸망을 앞둔 세계, 무기력한 청춘, 도처에 즐비한 폭력,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세계의 형상 속에서 우리는 비틀거리며 편지를 읽는다.


"인류라는 건, 여자를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그랬어."

"그럼 그런 거야."

"남자는?"

"그것도 인류의 한 변종이지만, 어차피 이단이고 기형이야."

스즈키 이즈미, 여자와 여자의 세상, 15쪽


"네 영혼은 나랑은 다른 재료로 이루어져 있나 봐."

엄마가 말했다.

"응, 아마....아주 질 나쁜 재료일 거야."

나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스즈키 이즈미, 유 메이 드림, 196쪽


속도가 문제인 것이다. 인생의 절대량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늘고 길거나 굵고 짧거나, 어느 쪽이든 다 써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 것인가?

스즈키 이즈미, 언제나 티타임,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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